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천국에 대하여



도입 :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하여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죽음에로의 존재”(sein zum tode)라고 규정한다. 즉, 죽음은 막연한 어떤 미래가 아니고 삶의 요소요 현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관념은 누구나 같고 표현 또한 일치한다.

Death spares neither pope no begger. 죽음은 교황이나 거지나 다 헤어날 수 없다.

He that is once born,one must die. 태어난 사람은 죽어야만 한다.

Death keeps no calendar. 죽음은 예고없이 지켜진다.

야스퍼는 모든 삶은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여있고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 뿐이라고 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물론자들의 주장으로서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다른 동물과 같이 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죽음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분해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불가지론자들로서 하나가 죽어봐야 안다는 태도이다. 무슨 일이든지 실험에 의한 증거를 통해서 만이 알수 있다는 실증론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째는 사람은 죽어도 혼이 존재한다는 태도를 보이는 이들로서 윤회론자나 조상신을 숭배하는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네째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희망론자들로서 크리스챤이 이 입장을 표명한다.

죽음은 “無의 합일”(Der Schrein des Nichts)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죽음과 대면하여 세계내에 있는 모든 것과의 관련을 끊게 된다. 그런데 이 죽음 속에서 드러나는 무는 공허하고 허무한 무가 아니고 그 속에 존재 자체의 신비를 감추고 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 존재자체과 대면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죽음은 “존재의 은신처”(Das Gebrig des Seine)이다.

그러기에 죽음은

New mode of existence. 존재의 새로운 양상

Meeting between man and God.하느님과 인간이 대면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새로운 삶은 세가지 양상을 띤다. 즉 천국,지옥,연옥의 삶이다. 인간은 죽음 후에 하느님 앞에 가서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 재판을 받는다. 이를 사심판이라 한다. 여기서 성세성사를 받은 후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은 영혼과 정화된 영혼은 즉시 천당에 들어가고 대죄 중에 혹은 원죄 중에 죽은 영혼은 즉시 지옥에 들어가서 벌을 받게 되는데 그 죄벌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지옥은 대죄 상태에서 죽은 인간이 영원히 하느님과 결별되어 벌을 받는 곳이다. 그리고 대죄중에 죽지는 않았지만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영혼의 정화가 필요한 이들이 가는 곳이 연옥이다. 이들은 여기서 자신이 세상에서 다 하지 못한 죄값(이를 보속이라 한다)을 치루게 된다. 그들은 여기서 단련을 통하여 영혼의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천국을 지향한다. 천국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을 바로 앞에서 뵈오며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은 크리챤들에게 있어서

Intitation into life of God. 하느님 삶으로의 초대

Ultimate self-astualization of man. 인간 자아실현의 최고봉

이라고 한다.

그래서 크리스챤들은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 가실 것을 믿습니다”(1데살 4,14)라고 희망한다.



1. 사후세계



이 부분에서는 인간의 종교심성안에 있는 사후세계관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렇게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목적은 비교종교학적으로 우라나라의 타종교의 사후세계관을 살펴봄으로써 천국의 사상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인간의 보편적인 인식임을 알리고자하는데 있다. 물론 이것은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방법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타종교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맞는 것만을 소개할 수 있고 그리고 우리의 것만을 고집하는 아집을 버린다는 생각에서 출발은 하지만 자칫하면 우리의 기본까지 흔들리게 해서는 안되겠기 때문이다.



1) 무속의 저승 한국종교학회, 죽음이란 무엇인가?, (서울: 도서출판 窓, 1990), pp.47-78 참조.





무속에서의 사후세계에 관한 연구는 제주도의 큰굿속에 있는 <시왕맞이제>를 참고할 수 있다. 제주도의 굿을 살펴보는 이유는 섬지방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문화가 아직도 원형그대로 잔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굿판 안에서는 천지창조(생)신화,인간탄생 및 죽음에 관련된 신화,농경기원신화 등 창세의 원리와 의식의 원리들이 많이 담겨 있다. 시왕맞이제는 무속집단이 인간이 사후(死後)에 저승까지 편안히 가고 그곳에서 다시 새롭게 잘 살 수 있기를 기원하고자 행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죽음 및 사후세계인 저승의 모습이 비교적 자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시왕맞이제에는 <방광침>,<헤심곡>등의 의식이 있다. 여기서 방광침은 죽은 인간을 위해, 그가 저승에서 다시 ‘새나게’ 해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이어서 <헤심곡>이 행해진다. 사자(死者)는 저승차사의 인도로 저승의 지옥에 도착하여 이승 삶에 대한 심판과 형벌을 받는다. 심판은 전세계적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겨가기 위한 보편적인 모티브인것 같다. 무속에서의 심판은 14번의 관문을 거치면서 4명의 심판관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조목조목 벌을 받는데 형벌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욱체적 형벌이다. 예를 들어 5번째 심판관인 염라대왕은 어른말에 겉대답을 했는지를 보는데 그러한 사실이 있으면 집게로 혀를 빼는 벌을 준다. 그리고 7번째 심판관인 태산대완은 남을 속인 사실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톱으로 뼈를 켜는 벌을 준다. 이렇게 해서 14명의 신판관을 거치고 15관문에서는 동자판관에 의해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 여기서 이승에서의 죄가 많아 지옥의 형벌로도 안될 때는 우마,구렁이,지네 등으로 환생한다. 이것은 귀양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죄없고 공쌓은 사람은 저승의 상마을․중마을․하마을․줄렴당․말렴당․섹효산․노상대․주성도 상시당과 같은 곳에서 영생을 보내거나 새나 나비로 환생한다. 이승에 있는 이상적 공간의 의미는 알수 없고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 확실한 언급이 없다. 다만 이승과 비슷한 구조를 띠고 있다는 것만을 나타내고 있다. 죄없고 공덕있는 사람만이 저승에의 영생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본 것을 보면 이것을 좋은 것으로 인식했었음이 드러난다. 여하튼 최후심판의 내용은 크게 두개로 대별된다. 첬째, 인간은 사후에 저승에서 영원히 산다고 관념했다는 것이고 둘째, 인간은 죽은 후에 종을 달리하여 이 세상에 타시 태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전자를 영생,후자를 환생관념이라고 정의한다면 무속집단은 곧 이 둘을 다 가졌던 셈이다.



