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가능한가?
– 실망한 욥과 코헬렛 –
서인석 신부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Ⅰ
단식과 금육이 선포된 재의 수요일, 우리는 사순절의 막을 여는 엄숙한 이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줄지어 성당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성당 안팎은 온통 자주빛 일색이었습니다. 제의도 영대도 모두가 자주색이었습니다. 이 자주색은 슬픔과 참회를 상징합니다. 신부님은 지난해 성지주일, 우리에게 나눠준 종려나무가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쟁반에 담아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제대 앞 무릎 끊은 우리의 머리 위에 그 재를 뿌리면서 외쳤습니다. ‘사람아,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 숱한 인생의 의미는 이 한마디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혼자서 있을 수 있다고, 아니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우쭐대던 우리는, 이 재뿌림 속에서 참회해야 할 신앙인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내 죄를 없이 하소서.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니,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얻었삽고
당신의 눈앞에 죄를 지었사오니,
보소서. 나는 죄 중에 생겨났고
내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배었나이다”.(시편 51 참조)
어둡고 비참한 인간의 조건,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시편 작가와 함께, 우리 뇌리 속에 명멸하였습니다. 우리는 진정 참회하였습니까? 오직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까? 하느님이 보내신 성자를 믿고 그분이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우리의 희망을 바쳤습니까?
우리는 머리 위에 재를 얹은 채, 잿빛 하늘 아래의 거리로 나왔습니다. 거리는 온통 사람의 물결로 이어져 한 뼘의 여유도 없이 붐볐습니다. 어디로 향해 밀리는 물결입니까? 풍족한 삶의 공허를 메꾸기 위해, 쾌락과 기쁨을 찾아 나선 사람도 있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방황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가는 날로 치솟고, 일자리 구하기는 날로 힘겹습니다. 점점 어렵고 각박해지는 현실입니다. 토담 너머 오가던 따스한 인정의 이웃은, 이제 내가 차지할 밥을 빼앗아 가는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풍족한 사람들의 호언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불우 이웃을 돕자는 구호도 나붙습니다.
하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먹고 입고 잘 곳이 있을 때의 이야기라고 흘려 버립니다. 수백만이 붐비는 대도시라 이웃에 온정을 베풀 수 있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호구지책에 허덕이는 우리에게는 이웃 사람이 한낱 사치로 비칠 때가 더 많습니다. 대 도시의 고독과 소외감에 젖은 현대인들에게 이웃이란 황량한 사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살을 비비고 사는 이웃끼리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성당에 가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는 한, 요한 세자의 것과 같은 세찬 설교를 듣지 않는 한, 하느님이 뇌리에 떠오르지 않는 존재가 바로 우리인지도 모릅니다. 스쳐 지나가는 고독한 행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달리는 흉기, 짐짝처럼 흔들리는 버스 속의 표정들을 읽어보십시오. 하느님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피로만이 서려 있습니다. 그들의 눈동자에서는 도무지 하느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잿빛 하늘 아래 헤매다 지친 피로와 좌절만이 겹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마음과 시선에 그리고 물밀 듯 밀려다니는 저 많은 인파에 침묵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까? 과연 하느님은 ‘숨어 계시기만 하는 분’입니까? 우리도 머리 위에 재를 얹은 채, 붐비는 거리를 통해 집에 닿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사람아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
재를 뿌리며 던져준 그 말씀을 조용히 되뇌어 봅시다. 우리도 언젠가 한번은 기고만장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숱한 실패와 고통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늘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세상은 온통 잿빛과 어두움뿐이었습니다. 이제 삶에 지쳤고, 세상 만사가 수수께끼만 같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말하던 흙에서 나온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1년전에 유행하던 『정처없는 나그네길』지나지 않는 것입니까? 인간의 자랑인 동시에 고뇌의 원천이기도한 이성(異性) 그 알고자 하는 의욕은 어디서 왔습니까?
대기의 오염을 무릅쓰고라도 자연을 정복하여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집념은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는 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칩니까? 그런데 이토록 갈구하는 자유에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팎에서 난무하는 악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까? 노래마디, 영화 장면, 소설 구절마다 오르내리는 사랑이란 또 무엇입니까? 사랑에는 한계가 없어 아무리 사랑을 해도 직성이 풀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정말 사랑해 주는 연인이 있을 때, 우리 주위에 언제나 행복에 겨운 나날만 전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상실에 대한 공포에서는 헤어날 수 없습니다. “선생님 소생할 가망이 있습니까?” “미칠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죽음을 목전에 둔 주위의 애처로움은 궁극적인 질문을 낳게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불안과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으며, 마침내 죽음이란 미지의 수수께끼에 봉착하게 됩니다. 따라서 피스톤 같이 움직이는 복잡한 생활 속에서도 한번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를 이토록 궁지로 몬 고통과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죽음을 너머 참된 행복을 구가할 영원한 나라는 없는가 하고 말입니다.
