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따라서 — 권 마리 마태오 관구장의 고별미사 강론
-함세웅 신부
친한 사람, 그리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묵묵히 그 죽음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뿐입니다.
사실 이러한 죽음 앞에서 인간의 언어란 불필요합니다. 침묵, 침묵의 기도만이 이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권 마리 마태오 관구장 수녀님의 죽음을 성서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연결시키면서 우리 자신의 성화를 위하여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오 27,4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마지막 절규 중의 한 말씀입니다.
스스로 택한 십자가의 길, 자원의 길, 봉헌의 길, 그리고 사랑의 길이었지만, 인간 예수는 이 길이 너무나도 힘들고 외롭고 어려웠기에 이렇게 기도 바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괴로움은 육체적, 외적인 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 성부께 마저 버림을 받았고 잊혀졌다 하는 생각이 엄습되자 더욱 더 미칠 듯이 괴로우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줍니다.
하느님을 위한 사람은,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모두에게 버림을 받고 심지어는 하느님께 마져도 버림을 받아야 하는, 쓰라린 아픔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성인성녀들이 이야기하는 사막의 길, 또는 암흑의 길이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이 괴로움, 슬픔, 고독, 허전함,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진실된 수도자,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하고, 봉헌된 수도자는 모름지기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 왜 관구장 수녀님이 이렇게 꼭 죽어야만 합니까? 수녀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많은 제자 수녀님들의 애뜻한 목소리입니다.
그뿐 아니라 수녀님 자신도 병중에서 수없이 “하느님,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살아야 합니다.”하고 기도 바쳤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 왜 나는 이렇게 꼭 죽어야 합니까”하는 의문점을 제기 하였습니다.
이 힘들었던 1년의 병상생활, 특히 오래 살 수 없다는 확실한 진단 소식을 전해들은 마지막 시기는 수녀님에게 있어서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 즉 사막과 암흑의 시기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은 수녀님께 주어진 이 고통과 암흑의 길, 그 길을 수녀님 홀로 걸으며,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수녀님은 바로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루가 23,46).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십자가의 고통을 극복한 승리의 예수, 위탁의 예수, 영광과 기쁨으로 건너가는 예수, 이 예수의 기도를 복음작가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봉헌의 결단,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인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수녀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지나면서도, 그는 의지적 결단과 신앙으로 하루하루를, 그리고 매 순간순간을 견디어 내며 또한 극심한 고통을 이겨내고 마지막 임종시에는 그리스도의 이 기도를 힘있게 반복하였습니다. “주님, 제 영혼을 맡깁니다. 받아 주십시오, 저는 제가 맡은 일을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하여 이루었고 이렇게 모두 마쳤습니다. 저와 제가 몸담았던 이 공동체를 보살펴 주십시오!”하며 한 점 아쉬움 없이 눈을 감으셨습니다.
관구장 수녀님이 병중의 고통은 실로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서울 관구 전체의 병고였습니다. 지난 해의 이 체험은 우리 모두에게 귀중한 교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병중의 형제, 병중의 자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교훈의 확인입니다.
병은 그 누구의 탓 때문이다 라고 말하지 말고 다만 서로 도와주고 아끼고 그 병고를 수락, 극복하는데 참뜻이 있다는 것을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또한 수녀님의 죽음을 통해서 회개를 결심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을 때 하느님께서는 더 큰 고통과 벌을 주시리라는 경고로도 알아들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건강하다는 것,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이 수녀님보다 더 훌륭하고 착하다는 표시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나보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더 고통을 당하고 죽었다는 데서 오히려 우리는 더욱 더 두려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이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와 같이 수녀님의 생애, 수녀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교육적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고향과 부모를 그립니다. 그리고 가장 순수했던 옛 시절 동심의 세계를 그립니다. 임종을 앞둔 노인들이 순진한 어린이와 같이 변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입증해 줍니다. 수녀님은 이미 병중에서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느끼면서 56년 3월, 수녀원 입회 당시의 느낌을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56년 3월 23일, 수녀원 바로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때입니다. 수녀원 입구에서 종을 잡아당기고 긴장된 자세로 기다리던 중 수녀님 한 분이 나오셔서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밝은 미소, 맑은 눈동자, 정결한 모습, 그 수녀님의 모습은 온통 거룩할 뿐이었습니다. 첫 입회자는 이 수녀님께 매혹당했습니다. ‘참으로 성덕의 향기란 것은 아름답구나. 수녀님과 같은 미소의 수녀님이 되자.’ 이렇게 결심하면서 성덕과 미소의 그 수녀님을 자기 수도생활의 이상적 모델, 또는 길잡이로 삼으셨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더욱 더 놀란 것은 그 수녀님이 실은 불치병의 환자로서 심한 통증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그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심한 고통 중에서도 미소를 지으실 수 있으실까’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혔습니다. 얼마 후에 그 수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당시 원장 최 놀벨다 수녀님이었습니다. 25년 전의 그 수녀님, 고통 중에서 미소를 지으셨던 그 수녀님을 기억하며 권 마리 마태오 수녀님도 암의 고통을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미소지으려 노력했던 성실한 수도자였습니다. 성덕과 미소의 이 두 수녀님은 오늘 천상에서 기쁘게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 모두 미소와 성덕의 주인공이 되라고 속삭이십니다.
