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는 무엇을 기적이라 불렀는가?
전개2 : 성서의 기적을 살펴 보기에 앞서서, 그 前理解로서 고대인들의 세계
상과 그에 따른 그들 나름의 기적 이해를 살펴 본다.
성서의 경전들은 대략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경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엮어졌는데, 이것들은 근동 지방과 지중해 연안 지역의 고대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그 옛 시대의 인물들이니 만큼, 자기 생활권의 문화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그들의 글귀에서, 예컨대 기적사화에서도 그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네 세계와 그 안에서의 초인간적(초자연적) 힘의 작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아보아야겠다.
고대인들이 생각한 세계상의 윤곽을 소묘하면 다음과 같다. 즉 우주 전체는 천상계, 지상의 이승, 지하의 저승 등 3개 층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천상계는 고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또는 신(神)들과 천사들이 있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신성한 곳인 하늘과 사람들이 사는 곳인 땅 사이의 공간은 선한 영(靈)들(천사들)로 말미암아 생기가 감돈다고 상상하였다. 땅 아래의 저승은 죽음의 나라요, 악한 귀신들이 잡거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모든 저자들도 그런 우주관의 테두리 안에서 사색하였다.)
그러면 이제, 이런 세계상 안에서 결국 고대인들이 기적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알아보자. 그들의 우주관에 의하면, 하느님 또는 신들과 현세 사이에는 간격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하느님 또는 신들이 현세에 영향을 끼치는 것 그 자체가 기이하게 간주되지는 않았다. 비록 그 개입을 하나하나 헤아려 밝힐 수는 없지만, 고대인들은 늘 그것을 고려에 넣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인 중의 아무도 지상의 갖가지 사건과 현상이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사실에서 미루어 어떤 불변의 자연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을 추론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들은 많은 세상일이 일상 평범하게 관습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보통일에도 신령한 권능이 작용하고 있고, 더구나 언제든지 그 진행의 규칙성을 깨뜨리어 다른 과정을 거치게 할 수도 있다는 통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대 사람들이 기적이라 부른 경우의 결정적인 요건은, 어떤 사건의 이상스러운 국면이 아니며 더군다나 자연과학적으로 측정된 그 이상스러움의 등급여하는 물론 아니고, 오히려 그 신령스러운 국면을 체험하는 데 있었다. 즉 어떤 사건을 기적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관건은 첫째로 그 이상스러운 국면, 혹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엄밀한 가부(可否)를 확인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신(神)과 그 권능의 현존 및 작용을 여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체험하는 일이었다.
현대인들이 기적이라 부르는 현상과 고대인들이 기적이라 일컬은 현상의 큰 차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두 가지 복합적인 체험 곧 이상스럽다고 느끼는 체험과 신령스럽다고 느끼는 체험이 각각 기적 이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꼭 정반대인 데 있다. 즉, 현대인의 경우는 이상스러운 국면을 주로 강조하여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에, 신령스러운 국면을 체험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고대에는 영검스러운 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신성(神性) 체험, 곧 신성의 드러남, 그 시현(示現)을 기적의 중요한 요건으로 간주했으니, 이때 이상스러운 국면은 별로 문제시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적 이해를 달리하는 근본 원인은 세계에 대한 고찰을 달리하는 데에 있다. 고대와 중세의 세계상에서는 하느님과 또한 선한 영(천사)들이나 악한 영(마귀)들도 끊임없이 그리고 직접 세상일에 간섭하는 – 혹은 적어도 간섭할 수 있는 – 막강한 권능을 가진 존재로 생각되었다. 현세에서 일어나는 사상(事象)의 결과는 예측할 수 있는 자연법칙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령들의 작용에 좌우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성서는 무엇을 기적이라 부르는가?
전개3 : 이상의 고찰과 논의를 토대로 하여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기적을 보다
깊이 이해시킴(신앙적 차원으로 이끌어줌).
