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생활 양식
“예수께서는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면 이제부터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이지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삶이 종말론적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과연 종말론적인 삶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우리들이 이미 살펴보았듯이 종말론적인 삶이란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 앞에서는 상대적이라는 단서를 붙이고서 사는 방식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하느님 앞에서 사는 삶이란 매 순간, 매 행위를 마지막처럼 진지하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만약 의사가 나에게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언하였다면 나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며, 그때까지 어떤 식으로 살겠습니까?
이러할 때 주님의 태도는 우리 삶의 척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해방절 축제 전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
너가야 할 당신의 시간이 온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해 오신 그분은 이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한 13,1참조).
당신의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그 처절한 불안 속에서도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80년대 한창 읽히던 일본판 해설서들에 의하면, 노스트라다무스라는 꿈쟁이는 1999년 8월 15일을 지구가 멸망하는 날로 점쳤다고 합니다. 그 무렵이면 태양을 도는 행성들이 일직선으로 늘어선다면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습니다. 또 유럽에는 ‘성 말라키의 예언’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12세기의 아일랜드 성인의 이름을 딴 것인데, 여하튼 15세기부터 흘러다닌 정체모를 예언집입니다. 당시의 교황 첼레스티노 2세(1143, 제 165대)부터 시작하여 그 뒤에 나타날 교황 111명의 이름을 상징적 명칭으로 예언한 것인데 가교황 열 명까지 집어 넣는다면 지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264대)는 110번째가 됩니다. 그 예언대로 한다면 앞으로 교황이 한 분 밖에 안남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음으로 한국에서도 한 때 ‘휴거’사건으로 사회와 교회가 혼란스러웠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1992년 10월 28일 낮 12시 아니면 밤 12시에 휴거(들어올려짐)가 있을것이라 외치던 사람들입니다. 이상 소개해 드린 사람들을 우리는 일명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본다면 백일 잔치, 돌잔치, 환갑, 한국교회창립 200주년, 본당사 25주년, 안중근 의사 서거 75주년 같은 행사로 미루어 시간에 금을 긋는 것은 반드시 정신적인 미숙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강생하신지 2000년이 임박해 오는 이 무렵에 역사의 지평에 무슨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긴장도 있을법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받아들이는 진지한 신앙보다는, 날짜 받고 시간 재는 얄팍한 수법으로 천당에 끼어들어 가려는 호기심은 오늘날 뿐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제자들의 입에서도 은근한 질문이 나왔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신비 앞에 우리가 취할 경건한 자세가 무엇인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 그 일이 언제 일어납니까? “그 날과 시간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아버지 한 분 외에는 하늘의 천사들이나 아들조차 모릅니다”(마태 24, 36). 그러므로 무슨 성서 어느 구절을 끌어대든지 그 날과 시간을 안다는 자들은 거짓말장이인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영광 속에 오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성서 귀절(마태 10,33)은 임박하다고 하고, 또 어떤 귀절(2데살로니까 2,1-6)은 재림이 가깝다고 결론하지 말라고 합니다. 재림이 임박하다고 하는 귀절은 1세기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파괴에 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많은 학자들은 복음사가들이 예루살렘의 파괴가 곧 주님의 최후 심판날의 상징이고 표징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멸망과 복음사가의 생각이 혼합된 듯하다고 합니다. 여기에 재림을 보고자 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의 희망과 소망이 한 몫을 더한 것 같습니다.
* 어디서 일어납니까? “하느님 나라는 지켜보는 가운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보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보시오, 사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루까 17, 20-21). 이렇듯 재림의 장소에 관해서는 적어도 특정 교파의 교회빌딩은 아닌 것입니다.
* 도대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 3, 16). 그러므로 수백 억이 살고 갈 지구에서 하느님이 겨우 14만 4천 명을 구원하신다면 참으로 형편없는 구속사업일 것입니다.
