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

 

연옥에 대하여



1. 도입



흔히 인간에게 있어서 “최후의 일들(죽음, 심판, 천국, 지옥)”이라고 이야기되는 문제들이 이 시대에 와서는 얼마나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가?

그것은 이제 별 문제 거리조차 못되고 왜곡되고 있으며 세속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인간의 종말에 대한 진지한 믿음이 흐려져서 그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으며 비웃음거리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마귀와 그 족속들에게 마련되어 있는 영원한 지옥 불의 뜨거움”(마태 25,41)이란 단지 극소수의 답답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공포의 영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따라서 은총지위에 있는 상태로 죽은 이의 영혼이 죽음의 순간에 가벼운 죄나 일시적인 벌을 받을 일이 남아 있는 경우 죽은 후에 피안에서 정화되는 과정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 가톨릭 교회에서 명확히 규정하고 있는 진리로 존속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죽은 사람들이 “연옥(Puragatorium)”에서 정화된다는 것은 거의 중시되지 않고 오히려 무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연옥의 의미



연옥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죄를 풀지못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에 의해서 죄를 淨化한다고 하는, 천국과 지옥과의 사이에 있는 상태 또는 장소를 말한다. 대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지만 대죄를 모르고서 지은 자, 또는 소죄를 지은 義人의 영혼은 그 죄를 정화함으로써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이 ‘일시적인 정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 및 체류지가 연옥이다.

「개신교의 늙은 장로 한분이 천주교회로 개종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장로님의 개종 동기를 들었더니 “개신교에서는 천국과 지옥만이 있으며 연옥이란 없다고 가르치는데, 나는 이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갈 만큼은 하느님을 열심히 믿지도 못했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나는 지옥에 떨어질 만큼 하느님을 거역하지도 않았고 대죄를 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과연 천국과 지옥 중 어느 곳으로 가게 될까?라는 문제에 부딪혔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천주교회의 연옥교리에 대해 알고 난 후 천주교회가 참되다고 믿어 개종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늙으신 장로님의 말씀처럼 사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직도 회개하고 닦아내고 정화해야 할 뿌리깊은 이기심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의 은총중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려는 죄의 씨앗이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죄의 씨앗을 정화해야 하는데 이를 알기 쉽게 표현하여 煉獄(단련 받는 감옥)이라고 했다. 즉 연옥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아직 미완성 상태에 있고 사랑 안에서 성숙되지 못한 인간이 정화되는 상태’이다. 따라서 연옥에는 정화에 따른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은 곧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되지 못했다는 고통이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고통이다. 그러나 고통과 아울러 연옥에는 곧 하느님과 일치하리라는 위로가 동시에 있다. 이와같이 죽은 뒤에 인간의 영혼이 정화되어야 한다는 연옥교리는 곧 사람이 무수한 변화를 통해서 거룩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며 아울러 지상 생활에서 겪은 많은 고통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3. 성서상에 나타난 연옥의 존재



내세의 연옥(정화소)에 관한 가톨릭의 진리가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간접적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합당한 것이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성서 귀절들은 바로 이 사실들이 지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만약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가 없다면 이러한 기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에 들어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고 지옥에 떨어진 이들을 의해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1) 구약 성서



“그는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모두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 마카베오 12,45)

마카베오서는 기도와 희생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잠정적인 곳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개신교에서 마카베오서를 성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마카베오서가 지니는 역사성에 대해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카베오서에 나타난 이러한 연옥에 대한 믿음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 보여지고 있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경에 경건한 유다인들 사이에는 내세에서도 속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고 속죄 방법에는 살아있는 이들의 기도와 그들이 바치는 속죄의 희생 제물 등이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었다. 이 마카베오서 하권의 저자는 유다 마카베오의 태도를 찬양하면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갸륵하고 거룩한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들을 죄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평화로운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2) 신약 성서



예수께서 유다인들의 여러 폐습을 꾸짖으셨으나,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그들의 풍습에 대하여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연옥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시고 그 존재를 시사하셨다.

