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들 하느님 나라를 천국 혹은 인간이 죽은 다음에 올라가는 낙원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오해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를 비롯하여 근대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종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선전하여 어려운 민중들을 현혹시켰으며, 피안의 세계를 갈망하여 현세의 어려움을 잊도록 한다고 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결코 말세에 나타날 결과로서의 낙원이 아니고 이 지상 생활의 한 가운데 세워져야 할 하느님의 지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고통을 받고있는 사람들에게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는 말로 위로하여 이 세상의 고통을 참게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구원은 결코 육체에서 떨어진, 소위 영혼만의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믿는 구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시작기도로 읽은 산상설교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다만 하느님께 의지하는 자’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재능이나 건강, 인간관계 등이 마지막까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자기의 행복을 오로지 하느님께만 바라는 사람입니다. 눈을 볼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란 맹인이나 예수와 만남으로써 다시 일어설 힘을 받고자 했던 저 중풍병자와 같이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지위나 명예나 자신의 안주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악착같이 발버둥을 치지만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가치관을 뒤엎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속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데서 하느님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박해를 받거나 손해를 보거나 비애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 그러한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충실로 말미암아 때로는 자기가 안주하던 땅에서 쫗겨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참고 결코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가 왈성될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이다. 권력자에게 아첨을 하거나 뇌물을 주거나, 사교 수완이나 능숙한 흥정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올바른 심판이 행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만족한 행복과 진정한 기쁨을 발견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고 동시에 하느님의 나라는 과연 어떠한 것이지, 그리고 그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을 참으로 하느님으로서, 인생의 기준, 사회의 가치 기준으로서 받들어 모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세계에 정의와 평화의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죽은 다음에 올라가는 소위 ‘천국’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되고 준비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지상생활은 한계가 있고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완전한 실현)을 바랄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맑스주의가 이상으로 삼은 유토피아는 결코 이 지상에서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지상생활을 경시해도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지상생활은 어차피 지나가기 때문에 잠시 기다리면 된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인내하며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말세에는 좋은 세계가 찾아 온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서 힘차게 시작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에는 아직 보이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성장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를 알게 된다면, 설령 다른 사람의 결점을 싫어해도, 또한 심한 처우를 받았다해도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판단하는 것은 하느님이시지 자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로 우리가 그만큼 많은 용서를 받은 사람이므로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우선 첫째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완전한 것을 불완전한 그대로, 추한 것을 추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로, 추한 존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이처럼 보잘것없고 가치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느님께는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이것이 당신 역사의 실패가 아닙니까? 이렇게 훌륭한 하늘과 바다를 만드셨는데 이 인간만은 정말 실패작이 아닙니까? 이 사람만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음 속으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는 마치 바다에 던져진 어망에 걸려드는 고기 종류만큼 여러가지 고기가 있는 것이다. 큰 고기도 있고, 작은 고기도 있고, 굵은 고기도 있고, 가는 고기도 있다. 또는 꽃과 풀들이 다양하게 피어있는 넓은 들판과도 같이 여러가지 빛깔과 크기의 화초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역사는 실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으로서우리의 질투나 증오까지도 감싸줍니다. 우리가 이런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면 적어도 사람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고 기도할 때 동시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 저는 당신의 큰 마음과 당신의 온순함을 지니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저를 부디 불쌍히 여기소서. 그 용서하는 힘을 부디 베풀어 주소서.’ 용서한다는 것은 반드시 높은 지위에 서서 여유를 가ㅣ고 자기에게 부채를 진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자기보다 훨신 강한 사람, 자기를 상처 입히고 자기를 위협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 앞에서 자기는 부들부들 떨면서 마지막 한계점에서 참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인도를 믿음으로서 그 삶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사람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용서한다든가 불쌍히 여긴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정말로 연민으 정이 필요한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적어도 내 편에서는 판단할 수 없고 하느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때 아직 냉혹한 어두움의 세력이 완강하게 횡행하는 이 세계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어느 정도 감추어진 존재인지,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람들이 어는만큼 반대 세력으 저항을 받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견제성장, 번영, 능률을 최대의 가치로 삼는 사회, 너무나도 시끄럽고 너무나도 분주하게 우리를 일로 몰아붙여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더욱 더 빼앗아 가는 사회, 자기의 이익과 성공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고 이에 필요없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말살시키려는 사회, 이런 사회속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찾아가는 것, 자기의 이해와 관례없이 참으로 사랑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설령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사람들을 통해서 세계가 변혁되어 간다는 것, 그리고 그와같이 하느님의 사랑의 도구로서 활동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 하십니다.
