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교의에 대하여(1)
도입
인간은 누구나 죽음의 상황에 처해 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듯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뿌린 씨에 대한 댓가를 맞게 마련이다.이러한 의식은 생을 마감하는 최종적인 문제인 죽음에 봉착했을 때에는 더욱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함께 죽음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며,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가톨릭에서는 죽음 이후에 하느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있음을 믿을 교리로서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하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근본적인 희망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의 근거와 발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인간 현 존재안에서의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에 대한 선이해 안에서 심판의 문제는 전개될 수 있으리라 본다. 또한 심판의 문제를 다루면서 더불어 살아가며 부대끼는 여러 현상들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 실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전개
1.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 이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이들의 죽음을 보아왔다. 가까운 부모,형제,친구의 죽음을 통해서 슬픔을 가져본 우리들이기에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란 여간 힘든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죽음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웅호걸도 왕후장상도 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서양 묘지에 “오늘은 내게, 내일은 네게”(Hodie mihi,cras tibi)라고 쓰여 있듯이, 또한 “사말의 노래”에서 “미안 백분 화장품 한껏 들여서/예쁜 모양 내려고 애도 쓰더니/그 얼굴에 구더기 들썩거리고/흐늑흐늑 썩음을 알기나 하나?”하고 노래한 이 비참한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온다.
태양을 언제나 똑바로 보고는 살 수 없듯이 항상 죽음을 응시할 수는 없지만, 태양을 등지고살 수 없는 것처럼 죽음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삶을 더 잘 즐기기 위해서 죽음을 외면하는 사람은 삶까지도 외면하게 되며, 죽음을 더 잘 잊으려고 죽음을 외면하는 사람은,죽음과 함께 삶까지도 잊고 만다. 그러므로 삶을 알차게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Pascal이 말했듯이, 죽지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인간은 비참한 동물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또한 인간은 위대하고 사람다운 것이 아닌가? 괴롭지만 우리는 죽음을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육체의 죽음으로 삶은 끝나고 원소로 구성된 인간은 원소로 돌아가고 만다는 유물론자가 있는가 하면,
둘째, 삶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서 어찌 알겠는가 하는 불가지론자가 있고,
셋째, 죽은 후에 혼이 어떠한 모양으로든 존재하리라는 범신론자,윤회론자, 심령주의자도 있고,
넷째,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삶의 관문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적 태도도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 신자는 어떻게 해서 ‘죽음은 인생의 끝이요, 無로 돌아가지 않는 삶의 시작’이라고 보는가?
세상의 아버지치고 자녀들이 죽기를 원하는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시다. 그러므로 당신의 아들 딸들인 우리가 죽어 없어지길 결코 원하시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1고린 15,35)하고 죽음을 쳐 이겼을 뿐 아니라(로마8,2). 우리에게 영생의 빵을 주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루가6,54)고 하신다.
그러나 이 영원한 삶을 이 지상에서 마련하시지 않았다는 점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사실 늙고 병들고 상처받고 썩을 수 있는 이 연약한 육체로는 한 백년은 살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영원한 삶을 위해선 부적당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四奇之恩 사기지은은 상하지 못함과 빛남과 빠름과 사무침이다. “상하지 못함(Impassibilitas)”은 손상됨이 없음을 뜻한다. 즉, 불사 불멸뿐 아니라 다시는 아무런 고통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간선자의 육신은 그 거룩한 영혼에 완전히 종속되어 그 영혼의 무손상성에 참여한다. “빛남(Claritas)”은 의인들의 육신이 광채, 광휘를 발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영혼이 천상 영광 중에 있으므로 그에 결합된 육신도 광휘를 발할 것이다. “빠름(Agilitas)\”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가는 것이 마치 생각처럼 빠를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 수고나 피곤함도 없이 수만리도 순식간에 오고갈 것이다. “사무침(Subtilitas)”은 무엇이든지 꿰뚫을 수 있다는 뜻이다. 광선이 유리창을 통과하듯이 의인의 육신은 자기나 다른 물체를 손상시키지 않고 그 물체를 통과할 것이다.
을 입어, 늙고 병들고 상하지 않고, 빛나는 부활한 육체로서 영생을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삼단계로 나누어 본다. ‘10개월의 어머니 뱃속에서의 삶’,‘이 세상에서의 인생 칠십’,그리고 ‘사후의 영원한 인생’이다. 이 삼단계의 인생에는 연속성도 있고 비연속성도 있게 된다.
예컨데 태아 때 건강해야 이 세상에서도 건강할 수 있듯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건강해야 내세의 삶도 건전하게 마련이다. 뱃속에서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생명이 있듯이, 이 세상의 생명도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실패하는 생명이 있다.