* 이 세상은 장차 어찌됩니까?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이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 10) 하시던 하느님은 이 세상의 마지막에는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묵시 21, 5)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최대 문제라 할 수 있는 핵전쟁이나 공해, 그것에 의한 멸망은 인간이 막을 수 있고 또 막아야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사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보기를 열망하고 희망하면서도 많은 곳에 교회를 설립하며 장래를 위해 활약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원에 비하면 시간은 짧고, 주님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다”(2베드로 3,8)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재림의 실제 시각은 하느님께서만 알고 계시나 그 시간은 “도둑처럼”(2베드로 3,10) 생각지 않은 때에 올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흔히 성서의 묵시문학이라 분류되는 여러 곳에서 표현되는데,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신앙과 불신앙, 그리고 선과 악이 모호하게 혼합되어 있는 현재의 역사는 끝날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내용은 하느님이 승리하고 악은 결정적으로 극복되며, 하느님의 구속행위 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이의 구세주며 주님으로서 사방에 밝혀질 것이라는 신앙도 함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은 역사의 종말을 묘사하기 위하여 성서에 사용된 상징적 표현을 순진하게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의적 해석은 계시의 곡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시한부 종말론이라든가, 또는 성서(2베드로 3,10)를 잘못 해석하여 재림이 현세를 끝장내는 무자비한 파괴라고 묘사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상의 나라를 천 년 동안 성인들과 함께 통치하실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 등이 모두 성서의 종말에 관한 상징적인 표현들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우(愚)를 범한 경우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사실 다가올 완성에 대한 갈망인 것입니다. 재림은 은총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구속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이미(Alredy)\’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공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요한 12, 31).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현재 우리 안에 이미 있으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은 완성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 중심사건이 마지막 날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에 “세상의 종말”(1고린토 10,11)은 벌써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이 최대한 빛날 것입니다. 그 부활의 힘은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져서 그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 부활의 광채는 “모든 것을 새롭게”(묵시록 21,5) 만들면서 온 우주를 쇄신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우리 현대인들은 세상 종말이라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의 관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즉 세계라고 할 때 우리는 우주의 물체적인 구성을 말하지 않고 인간들에게 역점을 둔 인간세계, 혹은 인간 역사를 생각합니다. 성서는 세상과 인간이 필연적으로 서로에 속하고 있어서 세상 없는 인간도 인간 없는 세상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성서는 인간과 세계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세상 종말과 주님의 재림에 관한 성서 말씀이 단순히 꾸며진 인간학적 이야기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인간론과 우주론, 즉 인간과 우주, 세상을 구분해 보지 않으며 동시에 인간과 세상의 일치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또는 세계는 인간역사의 무대가 되어 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과 함께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재림과 그 재림에서 있을 세계의 완성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역사가 하나의 역사의 정점,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는 그 오메가 점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은 언제나 희망적 신뢰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대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재림에 관한 극단적인 생각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시대를 거쳐 오면서 재림에 관한 심각한 대립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의 예로 ‘마란 아타’<주여 어서 오소서>와 ‘디에스 이레’<의노(義怒)의 날>의 개념이 그것입니다. 초창기 신자들은 <주여 어서 오소서>라는 기원의 외침과 함께 예수의 재림을 희망과 기쁨에 찬 사건으로 풀고 재림을 위대한 완성의 순간으로 그리워하면서 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세의 신자들은 저 순간이, 인간이 비탄과 경악으로 사경에 빠져 공포와 전율로 맞아야 하는 무서운 <의노의 날>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렇게 되면 오직 심판, 각자를 위협하는 단판의 날일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교는 한낱 도덕주의로 위축되고 그 가장 본질적인 생명의 표현인 희망과 기쁨이 생기를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양식으로 당신 백성에게 오시나 초대 교회 신자들은 모든 자비를 완수하고, 슬픔을 끝내고 사람들의 희망을 실현시킬 그리스도의 결정적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이에 그리스도 친히 당신은 주님이요 재판관으로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오 16,27;26,64). 승천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자 그 약속이 갱신되었습니다.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가 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신약성서에서 빛나고, 미사의 사도 신경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을 늘 고백합니다. “그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우리 신경(信經)을 보면 그 말마디로 보아 전적으로 심판개념이 강조되는 듯하는데 사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라는 표현을 우리는 제대로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 내용 안에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정신적인 유산들이 포함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신자들은 심판에 대한 말을 은총에 대한 전갈과 당연한 일치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되겠습니다. 바로 ‘예수’가 심판하리라는 말은 동시에 심판이 의당 은총의 정점이며 하나의 희망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느님이 도리어 인간으로서 우리 형(兄)인 분에게 그 심판을 맡긴 것입니다. 낯모르는 이가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우리가 믿음으로 아는 그분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자는 절대자이며 타자(他者)가 아니라 인간존재를 속으로부터 알고 겪은 우리 가운데 한사람으로서 우리를 대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반드시 심판날에 희망의 여명이 트이게 될 것입니다. 심판은 의노의 날만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재림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일찌기 풍랑을 잠재우고 게네사렛 호수를 건넜을 때와 같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나다”(묵시록 1,17). 그리스도교인은 두려움의 그날에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가 주어진’(마태 28,18) 저 분이 바로 이 땅에서 살던 때에 믿음 안에서 자기의 반려자였던 그분임을 보고 복된 놀라움을 맛 볼 것입니다.