방금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고대 사람들은 어떤 사건에서 신령의 영검(靈驗)을 보통 때보다 더 뚜렷이 감지했을 때 기적이라고들 했다. 성서 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몇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들의 기적 이해는 주변세계 이민족들의 통념과 구별된다. 그 차이를 좀더 엄밀하게 살펴보자! (성서에서 ‘표징’, ‘기적’, 하느님의 ‘업적’ 혹은 ‘이적’이라 부르는 현상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1) 구약성서
이스라엘 주변세계의 신화들은 우주의 생성을 혼돈상태의 자연력(自然力)들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으로 묘사하고, 신(神)들도 그 과정에서 제일 먼저 생겨났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신앙에서는 하느님이 맨 먼저 모든 자연력을 절대적으로 지배하신다. 그러므로 창조 자체가 하느님의 권능을 실증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이스라엘의 전례에서는 그것이 바로 기적으로 찬송된다(시편 136,4-7) “뭇 주인들의 주님을 찬송하여라 —, 홀로 큰 기적들을 행하신 분을 —, 하늘을 슬기롭게 만드신 분을 —, 땅을 물 위에 펼쳐놓으신 분을 —, 커다란 빛들을 만드신 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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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기네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를 친히 인도하고 섭리하시는 데서 그분의 강력한 작용을 체험하였다. 야훼의 이적(권능 행사)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은, 하느님께서 개개인의 인생도(시편 107), 전체 백성과 그 역사의 노정도 돌보신다는 신앙고백에 표명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개인의 사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보시며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 주신다는 신앙고백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구제를 체험하고 거기서 신령의 도움, 좀더 부연하면 자기 인생을 돌보고 인도해 준다고 확신한 어떤 신의 도움을 인정하는 일이다.
한편 야훼의 배려가 개인 뿐 아니라 전체 백성에게도 베풀어진다는 이스라엘의 신앙은 특히 에집트 탈출, 광야 편력, 가나안 땅 점유와 연관된 기적이야기들에 뚜렷이 표현되어 있다. 즉, 불꽃이 일면서도 타버리지 않는 가시덤불(출애 3장), 에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출애 7-12장), 갈대바다를 건넌 장거(출애 14-15장), 만나가 내리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온 기적(출애 16-17장), 예리고 성벽의 붕괴(여호 6장), 기브온에서 전투를 하는 동안 태양이 ‘멈추어 선’ 이변(여호 10장) 등이 그렇다. 이 기적이야기들은 전적으로 신앙에 입각한 역사관에 따라 엮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화들을 통해, “우리 부족들이 자유롭게 단합하여 비옥한 땅에 자리잡고 살고 있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업적이나 정치적 숙명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와 보살핌 덕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사를 이렇게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 역사관에서, 하느님은 현재도 돌보아 주시고 장래에도 구원을 베푸신다는 확신이 이스라엘 백성들간에 생기게 되었다.
2) 신약 성서
거의 2천 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장구한 역사와 책의 부피에 비해 기적과 그 사화들이 구약성서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면은 놀라울 정도로 얼마 안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전체적으로 보아 기적과 그 사화들이 한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신약의 경서들을 살피면 병의 치유와 죽은 자의 소생에 관한 기록, 그리고 포도주와 빵의 기적, 풍랑을 잔잔케 하고, 물 위를 걷고, 엄청난 물고기를 잡게 하고,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한 기적 등 이른바 ‘자연기적’에 관한 기록, 그밖에 예수의 잉태, 탄생, 세례, 거룩한 변모,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승천과 연관된 소위 ‘동반기적’(同伴奇蹟)들에 관한 기록들이 많은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구마(驅魔) 기적들이 – 구약성서에서와는 달리 – 예수의 행적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구약의 저자들과 신약의 저자들은 같은 세계상과, 또한 신앙의 눈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같은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신약성서의 기적들은 구약성서의 기적들에 비해 유별한 특색이 있다. 동시에 그 특색은 신약성서의 기적들과 주변의 고대 근동 민족들이 생각하던 기적들과의 현격한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즉, 신약의 기적에서는 예수의 생애와 그분 권능의 행적에서 명확히 드러난 대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 친히 행동하신다는 것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양은 인간과 그 (존재론적) 완성을 뒷받침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결정적이고 항구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인간과 그 역사의 완성과정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화되기 시작했고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악한 힘들은 이미 결정적으로 극복되고 있으며, 예수의 행적은 바로 그 표징이었던 것이다. 신약성서만이 기적을 이와같이 이해하고 있다.
이상 개관한 바에 따라, “성서는 무엇을 기적이라 말하는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기적이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행위의 표징으로 이해하는 괄목할 만한 사건들이다.
신앙의 차원 자체가 본질적으로 그런 사건에 속한다. 또한 결정적인 구원의 약속을 알려주고 그 약속이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의 고유한 특색이다.
성서는 주변세계의 이교적 통념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에 어긋나느냐?”따위의 문제는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근대적인 자연법칙성에 관한 개념을 몰랐으니 그런 문제는 아예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성서는 ‘모든’ 사건을 하느님의 활동 및 보살핌의 접근과 관련시켜서 관찰한다. 물론 많건 적건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징이 있게 마련이다. 성서의 기적신앙은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확신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고, 실제로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고 또한 궁극의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성서의 기적신앙은 고백하는 것이다. 기적은 하느님의 그런 구원활동의 표징이다.