이를 흔히 지옥이라 부른다. 또한 뱃속에 든 어린 생명에게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풍경이나 맛있는 음식을 설명하더라도 알아듣지를 못하듯이, 천상의 사람들에게도 천상의 아름다움을 아무리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알아듣지 못한다. 이해의 장벽이 삼단계의 인생 사이에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하나의 신비이고, 인간 이성으로 완전히 알아들을 수 없으며, 주님의 말씀에 신뢰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의 삶이 괴롭고 힘들 지라도 태아의 삶에 비하면 생물학적으로 더 완전하고 충만한 삶인 것과 같이, 내세의 삶도 이 세상 삶에 비하면 더욱 완전하고 충만한 삶이란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후의 삶, 즉 제 3단계의 삶, 곧 영원한 삶을 ‘새 삶의 시작’ ‘생명에의 초대’‘ 하느님과의 만남’ ‘최종적 성숙’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삶은 우리안에 공존한다. 마치 곡식밭에 잡초가 자라듯이 현실안에 죽음은 내재한다.
내가 죄악과 이기심에 사로잡힐때 내 안에 죽음이 득세하게 되고, 내가 나를 이기고 사랑으로 가득찰 때 나에겐 생명이 충만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을 때에는 죽음의 열매든, 생명의 열매든 맺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죽음은 일종의 추수요 지상생활의 총결산이다. 생명을 심은 자는 생명을 거두고 죽음을 심은 자는 죽음을 거두게 마련이며, 적게 뿌리는 자는 적게 거두고 풍성하게 뿌리는 사람은 풍성하게 거둔다.(2고린9,6참조) “미소한 자에게 베푼 것이 곧 나에게 베푼 것”(마태25,40)이란 주님 말씀대로 이웃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바로 삶을 심는 생활이며, 눈에 보이는 형제에게 베푼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형제에게 베푼 사랑도 중요한 것이다.
Heidegger는 인간을 “죽음에로의 존재”라고 했지만, 그보다 인간은 “죽음을 초월한 존재”라고 함이 더 좋을 것이다. 꽃이 떨어져 씨앗이 되고 번데기가 죽어 나비가 된다면 번데기의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와같이 우리의 죽음도 새로운 삶, 충만한 삶의 관문 일진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이 죽음을 어떻게 준비했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 떨어져 날리는 나무잎새처럼 우리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가야 할 것이다.
2. 죄가 만연한 세상
사실, 죽음의 문제는 우리의 일상 삶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삶에 있어 죽음을 보라는 말도 있는 듯 하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들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난, 부주의로 인한 뜻하지 않은 사고, 살아가면서 저지르게 되는 악행들 – 시기, 질투, 거짓과 교만, 위선, 도둑질과 살인등 -은 언제나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동경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우리들은 억압의 상태, 비구원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감정을 언제나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언제나 악의 상황, 죄의 상황이 상존되어 왔으며, 이러한 것들은 우리들을 괴롭게 하는 것들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악을 원해서 악행을 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악이란 순간적으로 그럴 듯하게 보이기에 가끔 행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이에게 그럴 듯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손해를 끼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의 물건을 슬쩍 가져오면 다른 사람의 법적 소유물을 훔치는 것이된다. 모든 이의 소유인 그 어떤 것을 자기만을 위해 쓰게되면 그것은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이에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게 되면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할 뿐더러 다른 이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되고, 나아가 공동체의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이 되며 또 당사자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신뢰심을 격감시키는 것이 되고 만다.
과연 현대 세계는 많은 불균형 속에서 실의의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죄의 상황인 것이다.
우리들은 가정안에서, 사회에서, 더나가서는 국가라는 큰 집단안에서 살아가면서 이와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가정에서는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여러가지 규율들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의 평안을 깨뜨리는 요소들을 어느 정도의 선에서는 규제할 수 있는 기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 국가로 확대되어 갔을 때에는 엄격한 규율, 곧 법의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그 사람을 감금하거나 구형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의 안녕을 위한 것이리라. 때론 사회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들의 뜻을 기리며, 치하하는 경우를 보게도 된다.
때론 현실적인 모순이 우리의 삶 안에서 재현되어 나타날 때, 즉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찌해서 착한 사람들은 자꾸만 어려움에 처해만 가는데, 악하고 나쁜 자들이 만사에 잘 되어 가는가?”