㉮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 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라고 하셨다. 따라서 내세에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죄도 있다. 죄가 사하여지는 그 내세는 지옥이나 천국이 될 수 없다. 지옥에는 죄사함이 영원히 없기 때문이며 천국에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묵시 21,27; 하바 1,31; 이사 25,8) 따라서 그 내세란 연옥일 수 밖에 없다.

㉯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 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분명히 말해둔다.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6)

어디서 풀려나오는가? 이 감옥은 지옥인가? 풀려나올 수 있는 감옥은 지옥이 아니며 지옥은 영원하다고 성서는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연옥일 수 밖에 없다.

㉰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기초 위에다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으로, 어떤 사람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나무로, 어떤 사람은 마른 풀로, 어떤 사람은 짚으로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올 것입니다.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 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즉,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과 같이 심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사함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 “주께서 오네시포로의 집안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고 감옥에 갇힌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로마에 와서는 나를 찾느라고 굉장히 애쓴 끝에 나를 만났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2디모 1,16)

이 사목 서간의 저자는 불쌍한 영혼들의 벗, 사도 바오로의 동료인 故오네시포로의 벗임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에게 큰 도움을 베풀었던 동료 故오네시포로의 이름을 신자들에게 알려주어 그의 사랑에 가득찬 행위와 모범을 말함으로서 이미 죽은 그를 위하여 기도를 바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기도는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초대 그리스도교적 관례가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4.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



(1) 제2차 리용 공의회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짓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세례를 다시 받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참된 통회를 통해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저지른 죄와 게으름과 같은 잘못들에 대한 보속을 완전히 끝내기 전에 참된 참회의 지향을 지닌 은총의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다면 사후에 속죄의 형벌을 치름으로써 그들의 영혼은 정화될 것이다. 이러한 형벌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도움을 통해 경감될 수 있으며 이러한 조력행위의 예로서 미사성제, 기도, 희생, 자선행위 등을 들수 있다.”(DS 856)

(2) 플로렌스 공의회

플로렌스 공의회는 제2차 리용 공의회의 연옥교리를 그대로 반복하여 반포하고 있다.(DS 1304)

(3) 트리덴띤 공의회

“성 교회는 성령의 감도하심과 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전의 공의회에서 확정된 연옥의 존재와 거기 있는 영혼은 신자의 기도와, 특히 미사 성제로써 도움을 받음을 믿으며 이를 굳게 지킨다….은총으로 말미암아 의화된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금세나 후세 연옥에서 잠벌이 안 남을 정도로 죄가 사해진다고 말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산 이와 죽은 이, 죄와 보상, 보속과 그 밖의 필요로 미사 성제를 거행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DS 1580, 1820, 1867)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주께서 당신 위엄을 갖추시고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오시어(마태 15,31), 죽음을 소멸하시고 만물을 당신께 굴복시키실 때까지는 (1고린 15,26-27) 주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세상 여정에 남아있고 어떤 이는 죽어 단련을 받고 어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실제로 뵈오며 영과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여정을 계속하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평화안에 자고 있는 형제들과의 일치는 분열될 수 없고 서로가 초자연적 善을 교환하고 있다는 것이 가톨리 교회의 불변의 신앙이다. 이 지상 여정을 계속하는 인간은 결코 혼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초자연적 공동체의 일원이다. 이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이고 그 구성원은 상호간의 사랑으로 결합되고 상호간의 책임을 지고 있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을 갖고 연대성을 지니고 있다. 지상 여정을 계속하는 주의 제자들인 지상의 신자와 이미 세상을 떠나 정화를 받고 있는 제자들인 연옥의 영혼들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자신을 그대로 바라보면서 영광을 누리고 있는 제자들인 천국의 성인은 다 동일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속해있다.“ (교의헌장 50항, 51항.참조)