그러면 성서의 기적이야기를 오늘날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오늘날 관습적으로 쓰이고 있는 ‘기적’이라는 말의 의미와, 고대 세계 및 성서에서 기적이라 일컬어진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골짜기가 가로놓여 있다고 보여 진다. 이 골짜기는 전혀 건널 수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격절의 골짜기를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있다. 그 다리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는 성서 본문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고대의 기적들을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들에 관해 뭔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글만을 대할 뿐이다. 이 지극히 자명한 인식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이 기본적 인식은 중요하고 그 영향도 매우 크다. 성서의 기적들도 우리는 옛사람들이 거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술한 그 표현양식을 통해서만 대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과학적 보고를 하는 것이 성서 본문의 서술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할 때는 그다음 다리를 놓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성서의 기적사화에 서술된 내용이 자연과학적 인식과 결코 경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의 기적사화 가운데 어느 하나도 “자연법칙이 깨뜨려졌다”는 가정을 하도록 촉구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표현법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부적당하다.
첫째로, 예외 현상을 자연법칙을 “깨뜨린 것”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연법칙”이 자연과학자들 자신에게는 그렇게 “확고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있다.(예컨대, ‘불확정성의 원리’같은 경우) 관측하고 해명할 수 있는 예외 현상이 일어나면 오히려 그것을 근거로 이제까지의 인식이 별로 정확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예외 현상이 되풀이하여 일어나면 이제까지 알려져 온 법칙의 타당성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둘째로, 기적사화들의 기초가 되어 있는 체험들은, 그 관계 사건들을 자연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있을 수 있는 예외 현상을 고찰해야 할 정도로 명확히 정의될 수는 없다. 어떤 사건과 어떤 체험들을 그 때마다 이야기로 꾸며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기적사화를 엮게 되었는가를 판단하기는 다음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어렵다. 즉, 민간에 전래되어 온 통속적 진단법, 눈에 보이는 대로의 보고, 심령학적 현상의 있을 법한 작용, 근동 지방의 고대 설화양식, 여러 저자들에 의한 각양각색의 묘사, 꽤 많은 증언의 상징성 등이 사실 판단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기적에 관한 성서 본문의 설화적 관심사는 그 보고의 정확성을 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서 본문은 무엇인가 “자연율을 거슬러” 일어났다는 가정을 충분히 뒷받침할 확실한 논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않는다. 성서는, 도대체 무엇인가 “자연율을 거슬러”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밝히는 데도 관심이 없고, 오히려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당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증언하고자 한다. 예컨대 신약성서는 물이 별안간 포도주로 변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으며, 따라서 예수께서 “자연율을 거슬러” 행동하셨다는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당신 영광을 드러내셨다”는(요한 2,11) 사실만 밝히고 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유형의 확언이다. 이를테면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은 이미 부활 체험을 전제로 하고 있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진다는 믿음에 의거하고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통해 이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곳에서 무엇인가 “자연율을 거슬러” 일어났느냐 하는 문제는 아예 제쳐 놓고 오직 한 가지 의향을 가지고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의 “현대적” 기적이해와, 성서가 증언하는 기적 사이에 가로놓인 격절의 골짜기를 건너는 다리는 다음의 세 가지 통찰이다.
① 우리는 기적 자체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적에 관해 이야기하는 성서 본문만을 언제나 대한다는 통찰.
② 성경의 기적사화는 첫째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데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의거해서, 현재와 미래에도 전개되는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눈뜨게 하고 그럼으로써 직접 거기에 동참케 하려 한다는 통찰.
③ 성서의 기적사화는 자연과학적 서술을 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사실과 그 방법을 증언한다는 통찰.
<보충 설명> 표징으로서의 기적
네 복음서는 예수를, 갖가지 기적을 행하시는 분, 또는 당신 자신에게 기적이일어나게 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우리는 예수의 기적을 직접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약성서에 기록된 증인들의 중개를 통해서만 대할 수 있으므로, 우선 성서 본문의 증언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한다. 처음부터 “예수의 기적은 실제로 일어났던가”하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물음은 짐짓 의식적으로 제기하지 않기로 하자. 이런 물음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물음은 아니고, 더구나 이런 물음도 성서 본문을 정독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써야만 비로소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기적에 관한 신약성서 메시지의 본질적 견해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른바 “개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이 조리 있게 기적을 이해하는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그 견해가 암시해 줄는지 모른다.