이러한 모습안에서 우리는 많은 경우에 올바른 정의의 실현을 생각하게 된다. 사회의 질서와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을 보게 되는 데 이러한 것에서 유비적으로 가톨릭의 심판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심판」 교의에 대하여(2)
심화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근본적인 희망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역시 편협한 차원에 머물 것이고, 또한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역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이, 우리 공동체가, 인간 모두가 지녀야 하는 근본적 희망을 깊이 있게 사색하고 묵상함으로써 지금의 삶에 대한 근거와 발판을 다져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심판의 내용은 근본적 희망에 대한 전도를 제시해 줄 것이다.
1. 육신의 죽음과 사심판
성서에 의하면 사람은 3가지의 차원에서 생명을 가지고 있다. 즉 영육의 결합으로 지속되는 현세의 육신과 생명 은총 가운데 있는 영혼 생명과 영광중의 영원한 생명이다. 따라서 생명의 상실을 의미하는 죽음도 세 가지 차원에서 말할 수 있다. 첫째, 영혼과 육신의 분리로서 생기는 육신의 죽음과, 둘째, 은총을 잃음을 뜻하는 영혼의 죽음(에페2,5), 셋째, 영원한 영광을 잃는 영원한 죽음(잠언14,12) 또는 둘째 죽음(묵시20,6)이라 한다. 육신의 죽음을 성서는 분해(dissolutio;필립12,3), 박탈(exspoliatio;2고린5,8), 장막을 걷음(depositio taberuaculi;2베드로1,13-14)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육신의 죽음에 관해서 말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종말론에 관한 모든 논의는 불멸이라는 대 전제를 두고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
명제1 : 모든 인간은 죽음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
이 명제는 인류사의 보편적 경험과 성서의 증언으로 확실한 것이다. 인간은 본래 여러가지 요소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그 요소들의 분해로써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창세기가 증언하는 원조의 불사성은 그 본성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과성은혜)에 의한 것이었는데 인간의 범죄로써 이 특별한 배려를 상실하고 죽게된 것이다.
명제2 : 죽음은 공과의 결말이다.
즉, 죽은 다음에는 공로도 세울 수 없고 죄도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영혼 육신이 분리된 상태에서 정상적인 인간의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음은 보편적 경험이다. 이 보편적 경험은 성서의 뒷 받침으로써 확실한 것이다. 순수 이론상으로는 영혼이 생명의 원리이며 육신을 도구로 하여 작용한지만, 영혼이 불사불멸하다면 육신을 떠난 다음에도 살아 있으니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보아야 되겠으나, 영혼만의 작용이 인간행위라고 볼 수는 없으므로 공과의 대상이 안된다.
결국 인간이 죽음으로써 공로와 죄과의 기회가 끝난다는 것은 하느님 조물주의 섭리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밖에 없으며, 교부들도 대부분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나 고대의 오리게네스, 쁠로띠누스, 현대의 무신론적 진화론자들, 불교의 유화설등이 우리의 주장과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즉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그 혼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제3 : 사람이 죽음과 동시에 사심판을 받고 그 판결은 즉각 시행된다.
“성세성사를 받은 후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은 영혼과 혹 범죄하였을 지라도… 정화된 영혼은 즉시 천당에 받아 들여지고, 대죄중에 혹은 원죄중에 죽은 영혼은 즉시 지옥에 내리지만 죄벌은 다르다.”(제2 리옹 공의회 1274 DS464)
명제4 : 그리스도는 산이와 죽은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공심판의 적합성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하느님의 의로우심이 들어나기 위하여, 둘째, 그리스도의 겸손이 보상되기 위하여, 셋째, 사람들의 선악이 공적으로 평가되기 위해서이다.
심판관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요한5,22;사도10,42)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아들과 죽은 아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다.”(로마14,10 ; 마태16,27)
심판의 대상은 모든 사람과 천사들이며, 그들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와 의무 포기에 대하여 심판받을 것이다.
명제5 : 공심판후에 이 세상은 허무로 돌아가지 않고 갱신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다.”(1고린7,31;로마8,19-22;묵시2,1)
2.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서의 심판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범죄를 하거나 공로를 쌓을 수 없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 보았다. 모든것이 이 죽음을 통하여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심으로써 모든 마음의 생각들이, 각자 있는 그대로가 똑똑히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중에 죽어 더 이상의 정화를 요하지 않는 사람은 죽자마자 천국에 들어가고, 은총 상태에서 죽었으나 약간의 정화를 요하는 이는 그 정화가 끝난 후에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명백히 규정된 가르침이다. 대죄 중에 죽은 사람은 죽자마자 끝없는 벌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도 분명히 규정된 가르침이다.”