이 문장으로써 교회가 이제까지 가르쳐 온 진리 즉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하나의 교회에 모인 하느님 백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어 있고 초자연적 선을 교환하고 있는 것, 이른바 ‘모든 성인의 통공’을 표명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가톨릭의 연옥론은 하느님의 聖性, 정의, 예지,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5. 연옥벌의 본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톨릭은 성서와 성전 안에서 연옥의 존재를 진리로 믿고 그것을 公表하고 있다. 이제 연옥에 들어간 영혼이 어떻게 죄의 사함을 받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 세상에서의 경우 살아 있는 이들은 은총의 도움에 의해서 행하여진 애덕에 따른 통회와 기도에 의해서 소죄가 정화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연옥에 있어도 지상 교우들의 기도와 애덕, 희생 등으로 소죄가 정화된다. 즉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착한 일을 하거나 공덕을 쌓는 상태가 아니라 단지 하느님의 정의에 의해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 정화와 속죄가 되는 상태이다. 내세에서는 공덕을 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옥의 영혼은 하느님이 내리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정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죄에 대한 슬퍼함이 벌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연옥의 영혼은 연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 고통은 실고와 각고이다.



1) 실고(失苦) – 상실의 벌(poena damni)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과 같이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께로 가도록 마련되어 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주위에 있는 헛된 사물에 정신이 분산되고 육신의 감각에 도취되어 이것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이 세상과 육신을 떠난 영혼은 속속들이 이것을 느끼게 된다. 강력하게 하느님께로 쏠려 지극한 引力을 느끼지만 하느님을 뵈올 수는 없다.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면서도 그 분을 만나지 못하는 연옥 영혼들의 고통을 혹심한 것이다. 동시에 제 탓으로 그렇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쓰라린 뉘우침이 있고 두 번 다시 없는 값진 일생을 허송하였음을 생각할 때 무서운 회한을 느끼게 된다.

하느님을 만나 뵙는 축복으로부터 잠정적으로나마 격리되는 “상실의 벌”은 매우 엄격하고 고통스러운 것임이 확실하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무엇에 대한 열망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기다리는 일은 점점 더 힘겨운 일이 된다. 연옥 영혼들은 측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광과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의심할 바 없이 명확하게 깨닫게 됨으로써 어떤 것이 의해서도 바뀔 수 없는 열렬한 애모의 정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모습을 향한 영혼들의 갈망은 그토록 강렬할 수 밖에 없으나, 이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은 또한 그 만큼 더 큰 것이다.

2) 연옥 영혼들은 하느님 나라의 복된 모습을 볼 시기가 자신들에게도 이미 도래 했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아직 씻겨지지 않고 남아있는 죄가들과 초자연적 은총을 흘려버린 잘못들의 장애 때문에 그것을 속죄해야 비로소 영혼이 성숙과 완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영혼들의 갈망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고통도 가중시킨다.

3) 그러나 이 상실의 벌은 단지 잠정적인 것이고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겪는 것이기 때문에 연옥 영혼들은 인내와 순종과 관용으로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정당한 법에 대해 온전히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이 연옥의 벌은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그리고 긍정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벌이기 때문에 연옥 영혼들의 고통은 가장 소중한 속죄의 고통의 과정으로 여겨진다.



2) 각고(覺苦)



연옥에도 실질적인 불이 있다. 이 뜨거운 불에서 단련을 받는다. 지상의 가장 혹독한 고통보다 이 연옥의 가장 작은 벌의 고통이 더하다. 연옥의 불은 아마도 하느님을 상징한다는 의미에서 단지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불과 같은 방법으로 영혼을 씻고 정화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연옥 영혼들은 혹심한 형벌도 잘 참아 받고 조금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공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하느님을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그분이 누구신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아무런 유혹도 없으므로 죄를 짓지 못한다. 지옥에 가지 않게 된 것에 큰 안도를 느끼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동시에 언젠가는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이 있어 희망을 느끼고 있다.