예수의 기적은 표징이다. 표징은 그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을 가리키며 거기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 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의 행위는 표징으로서 예수께서 어떤 분인가를 가리킨다.(특히 마태 11,2-6 참조) 즉 예수의 행적 안에서 우리는 예수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구약에서부터 기다려 온 구원시대가 예수의 현재 행적에서 드디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니까 옛 예언들과 이스라엘의 갈망이 그분과 더불어 실현되기 시작했고, 그분의 역사적 등장으로 돌연 하느님의 다스림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루가 11,20)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예수에 의해 완성된 것은 아니고, 따라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죽음이 현세에서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분을 통해 삶들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확고부동하게 선포되었고, 그분의 구제활동으로 하느님에 의한 인간 구원이 결정적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기적은 표징으로서, 예수의 인품 및 그분의 행적과 더불어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음을 가리킬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다스림이 어떤 것인지를, 즉 하느님께서 당신 다스림의 권능을 미치시면 사람이 ‘구원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의 기적은 또한 그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설명하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뚜렷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그 기적들은 예수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구원의 선포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며 그 목적하는 바가 설교와 같으니, 바로 회개하고 믿을 것을, 다시 말해서 예수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할 것을 촉구하고, 또한 현세생활에서 소외된 사람들, 예컨대 고생하는 이들, 약한 이들, 병든 이들, 무능한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들은 사람들에게 친히 구원을 선사하시고 모든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한 분이 현존하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기적과 예수의 말씀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은 중요한 사건들 즉 기적을 전해줄 때마다 예수께서 신앙에 의해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표징의 깊은 의미를 친히 천명하시는 담론 또는 대화와 결합시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표징으로서의 기적은 신앙을 요구한다는 폭넓은 관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이란 결코 어떤 완숙의 경지 또는 성도(成道)의 극치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구제하기 위한 조건으로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식하기를 기대하시지는 않았다. 그분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스스럼없이 당신께 의탁하여, 더 중대한 사실을 이해하고 마침내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구원활동을 파악하기를 요구하셨을 뿐이다. 그분은 표징의 의미를 깨닫고 계속 거기에 따라 처신하는 믿음을 기대하셨던 것이다. 그분의 반대자들은 이런 자기 개방성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경직되어 용의 주도한 선입관 안에 들어박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기적이 표징으로 이해될 수 없었다. 그들은 증명을 원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결단코 이 세대에게는 표징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12).
표징의 특색은 예수의 요구가 정당함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그분의 기적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는 것이니, 거기에는 물론 세상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또한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선언되는 요구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국면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은 세례자에게 전한 예수의 답변 끝맺음에서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되다”고 하신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결론적으로, 기적이란 다만 – 그러나 항상! – 예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시사하고 또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분을 통해서 활동하시고 계획하시는 일을 시사하며 거기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사실과, 예수 자신이야말로 “신약성서의 기적사화들을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이라는 사실이다.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사람을 보내어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그분께 “당신이 오실 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여쭈어 보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듣고 보는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리시오.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습니다. 나에게 걸려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마태 11,2-6)
우리는 무엇을 기적이라 부르는가?
전개1 : 현대인들의 다양한 기적이해를 살펴봄-성서의 기적 이해를 위한 준비
(가상 또는 실제의 현대 성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 갖는다.)
[여러분들은 기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잠시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어느 연구 단체에서 20명의 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설문을 띄웠다. “기적이란 무슨 뜻인가?”
응답자들은 각기 아래와 같은 자기 나름의 답을 보내 왔다.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 —————————— 15명
순리적으로, 즉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 ——————— 2명
예기치 않은 가운데 일어나는 사건 ——————————– 2명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자연법칙을 초월한 사건 —————– 1명
위의 모든 답변에서 눈에 띄게 공통적인 점은, 기적이란 어떤 이상한 현상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기적이 어떠한 종류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사건이냐 하는 그 속내에 있어서는 서로 구별된다.