고대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파루시아’(Parusia)라고 합니다. 그 말은 현존이나 도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왕이나 개선하는 점령자의 정식 입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모든 이의 주님이요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재림은 가장 즐겁고 기쁜일이 될 것입니다. 재림시에 예수님은 모든 이의 주님으로 만방에 인정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봉사한 이들이 옳다는 것이 그날에 입증될 것입니다.
현대인의 상황
오늘의 인간은 무엇보다도 인간이고 싶어합니다. 현대인이 원하는 것은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습니다. 되도록 사람다운 세상에서 온전히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인간은 세계를 자로 재듯 주름잡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감히 인간 심리의 심층에까지 파고 내려가더니 이제는 또 감히 머나먼 외계(外界)에까지 뛰어오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神과 초인, 초세적 능력의 靈들이 맡아 다스린다고 여겨졌던 많은 것, 아니 거의 모든 것이 인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세속”이나 “현세”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 그리고 세계는 점차 세속화의 일로에 서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세속화”가 법적, 정치적 의미에서 교회 재산이 개인이나 국가에 넘어가 현세적으로 사용됨을 뜻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비단 교회 재산의 특정 품목만이 아니라 학문, 경제, 정치, 법률, 국가, 문화, 교육, 의료, 사회복지 등 크고 작은 온갖 중요한 인간 생활 영역이 교회, 신학, 종교의 영향권에서 물러나 인간의 직접 책임과 지배 아래 놓이게 됨을 뜻합니다. 결국 인간 자체가 “세속화”하게 된 상황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은 아님이 밝혀짐과 거의 동시에 인간은 자신이 건설한 인간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인간은 인간 왕국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그리스도 신앙에 기초하고 자리잡고 있던 인간의 경험, 인식, 사상들이 인간 이성의 지배 아래 들어왔습니다.
이러한 현대인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사실이지 그리스도교의 존립 문제마저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여러분과 제가 나누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문제는 한낱 어떤 전설이나 설화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문제로 삼고 또 고민하는 바는, 여러분이나 저나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의 이러한 처지를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올바르게, 설화나 전설 혹은 전기(傳記)처럼 느껴질 수 있는 예수님의 생애, 또 우리가 다루려 하는 예수의 재림에 관해 우리들은 어떻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해 보고자 저는 이제부터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사실들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한 작업으로서 근원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하고자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굳이 신앙의 차원에서가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로부터 출발하려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는 먼저 우리가 믿고 있는 바, 그리고 우리가 신앙하거나 혹은 한번쯤 신앙하고 싶어하는 그리스도교가 다른 일반 종교에 비해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즉 예수에 관한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가 한낱 전설이나 설화 혹은 전기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해 철저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나마 일말의 신뢰성이 있어야 앞으로 말씀드릴 예수의 재림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가깝게 다가오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셨던 예수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교의나 지나친 경건 그리고 광신적인 신앙에 의해 조작, 윤색된 꿈속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예수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신화(神話)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체적인 역사상의 한 인간이었습니다. 곧 그분은 나자렛에서 출생한 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구체적인 역사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터무니 없거나 사실과 유리된 조작이 아닙니다. 물론 시대를 살면서 예수안에서 신성이나 인성을 발견하고 예수에게 드높은 존칭들을 바쳐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동시대인도 후대의 교회도 언제나 예수를 참 인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분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 고고학적으로나 성서, 혹은 고대의 자료에 대한 문헌비판적 입장으로나 또한 학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정통성이 인정된 신약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지극히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환경에서 살았던 역사속의 한 특정한 한 인간이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는 실재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원전 5세기 경에 살았던 석가나 공자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석가의 일생은 역사적이라기 보다도 매우 이상적으로 체계화된 형태의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불전(수트라)들에 담긴 