사랑의 계명
그들중 한 율법 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 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미태오 22,35-40)
예수님의 메시지의 중심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사라의 행위를 해서 그 결과 하느님께로부터 보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차가운 어둠 속에 빠져 있을 때 비참한 우리를 하느님 편에서 찾아 주신다는 것, 가치가 없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버지 하느님께서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집을 떠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이, 자기 편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찾으시고 당신 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에 마음을 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호소입니다. 그것은 세세한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계명에 앞선, 계명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호소하신 이웃사랑이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생겨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계명으로 생각한다면, 속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당신을 사람합니다’ 라고 말하는 부자연스런 관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좋아하려고 애를 써도 좋아지지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름침은 우선 첫째로 우리가 이와같이 죄가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하느님은 이러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이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서 사랑해 주신다는 것. 이와같은 사실에 깊이 눈을 뜰때 우리자신의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 양식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새로운 삶
이제 다시 한번 산상설교로 돌아가 봅시다. 앞에서 본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의 말씀에 이어서 엄한 훈계의 말씀이 따라옵니다. 이로써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느끼게 합니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5,20)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앞에서 본 바와같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매우 엄한 유다교의 계율을 지키고 경건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그들 이상으로 엄한 생활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셨을까요?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그렇게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가람들을 위해 씌어진 것으로서 예수의 가름침을 새로운 법(계명)으로서 묘사하고 있는데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의 의미는 성서의 전체적인 견지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수의 가름침은 소위 ‘법’으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조금만 더 읽어 보겠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 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마태오 5,38-40).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오 5,43-45)
이와같이 마태오 복음서가 구성하는 산상설교는 구약성서를 통해 전해진 모세의 율법을 인용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것은 어려서 부터 배워 친숙해진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새로운 메시지를 알리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한 이러한 삶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의 본질적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과 죄인에 대한 연민과 용서가 지금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불림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때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알리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삶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서의 다른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리파 사람들과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 토론하셨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참여
물론 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하느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은 결코 이지상에서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살펴 볼 때 밝혀지겠지만 우리의 지상 생활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변용되어야 합니다. 최종적인 열쇄를 쥐고 있는 것은 결코 이 지상의 생애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통해 변용되기 위해서 그 소재를 준비하는 자리는 우리의 이 지상 생활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셰계와 손을 끊고 사후의 세계만을 기다리면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믿는 구원이 다만 내세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이미 이 지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현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이비 종교가 달콤한 말로 약속하는 행복은 아니지만 진정한 행복을 향해서 확실히 나아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땅이 아직 황폐하고 가시나무로 덮혀 있을 지라도 확실히 결실을 가져오는 과일 나무의 묘목을 기르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멋진 삶에 눈을 뜬 사람은 이 세계상이 약속하는 모든 것을 포기할지라도 이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소중하고 멋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어떤 장시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태오 13,44-46)
생활과 하느님 나라
때때로 열심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신앙이 마치 한사람의 마음의 문제로 정치나 사회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도처의 공산 정권이나 군부의 독재 정권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당하게 탄압을 받고 종교, 사상, 언론, 교육의 자유를 박탈 당하고 있습니까? 또 세계 도처에서 얼굴색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차별을 받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개발 도상국의 국민들이 선진국의 이윤추구에 의해 희생자가 되어 땀흘려 일을 해도 생활 향상의 가망성이 없는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까? 또 우리들의 주변에서도 물질주의가 정신을 황폐시켜 가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고, 폭력이나 범죄로 치닫고 있습니까? 서로 서로 경쟁하고 자신의 지위와 명예와 부를 축적하려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리한 입장에 서서 괴로운 좌절을 맛보도 있는지를 생각할 때 이러한 사회문제에 눈을 감고, 다만 자기만이 깨끗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며 머지 않아 천국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면 되겠습니까?