수녀님은 본당의 전교경험은 없으셨지만 동료 수녀님, 또는 제자 수녀님들의 고충을 이해하시려고 노력한 분이었습니다.
수련자들에게 폭 넓은 아량을 보여주고 규칙에 얽매이기보다는 개방적 자세로 스스로 자기 완성의 길을 걷도록 재촉한 분이었습니다. 병중에서도 수련장 시기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모든 수녀님들이 하느님을 위한 그리고 이 수도회를 위한 강하고 성실한 교회의 딸들이 되기를 늘 염원하고 계셨습니다.
권 수녀님께 대하여 저보다 더 잘 아실 많은 수녀님들께 제가 드릴 말씀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권 수녀님의 인품과 성격을 미화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다만, 고집과 확신의 이 여인, 그는 언제나 수도자다운 수도자이기를 원하면서 살았다는 사실, 이 사실 하나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 인간적 한계점이 있었지만 그것을 겸허하게 자인하면서 침착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 그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과 같이 오래 산다는 것이 복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수녀님은 비록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성실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구약의 욥은 또한 의지적 신앙인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내도, 친구도 그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고 외면했을 때 욥은 하느님께 절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절망과 실의로 짓눌려도 의지적 결단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쳐다보며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평소, 즐거운 때, 기쁠 때, 건강할 때, 일이 순조롭게 잘 될 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찬미 드리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 때, 병 중에 고통 중에 일이 뜻대로 안될 때, 바로 그러한 때에도 이 모든 것을 그대로 수락하고 견디어내고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목적을 지니는 사람, 그가 참으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수녀님은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사실 수녀님은 병상에서 자신의 병이 실감나지 않는다고 토로했습니다.
실감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가 막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수녀님은 의지적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소화시키셨습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관계를 물리적 및 정신적 접촉관계로 구분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관계를 물리적 외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한 단계 높은 다른 차원의 관계가 있습니다.
즉 정신과 정신, 마음과 마음의 일치입니다. 이 정신적 관계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단계 더 높이 신앙인의 일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녀님은 비록 죽으셨지만 새로운 존재양식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는 신앙과 기도, 사랑 안에서 늘 하나가 됩니다. 사도신경에서 늘 고백하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라는 의미를 이제야말로 확인해야 할 때입니다.
수녀님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 마음속에 항상 살아 계십니다. 수녀님의 존재양식 변했을 뿐입니다.
끝으로 수녀님은 병중을 찾아간 저에게 “신부님, 제가 죽더라도 바오로회를 사랑해주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으면서도 자기가 몸담았던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을 우리는 모두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위한 수도자가 되기를 다짐하는 것, 이것이 돌아가신 수녀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부활의 희망을 지니며 이 미사 중 함께 신앙을 새롭게 합시다.
“모두에게 사랑 받는 수도자가 되어 주십시오!”
수녀님의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주여, 죽은 권 마리 마태오 수녀에게 영원한 기쁨과 안식을 주시며 남아 있는 그의 가족 친지들에게 위로와 용기, 희망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일치와 화목 그리고 성실함을 주소서. 언제나 기도 중에 일치하는 당신의 충실한 종들이 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