석가像이 뚜렷하게 틀에 박힌 모습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다음으로 석가와 동시대를 살았던 중국의 공자는 실재 인물임에는 틀림없다는 정체성에서도 믿을 만한 사료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공자에 관한 사료들은 사후에 “유교”라는 중국의 국가 이념과 결부되어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노자에 관해서도 중국 전통에 따르면 실재 인물로 인정되지만 언제, 어느때의 사람(B.C14부터 B.C 6세기까지 분분함)인지는 사료의 불충분으로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다음으로 예수와 방금 전에 비교한 사람들의 저서와 관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에 관한 복음서(4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이미 예수가 돌아가신 후로부터 약 100년경에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석가의 가르침은 석가 사후 적어도 500년 이상이 지나 본래의 종교가 상당한 진전 과정을 겪고 나서야 전승되었다고 합니다. 노자도 역시 “도덕경”의 저자로 지칭된 것은 고작 기원전 1세기부터의 일입니다. 사실상 도덕경은 여러 세기에 걸친 기록의 수집서로서 마침내 도교의 형성에 결정적 구실을 하게 됩니다. 공자에 관한 전승 가운데 사마천(司馬遷)의 ‘史記(사기)’는 공자가 죽은 지 400년 뒤에 나왔고, ‘論語’는 700년이나 지난 뒤에야 나오게 됩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미 여러분이 느끼셨겠지만, 예수에 관한 자료들이 결코 우리가 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존경을 표하고 있거나 한편으로 믿음의 대상으로까지 생각하는 분들과 비교하여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을 능가하는 역사성, 합리성 및 구체성이 확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한낱 그리스도교 내부의 편협한 주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예수의 역사는 때와 장소가 뚜렷합니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옛 로마인들의 문헌에서나 신약성서안에서 볼 때, 예수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 치하의 팔래스티나에서 태어났고,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갈릴래아 북부 출신 유대인) 그 후계자 티베리오 황제 때에 대중 앞에 등장했으며, 마침내 이 황제가 임명한 총독 본티오 빌라도에 의하여 처형당한 참 인간이셨습니다. 물론 출신과 때에 관하여 불확실한 점들이 없지 않아 있지만, 공통점들이 발견됩니다. 출생지에 관하여 신약성서의 공통된 입장은 예수는 “나자렛 사람”이라는 점이며, 이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때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지만, 대개는 아우구스토 황제(BC 27-AD 14년)와 헤로데 왕(BC27-4년) 때였으니 늦어도 기원전 4년을 예수의 출생시기로 보는 것은 이미 신학계에서나 고고학계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언제 죽었는가?에 관한 질문도 로마제국의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 이미 사망년은 30년경이었음이 틀림없는 사실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다만 확실한 날짜에 관해선 공관복음사가들과 요한이 서로 다른 견해 (니산달 14일과 15일)를 보이고 있어 알 길이 없을 뿐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전기(傳記)가 아닙니다. 예수에 관한 소설 형식의 책들이 나왔지만 한 가지 엄연한 사실, 즉 예수의 역사가 시대적으로나 장소적으로 그처럼 쉽사리 밝혀지는데도 나자렛 예수의 전기를 쓰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만한 전제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 로마인이나 유대인이 남긴 사료들은 예수의 역사상 실재 사실을 말해 주는 정도 외에는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대 교회가 정경(政經)으로 삼아 활용한 신약성서 네 복음서 역시도 예수의 생애가 밟은 과정을 시기별, 사건별로 단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어린 시절은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 물론 서른살이 될 때까지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어쩌면 겨우 몇 달에 지나지 않거나 길어야 고작 3년간인 예수의 공생활 기간에 관해서마저 무릇 전기를 쓰자면 필수요건인 사실 경과의 확인은 불가능해 지는 것은 여러분도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특징으로서, 복음서는 신앙의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무슨 사건 보도기사 같은 것으로 여기고 읽는 사람은 복음서를 십중팔구 오해하기 쉽습니다. 복음서의 본래 의도는 예수에 관한 역사상 사실의 보도, 사건 경과의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의도는 예수를 예수의 부활에 비추어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하자는 데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본래 福音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전되던 좋은, 기쁜, 반가운 소식을 뜻합니다. 마르꼬가 쓴 첫마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은 이 동일한 신앙의 복음을 이제부터 기록 형식으로 전하겠다는 뜻외에 어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교는 현대 인본주의나 세계종교나 유대교와 확실히 구별된다고 하겠습니다. 즉 ‘언제나’ 그리스도 그분, 역사상 나자렛 예수와 동일한 그분에게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교란 언제나 이론상으로나 실천상으로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것, 즉 활성화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 기억들 가운데서도 근자에 사회적, 종교적 물의를 일으켰던 예수의 재림설에 관해 우리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식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즉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재림에 관한 부분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떻게 되살려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