3) 연옥의 기간



이와같이 연옥에서 가지는 희망에도 불구하고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고 각자의 죄에 상응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의 신자의 기도와 善業과 신자의 전구에 의해서 단축 또는 경감된다. 그러므로 연옥의 영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공심판 뒤에 연옥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만 하나 하나의 영혼에게 있어서는 그 벌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 연옥에서 고통을 받는 기간에 대해서는 베네딕도 12세의 언명(DS 1000)과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DS 1304)에서 추론해 본다면 개개인의 영혼들이 죽은 후에 곧 연옥 고통을 받기 시작하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리고 연옥의 고통은 모든 죄의 책임과 죄의 벌로부터 그 영혼이 완전히 자유로와질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연옥 고통의 기간과 강도는 아직 남아 있는 죄과와 그에 대한 형벌의 총량에 비례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영혼이 거치는 피안의 정화기간에 대한 더 이상 구체적인 사실을 밝혀 줄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과 더불어 지상에서 경험하는 시간을 중단하지만 영혼은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초월하여 연옥이라는 피안의 중간적 상황에서 살아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옥에서의 속죄의 거룩한 정화가 끝난 영혼은 곧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4) 연옥에서의 기쁨



연옥의 영혼들은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과 더 이상 죄를 범하거나 원죄와 타락한 본성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것, 그리고 오직 구원의 완성만이 기다린다는 것과 벌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가 하느님의 분노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공의하심에 의한 허락된 고통이라는 것, 더욱이 자신들의 영혼이 온전히 순수해지고 원숙해져서 하느님께 대한 지복 직관에 이르기 위해 그 준비의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연옥의 영혼들은 또한 영혼의 완전한 정화와 성숙 이후에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 들어갈 문이 열리리라는 확고한 희망을 내면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이 연옥에서 지내는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에 고통없는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연옥 영혼은 더 이상 하느님과 떨어져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기쁨에 차 있게 된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사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라고 한 말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옥 정화의 본질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죽은 이들이 하느님에 대한 지복 직관으로부터 잠정적으로 격리되지만 괴로운 내적 고통과 결합된 그들은 분명히 커다란 기쁨을 대신 받게 된다고 할 수 있다.



6. 모든 성인의 통공



가톨릭 교회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초대교회 때부터 믿을 교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 모든 성인의 통공은 지상 교회와 연옥(단련 교회), 그리고 천국에 있는 교회, 즉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고 자신들의 각각의 공로를 서로 주거나 받을 수 있다는 교의이다.

즉,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세상과 연옥과 천국에 있는 모든 敎友들이 가장 신비하게 서로 결합하고 또한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 공을 통하는 것으로, 이는 마치 살아있는 몸의 각 지체가 머리와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과 같다.

성인(聖人)이란 교우로서 상존 은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영세한 사람으로서 대죄의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이 세상에 있는 신자들은 비록 소죄가 있을지라도 교회의 교우이며 은총을 누리고 있고 거룩한 도리를 믿고 따르므로 성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당신의 교우들을 “거룩한 민족”(1베드 2,9)이라 하였고,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마 8,28)이므로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며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라고 하였다.

세상에 있는 교우는 죽을 때까지 삼구(三仇), 즉 마귀와 세속과 육신에 대적하여 싸워야 한다. 그래서 이 세상 신자들의 집단을 ‘신전지회(神戰之會 – Ecclesia militans)’라 한다. 즉, 전투하는 교회라는 말이다.

연옥에 있는 교우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소죄만 있거나 보속할 잠벌(지옥 영벌에 대칭하여 한도가 있는 벌이라는 뜻)이 남아 있는 영혼은 연옥에 들어가 천당에 갈 때까지 鍛鍊을 받는다. 연옥에 있는 이 영혼들의 모임, 즉 집단을 ‘단련지회(鍛鍊之會 – Ecclesia patiens)’라 한다. 즉 단련 받는 교회라는 뜻이다.