응답자의 대다수가 자연과학을 평가 기준으로 삼고 과학적으로 인식된 자연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사건만을 기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예컨대, 낙하산으로 뛰어내리는 사람이 낙하법칙을 따르지 않고, 아래로 떨어지기는 커녕 위로 날아오른다면 기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응답자의 극소수는 기적적 사건이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답으로 만족하고 있다. 오늘날 초심리학(超心理學, 心靈學, Parapsychologie)에서 다각적으로 연구되고 있지만, 국외자(局外者)들에게는 기적처럼 생각되는 현상들이 여기에 속한다. 우선 정신 감응(텔레파시, Telepathie), 원격 인지(투시, 천리안), 미래의 예지(豫知), 염력(念力, Psychokinese) – 즉 물체에 정신적 작용을 미치어 움직이게 하거나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하는 원격 조작 – 등을 생각하면 되겠다. (요즈음 이와같은 신기한 일들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냐타내는 기호로서 그리스 문자 ‘프시’(Ψ)를 사용하여 흔히 ‘프시 현상’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런 분야에는 요술과 속임수가 따를 위험이 아주 크지만, 오늘날 보고되고 있는 여러 가지 연구 성과로 미루어 그런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예 : 러시아 염력술가 쿨라기나가 손을 대지 않고도 공을 ‘들고’있는 경우, 또는 유리겔라의 ‘숟가락 구부리기’와 같은 경우 – 보충 설명할 수도 있음] 그러나 그것을 명실 공히 기적이라 부르기에는 – 위에 고찰하는 바와 같이 – 중요한 본질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또 다른 소수의 응답자는, 어떤 사건에서 보통의 예상과 어긋나는 결과가 생기는 경우를 기적으로 간주한다. 가령 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누구나 승객의 참혹한 죽음을 예상하기 마련인데, 그런데도 모두가 무사한 경우에 그것을 기적이라 하는 것이다. [예 : 몽테카를로 자동차 경주와 같은 경우-보충 설명 가능]
이렇게 사건의 신기함에 초점을 맞춘 생각 외에, 남은 또 하나의 답에는 색다른 생각이 엿보인다. 즉, 이상한 사건의 근본 원인을 “하느님의 — 특별한 개입”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만이 보내 온 이 답에서 우리가 보통 기적이라고 말하는 현상과 하느님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명백히 지적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이런 발언의 배후에, 하느님의 작용을 본시 자연법칙에 따라 질서있게 전개되는 이 세계 내(內) 사건들에 대한 모종의 “개입”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이 깃들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시야를 가지면 하느님과 현세,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느님의 작용과 현세의 정상적 사건 전개는 서로 다른 차원의 두 가지 별개 영역이라는 것을 대개 인정하게 마련이다.
뒤에 살피게 되겠지만, 이런 관념적 연상(聯想)에는 고대 및 중세의 세계상(世界像)에서 비롯한 도식적 요소들과, 또한 훨씬 자연과학적으로 정립된 세계상에서 얻은 인식들이 매우 엉성하게 뒤섞여 있다.
아무튼 설문 조사에 나타난 답들은 오늘날 기적에 관해 널리 알려져 있는 통념과 완전히 일치한다. 자세한 정의(定義)에 있어서는 교양의 수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상함 또는 신기함이란 요인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니, 이 점이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에 대한 결정적 판단 기준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일상 쓰이는 언어에서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신통한 아이”(神童), “괴상한 짐승”, “세계 칠대 불가사의”같은 말을 곧잘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마디의 구성은 예사롭지 않고 신기하며,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는 것을 표시한다. “기적”은 “불가사의함”을 전제로 한다. 인간생활에서 뜻밖의 일, 즉 놀랍고 불가사의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만나면 누구나 즐거워하게 마련이다. 냉철한 현대인도 그와같은 체험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성서에서 우리에게 “기적”으로 소개되는 현상이 오로지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고, 이상하고, 불가사의하다”는 느낌을 주는 데 그치고 또한 그 점이 본질적으로 중요한지는 의문이다. –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성서의 기적이야기들은 이상의 기적에 대한 통념들을 한 단계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신앙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요 약>
우리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할 수 있겠다. — 오늘날 어떤 일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부를 때, 그 논거가 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예사롭지 않고 신기하다는 점이다. 물론 그 자세한 정의는 가지각색으로 표현된다. 어떤 일이 예기치 않게 돌연히 일어난다는 막연한 정의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과정이 엿보일 때 비로소 기적에 필요한 이상현상이라는 특징이 부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소간에 의식적으로 자연법칙에 비추어 판단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하느님도 기적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 대체로 그분의 행위는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현상에 밖으로부터 개입하시는 일종의 간섭으로 이해된다.
이와같은 해석을 감안하면, 기적이 점차 배제되어 가는 추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제까지 불가사의하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기적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현상들 가운데에는, 오늘날 인간의 인식이 고도로 진보함에 따라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고 따라서 더이상 기적으로 간주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기적은 당연히 날로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 예컨대 기아, 질병, 정신적 고통 따위도 의학적 또는 기술적 수단에 의해 점점 더 효과적으로 극복되고 있다. 문명의 발달은 단지 에사롭지 않고 신기하다는 의미로만 이해되는 기적을 날이 갈수록 막다른 곳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