확실히 세계사를 넓은 안목으로 바라볼 때 가난한 생활을 하는 민중이 종교로부터 위로를 받거나 이것을 참아 견딜 힘을 받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전혀 노력하지 않는 일이 흔하게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말세의 행복에만 희망을 두고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꾹 참음으로써, 현세의 부정과 싸워 변혁하고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을 권력자 측에서는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 체제 유지의 이데올로기로 보기 좋게 이용한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음이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가져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사람의 마음 자세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 질서의 실제적인 변혁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는 당시의 정치나 종교 권력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탄압하는 사회 질서나 재물과 지위를 최대의 가치로 받드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의 메시지를 더욱 더 소원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으로 사회으 변혁과 같은 그런 엄청난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직장이나 학교, 가정 그 어느 곳이든 사회 속에서 살면서 사회로부터 생활의 양식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고 난 다음에 사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회 속에서 사회 공기를 마시고 살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약이나 약 모두를 이 사회와 함께 마시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때때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미력한 존재인지를 통감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시험지옥 같은 입시 제도를 반대하면서도 자기 자식만은 될수 있으면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톱니바퀴 속에 휘말려 들어가고 맙니다. 아무리 소비사회의 낭비를 반대한다 하더라도 상점에서 상품 하나를 사는 일 자체가 그만큼 그러한 사회 구조에 가담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지경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큰 바다에 떠 다니는 해초와도 같이 사회의 가치관에 휩쓸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는 감히 이 해초가 큰 바다에 도전하는 것과도 같은 메시지 입니다. 그것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는 하느님게 대한 신앙,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더우기 그것은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역사를 실현시키기 위해 당신 혼자서 그것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와 같은(보잘것없는)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기를 바라면서 우리에게 호소하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하느님 자신이지만 우리의 협력 없이는 그것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은 보잘것 없는 이스트 균이 빵 전체를 부풀리듯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행동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최대의 가치로 여기고 살아 갈 때 그것은 사회 전체를 개혁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메시지 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
하느님 나라가 지금 벌써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몇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다른 대목에서 골라보았습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는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마태오 13,31-32).
여러분은 겨자씨를 본 일이 있으십니까? 까만색을 하고 마치 바다의 모래처럼 불면 날아갈 만큼 작은 씨입니다. 그러나 성장하면 흔히 있는 관목처럼 무성해서 새들이 둥지를 틀 만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팔레스티나 지방의 농가의 생활에서 비유를 들어 말씀 하신것 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사람의 눈에는 악의 세력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는 좀 초라하게 감추어져 있어도 힘차게 성장을 시작하면 머지 않아서는 모든 사람을 포섭할 만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신 겁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늘 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마태오 13,33).
이것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란 농가의 일상생활에서 취한 비유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어려서 모친(어머니 마리아)이 빵가루로 반죽하는 것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저빵을 먹을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걸고 바라보는데 그냥 빵을 만들지 않고 이스트 균을 떨어트려 빵을 부풀게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 께서는 불가사의하게 생각 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세력 중에서 지금은 약하게 볼일는지 모르지만 세계 전체에 작용하여 변혁할 힘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전력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그 사람들을 통해서 세계 전체가 변혁된다는 것을 맘씀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