이 교회의 구성원인 세상에서 보속을 다 못하고 떠난 영혼들은 보속이 끝날 때까지 단련을 받는다. 이들은 자신이 공을 세울 만한 자유기간을 이미 다 넘겼기 때문에 자기의 단련 기간을 덜거나 단축시키기 위한 무슨 선공이나 기도를 할 수 없고 끝까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감수해야 한다. 이들은 우리와 아무 인연이 없는 이들이 아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이며 우리와 함께 신전지회의 회우들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1고린 12,26)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게 되고 그들의 형벌이 경감되거나 단축되게 하기 위하여 기도한다.

이 두 교회와 달리 천국에 있는 교우는 죽을 때 아무 죄도 없고 보속하여야 할 잠벌도 없는 영혼들로서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고 연옥에서 단련을 다 받아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교우들을 말한다. 이런 영혼들의 집단을 ‘개선지회(凱旋之會 – Ecclesia triumphans)’라 한다. 삼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교회라는 뜻이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있는 교회만을 의미하지 않고 천상과 연옥과 이 세상의 교회에 대한 믿을 교리를 선포하고 있다. 거룩한 교회의 교우가 세상에 살다가 죽어 연옥을 지나 천당에 들어간 것을 생각해 보면, 세상에 있던 영혼이 연옥에 갔고 그 영혼이 다시 천당으로 올라갔다. 즉 언제나 동일한 바로 그 영혼이지 다른 영혼이 아니다. 이처럼 신전지회와 단련지회와 개선지회는 본질적으로 다른 회가 아니라 동일한 회이다. 단지 그 회의 상태가 다를 뿐이며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합치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하게 서로 결합하고 또한 그리스도와 결합한 거룩한 교회는 때가 차게 되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mystiicum Christi)가 되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7. 연옥 영혼의 구원을 위한 방법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리용, 플로렌스, 트리덴틴 공의회는 연옥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있음과 동시에 지상에 있는 신자들이 내세의 정화를 겪고 있는 영혼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거나 정화기간을 단축시켜 주기 위해 여러 가지의 조력 행위로서의 대원(代願)을 통해 그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교의를 인증하였다. 그러한 결정을 하게된 이면에는 그리스도의 성체 안에 모든 지체들이 하나로 결합된다는 계시된 진리가 바탕으로 깔려 있으며, 사도 신경 안의 ‘성인들의 통공’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 모든 성인들의 통공의 진리를 기초로 해서 연옥 영혼들을 위한 방법들을 살펴본다.





1) 功勞와 通功



인간에게 있어서 功이란 무엇을 받는다는 권리이지만, 하느님에 대하여 인간이 무엇을 받는다는 권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한 후 그 조건을 채우게 되면 그 값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의 채무자로 자처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감히 ‘명하신 바를 행하였으니 이제 허락하신 것을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도록 하셨다”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권리 주장의 ‘정당성’을 제시하여 주었다.

그 공은 하늘나라의 영복을 누리게 하는 영복지공(永福之功), 육신과 영혼에 필요한 은혜를 얻게하는 구득지공(求得之功), 죄를 사하여 주심을 얻는 하휼지공(下恤之功), 죄로 인하여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면하게 하는 보속지공(補贖之功)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공로는 이상 말한 네 가지 효력으로 사람들에게 통공된다. 그러나 사람이 세운 공로, 즉 영복지공과 하휼지공은 그 당사자에게만 유효하고 다른 이에게 통공되지 못하지만, 신전지회와 단련지회와 개선지회의 모든 교우들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살아 있으면서 거룩한 교회, 즉 그리스도의 은혜를 같이 받고 그분의 피흘림의 공로를 기간으로 하여 구득지공과 보속지공은 서로 통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성모 마리아와 여러 성인 성녀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수많은 극기와 고행으로 많은 보속지공을 세웠지만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죄가 없었으므로 그 공이 우리에게 적용되어 우리가 보속할 것을 덜어 줄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성인의 통공에 기초하여 가톨릭 교회는 연옥의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하여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고 있다.