심판이란 흔히들 생각하듯이 죽은 자가 죄인으로 서 있고 하느님과 그 천사들이 그죄인에 대하여 판결하는 식의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 심판이란, 하느님의 현존을 대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대함으로써 내가 안고 있는 현세적 삶의 전체적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인 것이다. 이에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2고린5,10) 그러한 사실인 것이다. 결국 심판이란 나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인 것이다.
3. 자유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심판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 취향의 힘에 있어”(집회서15,14) 자유롭고 책임을 지게 만드셨다. 살아서나 죽어서도 하느님은 인간을 강요해서 당신이 부르는 그 길은 걷도록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고 인간의 모든 행동을 아신다(집회서15,18-19). 그리고 이 생명이 끝나면 각 사람은 주님께 보고를 드려야 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즉,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은총과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여부에 따라 이제는 그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대해 자유롭게 수락하거나 배척함으로써 쌓아올린 공적(功績) 전체는 죽음의 순간에 가서야 나타난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야 개인과 하느님, 개인과 창조전체의 관계가 결정된다. 하느님의 심판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가지고 이루어 놓은 것을 확인하고, 그 사람이 들어가기에 적당한 자리를 지적할 뿐이다. 하느님의 심판에 비추어 사람은 자기가 쌓아올리고 완성한 것을 인정하고 수긍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화되고 주님 안에서 죽은 이는 죽은 후에 오는 하느님의 심판을 생전에 하던 모든 인간적 노력의 완성으로써 체험한다.
여기에서 조심할 것이 있다. 이러한 심판의 이미지를 개인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나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구조가, 그 삶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함께’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고 더불어 선택하며 더불어 책임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공동체와 함께 사랑으로 다가오는 심판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장례미사 때마다 봉독하는 최후심판의 복음 말씀에서 분명하게 이러한 문제는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나게 되는 인간의 행실은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타인에게 봉사하였던 빵한조각, 물 한 그릇, 따스한 마음, 이런 것들은 나를 총체적으로 이루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하신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 그 근거가 되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의 지체들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1고린12,12-31참고)
4. 하느님 나라의 완성으로서의 공심판
공심판은 각자가 죽은 후에 받은 사심판의 집합적 요약이 아닐 것이다. 이 최후심판은 선인과 악인 위에 내려지는 판결문의 선포 이상의 것이다. 이 최후심판에서 하느님은 당신 나라의 마지막 단계인 하늘의 공동체를 설립하실 것이다. 이 재판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큰 계명을 지키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심판 때에 각 사람은 우리 중에 있는 그리스도에게 보여준 사랑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심판하실 분은 하느님이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강생하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사람의 최상 심판관이 되실 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심판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구속자로서의 당신 사업을 완성할 것이다. 심판을 통해서 그는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고 한 나라에 모이기를 바라는 당신 성부의 뜻을 이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배척하고, 실존의 중심이며 절정인 사랑에 불응하며, 정의와 자비와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기를 거절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 데서도 그리스도의 선하심이 빛날 것이다. 사랑에 불응하기로 자유로이 작정한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처벌은 공정하여 더욱 그의 성덕이 빛날 것이다. 처벌받는 이들도 생명에로 불림을 받았고, 자유로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자비를 스스로 배척한 자신들임을 깨닫고 곤혹을 느낄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주님이란 것은 심판 때에 드러날 것이다. 성부께 대한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과 모든 선의 근원에로 우리를 끌어 당기려는 그의 의도가 역시 드러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말세에 나타날 결과로서의 낙원이 아니라, 이 지상 생활의 한가운데 세워져야 할 하느님의 지배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시작부터 완성된 형태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의미에서 우리의 노력이 아무리 보잘것 없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협력을 요구하시며 마침내는 이 세상을 모두 포괄하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킬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이 세상에 도래하였지만 ‘아직 아니’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렇듯이 완성의 도정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맛들이고 거기에 동참하는 생활이어야 하겠다.
적용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인식해 보았다.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죽어야 하는 인간임을 인식하면서, 현대에 만연한 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심판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여기에서 적지않게 부정적인 모습들을 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희망의 소식을 접하면서 이웃 사랑의 실천도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홀로 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인생을 고통에 비교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불완전한 모습들이 있음을 간파한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불완전한 모습 속에서도 실의하지 않고 제대로 서서 한 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의지와 함께, 공동체의 사랑어린 눈길이 필요하리라 본다.
심판은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생각하면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분명 우리는 의인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않고 세상이 원하는 데로 내 의향과 행동이 뒤 따라 가는 생활이라면 결국 심판은 힘겨운 것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