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죽음과 죽은 삶 ———- 최홍길 신부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그 삶 전체를 통하여 잘 살고 잘 죽기로 작정하여 사는 이들이라고 하겠지만 특별히 11월 위령성월은 더욱 열심히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또 자신의 삶과 죽음을 깊이 체험하며 사는 한달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한 인간의 생애란 그 첫 출발부터 순간 순간 죽음의 시간들을 재촉하며 사는 이 아이러니(역설)에서 비롯된다고 할때,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란 결국 「사는가, 죽는가」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연히 지나간 한해의 신문철을 들추다 보면 어느 하루인들 사고없는 편한 날이 없고 죽음에 관한 기사가 없는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삶이 어려워지고 죽음 또한 쉽게 부딪쳐 오는 우리 현실이 되었다고 할까 사실 지난 수삼년간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죽음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고 또한 흔해빠진 일상사가 되어버린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종류가 많은 것도 많지만 죽음의 양상 역시 그 얼마나 천태만상인가 사람의 얼굴이 저마다 서로 다른 것처럼, 시대변천에 따라 죽음의 유형도 그만큼 유별나고 엄청나게 변모된 것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권투중계를 보다가 졸도사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다리난간에서 노래를 부르다 추락사한 일이 있습니다. 폭약물을 갖고 놀다가 터져 폭사한 네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비닐봉지를 쓰고 본드냄새를 맡다 목숨을 잃은 소년이 있었습니다. 광산의 갱속에서 광부들이 압사당하는가 하면 관광호텔의 구관이 붕괴되어 종업원이 깔려죽는 일이 있었다.
대중식당의 국밥을 잘못 먹고 죽은 극장직원이 있는가 하면 고량주를 마시다 숨진 상인이 있습니다.
국내 유수업체에서 건조중인 배에 불이 나는가 하면 석유 난로를 피우고 잠을 자다가 과열로 음식점을 몽땅 태운 일이 있습니다.
멱을 감다가 익사하는가 하면 해빙기에 참변을 당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연쇄점에 복면강도가 나타나는가 하면 은행과 미장원에 권총과 칼을 든 괴한이 침입엿습니다. 춤바람난 여인이 간통사실이 적발되자 보험금을 노려 남편을 청부 살해하는가 하면 여덟 번째에도 또 딸을 낳게되자 아기를 목졸라 숨지게한 비정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택시와 버스가 충돌하고 버스와 트럭이 부딪히며 트럭이 사람을 덮치고 지나갑니다.
경산역 열차 충돌사고로 수백명의 사상자가 났고 산사태로 수십명이 떼죽음을 당하는가 하면 사우디 여객기가 추락하여 한꺼번에 3백1명이 죽는 대형참사를 빚었습니다. 보석을 훔친 혐의를 받는 가정부가 자살하고 학기말 시험을 잘못 치루었다고 여고생이 자살하며 어린이 변사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된 20대 젊은이가 끈으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습니다.
이토록 생명의 존엄성이 허물어지고 그 신비가 모독된 적이 일찍이 우리 시대 이전에도 있었던가 근래에 전직 대학총장 부부의 동반자살을 놓고 사회여론이 찬․반 양론으로 엇갈리는 가운데 연쇄적으로 자살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의 삶이 각박해지고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도 일반적 통념과 인식이 평가절하된 때문일 것입니다.
여전히 천재지변, 생로병사, 집단자살, 대량참사가 우리들 가까이 와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또 얼마나 서로 다른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의 표현대로 하루에도 거리에서 자동차에 의해 수십명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우리들 역시 가장 불확실한 모습으로 죽어야할 시간들을 재촉하는 삶을 이루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실로 우리들 앞에 가로놓인 삶이란 결국 죽음이전의 아니 그 직전의 삶들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디가 죽어가고 어느 정도 살아 있는가. 한마디로 살기 위해 죽고 죽기 위해 사는 이들의 모습을 인생이라고 하던가.
많은 이들의 경우에 「죽을 시간」도 없을만큼 사는데 몹시 바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계획과 일들을 다음으로 미루며 살아가는 것인가.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 남아있을 사람이 있을까.
누구든지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될 때 근심하고 불안해하며 초조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리라. 그것이 아무리 동반자살이라고 할지라도 한번밖에 없는 죽음이며 혼자서 맞이할 죽음의 정황들이라고 할때 어떻게 두렵지 않을 수 있는가. 얼마전 모방송국의 특집프로 「순교자의 영광」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앞서간 선인들은 어쩌면 그토록 죽음을 맞는 최후의 순간들을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세례받은 부활한 그리스도인의 운명(로마6)을 살았기에 죽음이 곧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메시지가 되었으리라.
인간이란 그가 누구이든 또 어떤 모습으로 죽어가든 결국 죽는듯하지만 영원히 「사는 죽음」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잘사는 듯 하지만 마침내 허망해질 수 밖에 없는 「죽은삶」에 얽매이거나 하는 두갈래 갈림길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맛보며 살아가는 그런 존재라고 하겠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첫째 아담의 범죄로서 이세상 전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지만 둘째 아담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이 주어졌다. (로마 5,17~21)
이것은 죽음을 극복한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인 것이다. 새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피땀이 흐르도록 고뇌하며 머리위에서 발끝까지 아니 찢기우고 터진데가 없이,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혀 철두철미하게 죽어갔지만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셨다.
수많은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또한 그리스도처럼 살다가 죽어갔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새아담 그리스도처럼 순교자들처럼 그렇게 살며 죽어가야 하리라.
성직자 묘지 입구에 붙여진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이말은 또 한번 「사는 죽음」과 「죽는 삶」의 뜻을 묵상하게 해준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때마다 자기자신의 삶과 죽음도 동시에 바라보며 내가 「사는 죽음」에 축복있기를 빌어야 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