2) 통공(通功)



이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1고린 12,26)…여러분들도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6,2)”라는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규범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순례중인 지상 교회의 지체들에게도 해당된다. 함께 서로를 위해 주는 연대적인 공동체 의식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고 나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복락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내세의 정화를 겪고 있는 영혼들을 돕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의무라고 말한다고 해서 연옥 영혼들의 정화기간이 얼마 동안 계속될 것인가, 혹은 심판에 대해 산 이들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구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로 정화 기간을 단축시켜 주시고 종결시키시어 그들이 하루 속히 하늘 나라에 갈 수 있게 해주시도록 자비를 구하는 것 뿐이다.



3) 통공의 방법



통공의 방법들은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모든 조력행위로서 하느님의 뜻을 움직일 수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대신 바쳐드리는 속죄와 대신 바치는 기도의 가치들을 당신의 자비로우신 척도에 따라 처리하신다는 것과 죽은 이들과 우리 지상의 나그네들은 그 후에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들이다.

우리는 종국적으로 다만 조력 방법으로서의 代願양식(미사, 기도, 희생 등)을 통해 죽은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동의해 주실 것이라는 신뢰와 기대 속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바치는 여러 종류의 기도를 통해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봉행되는 교회 공동체의 미사 성제와 성사, 기도 등 여러가지 자기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구원의 방법들을 세상을 떠날 때 빼앗겨 버린다. 그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효과적인 조치나 소망의 성취를 위해 어떠한 직접적인 요구도 더 이상 할 수 없다.

이에 대한 해결은 우리의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므로 그 사랑은 연옥 영혼들에 대한 주님의 크신 자비를 믿기 때문에 그 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들의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시도록 주께 그에 보충이 될 만한 희생을 봉헌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은총지위, 즉 영세한 자로서 대죄가 없는 상태에서 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은총 지위에 있지 않다면 이런 것들이 하느님 대전에 공로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연옥 영혼을 위한 방법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연옥 영혼을 위하여 제일 유효한 것은 미사를 드리는 것이다.

2) 대사를 자주 얻어 그들에게 사양할 것이다.

3) 기도와 고행과 자선이며 날마다 당하는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그들을 위하여 참아받는 것이다.



8. 위령성월



교회는 11월을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달로 정하였다. 또한 교회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여 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들의 영혼을 위하여 특별히 기도한다.

이는 998년에 ‘일년에 한 번씩’ 위령의 날을 지키도록 명령한 개혁 클뤼니 수도원의 영향으로 보편화 되었다. 이 수도원의 성 오딜로 원장은 1028년 – 1030년 사이에 그의 전체 수도원들에 대해서,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날에 모든 죽은 신자들을 위해 미사와 죽은 이들을 위한 성무일도, 자선을 통해 공통적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 위령의 날은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나 위령 예식의 행사에만 가치를 두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자선의 의미인 희사와 가난한 이 12명에게 베푸는 식사에 가치를 두었었고, 결국 이 모든 것은 연옥 영혼들을 돕는 것이 되도록 규정된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클뤼니 수도원에서부터 전체 교회로 위령의 날의 제정이 보편화 되었다.

이 달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기도와 희생을 바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연옥에서 단련받은 죽은 이들과 천국의 성인들과 함께 기도와 희생과 선행으로 서로 도움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우리는 이러한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위령의 날과 모든 성인 대축일을 11월 1일과 2일에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위령성월을 맞이하여 영원한 새 삶을 희망하고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고 반성하며 살아가야 한다.



예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지옥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이 글은 카테고리: TN-lectiodominus-C38, 복음 나눔(주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