2) 불교의 열반 종교학회, 같은책, pp. 79-104참조.





불교에서 죽음이란 수명과 체온과 의식(정신작용)이 사라지고 신체의 기관이 모두 변하여 파괴된 모습을 말한다. 한편 불교의 인간은 자신의 업에 의한 윤회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수태로써 생명이 결성된 이후 다음의 생명으로 결성되기에 이르는 기간에 4종의 존재를 경과하는데 이를 4有라고 한다. 생명이 결성되는 찰나를 生有, 이로부터 생명의 임종 직전까지를 本有, 최후에 임종하는 찰나를 死有, 이 사유로부터 다시 생명이 결성되는 생유 사이를 中有라 한다. 불교 신자들은 이 중유에 있는 사자의 명복을 비는 의식으로서 사십구제가 관례화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7일마다 사자가 좋은 삶으로 往生할 수 있도록 기원하며 49일째엔 보다 큰 의식을 치른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와같은 관념은 보편적 질서를 체득하기 위한 일단일 뿐이다. 즉 불교의 관심사는 인간이면 피할 수 없는 현실인 죽음을 냉철히 자각함으로써 현실적 죽음을 극복하고 하는데 목적이 있다. 붓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후의 존재가 아니라, 삶에도 번민하지 않고 죽음에도 번민하지 않는 말하자면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느냐는 문제였다. 불교는 이 초월의 상태를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라고 하며, 번뇌를 불어 꺼버린다는 원의를 지닌 열반이라 한다. 그래서 죽음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삶의 실상을 아는 것(苦.無常.無我), 이로써 無名의 상태가 되는 것이 곧 영원히 사는 것이 라고 보았다. 현상세계의 진실을 터득함으로써 삶의 번뇌가 사라지고 업을 형성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불교의 일관된 사고방식이다. 불교의 열반은 천국에 있는 이들의 경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한 이들이며 존재와 합일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3) 유교의 천인합일



유가에 있어서 천국에 대한 사상은 없다. 그들의 관심은 인간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적 인간상은 우리의 천국의 존재와 비슷하다. 그들은 인간은 궁극자로부터 연원(淵源)하고 있으며, 이 궁극자는 인간과 분리된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 안에 내재하여 인간 본성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論語, 述而, 23

따라서 인간의 本然之性은 동일하고 선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氣質之性은 모자람과 온전함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수양을 통해 이 기질을 변화시켜 하늘과 합일되야 한다고 보았다. 최기복,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과 실현방법, p.22

유가는 이 천일합일한 이를 聖人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성인의 경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수양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먼저 誠意正心이다. 즉 분심하지 않고 마음을 오로지 하여 하나로 집중함,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엄숙히 함,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삼가 두려워 함, 항상 깨어있음, 성찰하여 흐트러진 것을 모아들임 이다. 다음은 格物致知이다. 이는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극한 데에 까지 이름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篤行이다.즉 孝弟仁義禮智를 실행하는 것이다. 실천하지 않는 수양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유가는 이와 같은 수양을 거친 이들을 성인이라 부른 것이다. 이는 가톨릭에서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영성훈련의 방법과 유사하다. 여하튼 유가에서는 궁극자인 천과 합일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는데 이것은 역시 이상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천과 합일한 성인의 상태는 천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천국에서는 하느님을 마주 뵈옵기 때문이다.

4) 도교의 자유의 실현



도교의 생사관은 삶과 죽음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는 초탈한 인생관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인간은 자연현상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인 것이다. 이는 허무주의가 아니고 인간은 자연에 합치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위대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생과 사를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대우주적 순환으로 본다. 유성태, 맹자 장자의 수양론 비교연구, (이리: 원광대, 1990), pp.109-119.

