2.2.5. 사람을 죽이지 마라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나의 생명도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고, 나는 내 생명의 관리자입니다.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존권은 하느님께로부터 보장받은 것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20,13)
하느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십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계명을 듣고 큰 안도와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살이 할 때는 때리면 맞아야 했습니다. 내 가족이 지배자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해도 하소연 할 곳이 없었습니다. 요셉도 포티파르의 아내로부터 억울하게 모함을 당했지만 하소연할 곳이 없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선포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낯선 무리에 들어가도 내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제로 붙잡혀가서 노역을 하며 종살이를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시키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이렇게 자신의 생존권을 보장받았으니 다른 이들의 생존권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① 보장받는 생존권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것은 생존권을 빼앗는 행위입니다.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보는 이들은 가혹하게 노동을 착취하고, 그 노동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갑니다. 노동자들에게 안전한 노동 환경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익을 추구하는 고용주는 노동자의 안전은 무시하고, 그저 생산과 목적 달성의 도구로만 생각합니다. 노동을 하는 이들에게 휴식을 취할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행위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이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렇게 약한 이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또한 삶의 자리를 빼앗는 것도 생존권을 빼앗는 것입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퇴거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생존권은 사회정의의 구현과 실질적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달과 통제할 수 없는 시장경제는 소득의 양극화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고,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을 더 위협하고 있습니다. 쪽방이나 반지하방, 냉난방을 할 수 없는 옥탑방, 비정규직, 무자비한 고금리, 인신매매, 다양한 폭력…,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생존권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국가는 사회적 약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해야 합니다. 최저임금 보장, 사회복지, 무상의료, 교통비 지원, 임대주택 등도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법적 조치입니다. 당연히 보호받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는 이들에게는 “생존권”이 얼마나 절실한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것도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분별한 벌목이나 살생,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행위들도 다양한 생명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② 미움과 분노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들에게 이웃에 대한 직접적인 살인이나 상해 등에 대해서만 금지하셨지,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나 미움 등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백성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뿐 아니라 분노나 모욕, 매도 또한 살인행위라고 가르치시며 금지시키셨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미움은 상대방을 칼이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미워한다는 것은 피를 본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신기하게도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계속해서 그를 미워하도록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 부정적인 이야기는 내가 그를 미워하는 것을 합리화시켜 주고, 그를 미워하면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이렇게 미움의 그릇은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채워집니다. 그 그릇은 들고 있는 한, 절대로 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미움의 그릇을 얼른 버려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 백성은 당연한 것을 넘어서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한 마디의 부주의한 말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가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상처를 준 나는 그것을 잊고서 “내가 언제?”라고 말하며 웃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박힌 못이 빠져도 못자국은 남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그러게 흔적이 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존중해야 하고,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생각과 말과 행위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서로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며 창조질서에 협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였던 그 ‘질투와 시기와 미움의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고, 손에 움켜쥐고 있는 그 분노의 돌을 내려놓을 때, 우리의 생명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하느님 백성의 삶이고, 하느님 자녀들의 삶입니다.
나눔 23: 나는 어떻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까?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생기 넘치는 삶을 살도록 나는 어떻게 도와주고 있습니까?
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내 옆에 있는 이들도 모두 하느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삶은 가정 안에서 충실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폭력이 사라질 때 가족은 진정 평화가 무엇인지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가정에서의 크고 작은 폭력은 학교나 직장으로 이어지고, 학교나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은 피해자를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트려 버립니다. 공황장애, 우울증, 대인기피, 피해망상, 자해,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그 시작점은 가정에서 쏟아지는 부주의한 말 한마디, 사랑 없는 말 한마디라는 것을 하느님 백성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