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탈출23,1-9)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원하셨습니다. 이집트의 지배자들은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의와 평화가 아니라 노동과 복종만을 요구하였습니다. 불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자유를 찾았으니 삶의 형태를 바꾸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사랑으로 훈육하듯,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백성은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배려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은 공동체에서 구체적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정의를 실천할 수 있도록 모세를 통하여 규정과 법규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포하셨으니 인간은 실천하면 됩니다.”
선포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실천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실천되지 않는 정의는 그저 무리를 지어 자신들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입니다. 선포만 하는 정의는 정의라는 이름의 또 하나의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정의와 평화가 실천되지 않으면 나는 하느님 백성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저 선포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정의와 평화를 선포하지 말고, 정의와 평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실천을 통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세상의 불의를 지적하고 단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정의를 실천하고 평화가 자리 잡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선포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았기에 주변에서 그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 부른 것입니다. 정의와 평화는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이 그들의 삶을 바꿔 놓을 것임을 하느님 백성은 믿어야 합니다.
① 헛소문을 퍼뜨리지 않기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헛소문을 퍼뜨려서는 안 된다. 악인과 손잡고 거짓 증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탈출23,1)고 말씀하셨습니다. 헛소문은 피해자를 죽음의 고통으로 몰고 가고, 거짓 증인의 삶은 올바른 이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밝은 웃음이 넘쳐나게 됩니다.
소문(所聞)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세상에 떠도는 소식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그 중심에 서서 소문을 옮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남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비난하기를 좋아해서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지 남이 잘못된 것을 좋아하며 판단하고 단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남의 잘못을 꾸짖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잘못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 사람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며, 그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남의 잘못을 누군가가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너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좋아할 사람이고, 반드시 누군가에게 이야기 할 사람이니 너에게 얘기하는 거야!”라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나와 친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악한 사람이기에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임을 그가 알았더라면 그는 분명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단죄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자비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헛소문을 내는 사람을 어찌 자비로운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잘못을 공개적으로 떠들고 있는 그 사람을 어찌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비로운 사람은 설령 내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감싸주며 내 삶의 변화를 위해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헛소문을 퍼뜨렸으면 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어.”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헛소문을 퍼뜨렸을 경우 고해성사를 보고 끝낼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과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복음을 선포하는 존재이지 헛소문을 퍼뜨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② 다수를 따라 악을 저지르지 않기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다수를 따라 악을 저질러서는 안 되며, 재판할 때 다수를 따라 정의를 왜곡하는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또 힘없는 이라고 재판할 때 우대해서도 안 된다.”(탈출23,2-3)고 말씀하십니다. 다수가 언제나 정의는 아닙니다. 힘없는 사람이라 하여 자비심에 죄를 눈감아 줘서도 안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일도 하느님 백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선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모으고, 자신의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악행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여론”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기도하며 뒤로 물러날 줄 알아야 합니다. 분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옳다”라고 판단하게 되면, 그 판단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모든 이들에게 신뢰와 평화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정의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단죄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마저 그 대열에 합류해 있다면 방향을 잡아줄 곳은 아무데도 없게 됩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고민을 들고 오는 곳입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허물을 단죄하면 그 아들은 갈 곳이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며 결정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다수를 따라 판단하는 것도 악이 될 수 있음을 하느님 백성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③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하느님께서는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23,4-5)고 말씀하십니다. 그 원수가 밉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백성은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의인이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10,29-37)를 통해서 하느님 백성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조건 없이 도와주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그냥 지나치거나 “그러니까 저런 벌을 받는 것이지.”라며 단죄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④ 가난한 이의 권리를 찾아주기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재판할 때 가난한 이의 권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거짓 고소를 멀리해야 한다.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 나는 악인을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탈출23,6-7)고 말씀하십니다. 거짓으로 사건을 만들어서 소송을 걸고 가난한 이나 불쌍한 이들의 권리를 약탈해서는 안 됩니다. 무죄한 이들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났고, 긴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가난한 이의 권리를 보호하고,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보호하는데 앞장서는 사람들입니다. 부유하다 하여 그의 죄를 덮어 주고, 가난하다 하여 그의 마음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을 죄 없다고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내가 악인을 변호하고, 의인의 권리를 짓밟을 때는 나 또한 그 악인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⑤ 뇌물을 받지 않기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뇌물은 온전한 눈을 멀게 하고, 의로운 이들의 송사를 뒤엎어 버린다.”(탈출23,8)고 말씀하십니다. 뇌물을 받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편협하게 재판을 해 준다면 그 피의 대가는 내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뇌물(賂物)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 제공하는 것이며, 이권을 얻을 목적으로 일정한 직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매수하기 위하여 넌지시 주는 부정한 돈이나 물품을 말합니다. 그 선물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그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 됩니다.
그런데 다양한 선물들은 시간이 지나면 뇌물로 바뀔 가능성이 커집니다. 선물을 통해 친교가 유지되고, 친교를 이룬 사람의 “개인적인 말 한마디”를 그냥 넘기지 못하게 되면 그가 나에게 베푼 모든 호의는 결국 뇌물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 백성을 이끌고 있는 이들은 그 뇌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재물을 섬기지 말고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
후한 시대에 “양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왕밀”이라는 사람이 황금을 가지고 찾아와 받아달라고 하였습니다. “왕밀”은 양진에게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기에 그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양진은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왕밀은 양진이 남의 눈을 의식해서 그런가 하여 “지금은 밤중이고 이 방 안에는 당신과 저 뿐입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황금을 받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양진은 왕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알고 있지 않은가?”(天知 地知 汝知 我知) 그 유명한 말이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왕밀은 양진의 말에 부끄러워하며 물러갔고, 그 후로 양진은 더욱 청렴결백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⑥ 이방인과 나그네를 배려하기
하느님께서는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탈출23,9)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전의 자신들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배려해 주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이제 그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계속해서 받고 싶다면 계속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방인과 나그네를 배려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이 주도적으로 해 나가야 할 사명입니다. 배려는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문을 열어 주어야 그가 들어 올 수 있고, 내가 음식을 마련해 주어야 그가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내가 옷을 주어야 그가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가 비록 이방인이거나 나그네라 할지라도 그를 존중하고 배려해 주면,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시고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또한 이러한 규정들을 공동체가 잘 지켜 나간다면 그 공동체는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은 이러한 규정들이 어린 시절부터 몸에 습관이 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규정들을 어릴 적부터 잘 지켜 나갈 수 있도록 가정과 교회 안에서 가르친다면 그들이 성장하여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때에는 “하느님 백성의 합당한 품위”를 통해서 하느님께 큰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정의를 실천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정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정의는 헛소문에 반응하며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단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많은 사람이 그를 단죄한다 하여 합세하여 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도움을 내미는 삶이지, 상대방의 어려움을 보고 그냥 지나치거나 서로 싸움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가난한 이, 말 못하는 이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것이지 다수의 무리에 편들며 그들을 부추기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편협한 시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절대적인 선으로 포장하여 선포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정의는 한 번 입었다가 불편하다고 벗어 버리는 그런 겉옷 같은 것도 아닙니다. 정의는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고, 내 몸에서 하느님을 향한 열정 때문에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