그래서 인간의 목표는 수양에 정진하여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과 외물에 구애되지 않는 도(자연- 이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를 체득하고 도(자연)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궁극 목표는 자유의 실현에 있는 것이다. 이 자유를 실현한 이를 聖人,知人,神人,眞人 등으로 부른다. 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수양방법에는 心濟,專一,坐忘,복성이 있다. 심제는 마음을 말히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다. 여러 미혹의 장애물을 물리치고 고요한 심을 간직하는 것이다. 전일은 잡념이 끼어 들이 않게 마음을 온전히 하고 의지를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좌망은 物我,是非,差別을 잊어버리는 상황이다. 일체를 망각하여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서 지식,사려를 버리고 자신의 신체까지도 망각하여 우주와 합일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과의 일치를 의미하며 온전한 정신의 자유를 표현한 것이다. 복성은 덕의 자연스런 흐름에 맡기는 것, 꾸밈없는 소박한 본성에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도교는 자연과의 합일을 통한 자유의 실현에 궁극목표를 두고 있다. 여기서 자연은 형이상학적인 의미로서 제1근원을 말한다. 물론 이치이지 실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보아도 무난하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도가의 자연에의 합일은 즉 하느님의 의지와의 합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천국의 상태이기도 한 것이다.



2. 천국의 신학적 이해





앞의 타 종교의 인간관에서는 미약하나마 가톨릭의 천국의 맥락을 조금은 찾아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은 하느님의 빛에 의해 비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종교는 다르더라도 하느님의 진리는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받아 들이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조금씩 정도나 상태가 다른 것이다. 그러면 온전히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빛에 의지하던 가톨릭의 사상을 알아보자.



1) 천당의 의미



천당을 성서에서는 하느님과 성인들이 거처하시는 곳이라고 표현한다. 옛교리서는 천신과 성인들이 천주를 모시고 완전한 영복을 끝없이 누리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K.Rahner(현대가톨릭의 최고의 신학자이며 철학자)는 천국은 장소적 의미도 있지만 하느님 이름의 완곡한 표현이며 종말론적으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현대는 천국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해후,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일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상실한 것일 지옥이다. 천국은 인간 삶의 완성이요 사랑의 완성이다. 따라서 천국이란 우리 모두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몸이고 되고 유대를 이루고 이웃들과의 사랑을 교환하고 서로 일치하는 곳에 이루어진다.

2) 천당영복의 내용과 특질



행복이란 “모든 선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상태” 와 “욕구를 전적으로 만족시키는 완전한 선”이 있다. 즉 초자연적 행복과 자연적 행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천상의 행복은 초자연적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을 마주 뵙는 것이며 사랑과 즐거움이 넘치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의 빛에 싸이게 되는 것이다.

천당영복의 특질은 차등이 있다. 천국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의 빛으로 사랑과 즐거움이 가득하지만 개인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화관에서 모두 기쁨을 누리는 장면을 보았을 때 개인의 감성과 지성에 따라 정도에 차이가 있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두번째로는 범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는 하느님으로 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천국에서는는 하느님을 마주 뵙고 그 분을 잘 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 다음으로 천국의 복락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행복은 불멸하기를 바라는 것이요 불멸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부활의 희망 안에서



천국의 복락은 부활안에서 더욱 완벽하게 이루어 진다. 즉 이 세상이 끝나는 날을 종말이라고 하는데 이 때는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여 공심판이라는 것이 이루어 진다. 부활은 죽은 육체가 영혼과 재결합하여 완전한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이러한 예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보여 주셨다. 부활한 육체는 불멸성을 지닌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앞에서 모든 천사와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심판 받게되는데 이로써 선인은 영원히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게 되고 악인은 지옥에서 영원한 육체의 벌을 받게 된다. 의인들의 육체는 마지막날 부활하여 영원히 썩지 않고 영광에 싸이고 강하고 영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의인의 영혼과 육체는 천국에서 하느님을 마주 뵈오며 항상 즐겁고 사랑에 휩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크로퓨쉬토크의 시를 소개한다.



살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라

죽어야 할 내 몸이여, 그대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대를 불러주신 분은 그대에게 불사의 생명을 주신다.

그대는 다시금 꽃피기 위해서 뿌려졌다.

수확의 주인은 천 아름을 모아간다.

죽었던 우리를 모아간다.

오, 믿으라, 믿으라. 내 마음이여,

그대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리.

그대가 그리워했던 것,

그대가 사랑하고 싸워 얻은 것은 모조리 그대의 것이리.

오, 믿으라. 그대는 쓸모없이 태어나지 아니했다.

그대는 쓸모없이 살고 괴로와한 것이 아니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죽었던 자는 반드시 부활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살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라.

내 마음이여, 그대는 갑자기 다시 살아나리라.

그대의 고통은 그대를 하느님에게로 실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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