실로 우리 인간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숱한 사상가 숱한 신학자들은 저마다 이 물음에 답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여느 동물과 같이 하나의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이다. 자연과학과 인지가 발달하면 이 유기체의 비밀을 완전히 밝혀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날이 올 것이다” 심리학을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Ego)라는 감옥 안에 갇혀있는 하나의 개체로서, 온갖 관심과 이익추구와 정념으로 죽 꿇듯 하다가,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을 ‘자기’안에 끌어들여 버리는 한 개별적인 존재다.” 그리고 문학이나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다가, 지쳐버린 인간은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존재다. 인간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며, 그 실존(實存)은 실로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것이다.”
그러나 머리에 재뿌림을 받은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임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존엄을 가진 신비의 존재이며, 이웃에게 자신을 열어야할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전적으로 다르신 분’(全的他者)이신 하느님께 전인적으로 나아가야할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啓示)하시는 터전이기도 합니다. 시편 8의 작가는 인간을 두고 하느님의 따뜻한 방문을 받는 존재라고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 손가락의 업적인 저 하늘들을 우러러보며,
주님께서 굳건히 고정하신 달과 별들하며,
죽을 인간이 무엇이나이까?
주님은 그를 기억하시나이까?
아담(흙)의 아들이 무엇이나이까?
주님은 그를 은혜로이 찾아주시나이까? (시편 8)
이 시인은 인간의 죽음에도 놀라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인을 놀라게 한 것은 흙에서 빚어진 인간 그리고 죽을 인간을 잊지 않고 방문하시는 하느님의 배려였습니다. 드디어 하느님께서는 당신 성자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십자가의 승리를 통해 우리 인류를 따뜻하게 방문하고 계십니다. 이 시인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또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시편 8의 저자가 보는 인간의 위대함이란, 지혜로운 인간(Home Sapiens)으로서 사고(思考)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연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저자의 사상은 빠스칼의 말로 표현해 봅시다. “인간은 갈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물 가운데서도 가장 연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갈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이 맺는 관계는 사고(思考)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 관계는 복음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사랑’ 위에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연인이 될 자격을 갖춘 인간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교부 이레네오는 “살아있는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은 하느님을 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Ⅱ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사랑의 길’은 쉽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회의와 좌절, 고통과 불안이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인파로 붐비는 어두운 길목에서 그 사랑의 길을 잃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서도 이와같은 우리의 조건은 먼저 알고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유대인들이 희랍의 식민지로 있을 때 코헬렛이란 성서 저자가 쓴 작품에 지금 우리의 번민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하고 외친 코헬렛(전도서)은 비록 인생의 무상과 부조리 앞에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 대전에 승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과 번민 중에 숨어계신 듯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기까지 무서운 내적 투쟁을 벌인 희망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도 코헬렛과 같이 우리와 우리 주변을 둘러봅시다. 우리는 지금 격동의 시대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의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치며, 코헬렛과 같이 만상이 허약하고 헛된 듯이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애와 실망 속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는 오직 부조리와 환멸뿐, 그 무엇 하나 영구한 안정은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제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바람이라도 추적하듯 헛되게 보입니다.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법과 제도는 항용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부정과 부패, 애써 발버둥쳐야 하는 우리의 고휴, 앞사람을 밟고 오르지 않으면 안되는 생존경쟁, 이 모두는 선현들이 권장해 오던 지혜와 덕행과 예의를 무색케 합니다. 이성(理性)을 자랑으로 삼는 현대의 지식인들도 온갖 좌절에 부딪쳐서 지식의 헛됨을 뼈저리게 통감하기도 합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서정쇄신을 부르짖지만, 이게 바로 정의로구나! 하고 반길만한 현실은 보아오지 못했습니다. 코헬렛은 시편 73의 시인과 더불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 발은 아슬 아슬 헛디더지고
걸음은 비실 비실 넘어질 뻔하였으니
어리석은 자들을 시기한 탓이로다.
악한 자가 잘되는 꼴을 바라보면서
미상불 그들은 아무 고생도 없이 몸뚱이는 피둥 피둥
살쪄 있도다.
인생의 고초란 겪지도 않고 남들처럼 고생도 하지 않기에
교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 입은 옷이로다.
내 마음 깨끗하게 보존하고 죄없게 손씻은 것이
허사였던가?!
쉴새없이 얻어만 맞고
날이 새면 받는 것이 책벌일 바에야 (시편 73).
의인은 불행하며, 악인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사필귀정의 원리를 무시합니다. 오늘날의 코헬렛도 이러한 현실을 보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한탄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헛되단 말입니까? 우리는 코헬렛과 더불어 조용한 잠자리에서 생각해 봅시다. 회초리처럼 우리를 몰아붙이는 시간을 생각해 봅시다. 세월은 유수(流水)같다고 합니다. 세월도 날으는 화살처럼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속박하고 때로는 마음 조이게 하는 이 시간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물은 시간적 리듬에 얽매어 있습니다(전도 1,1-11). 인생과 사건은 한번 지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저마다 자기 ‘때’를 가져,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울 때가 있고, 전쟁할 때가 있으면 평화로운 때도 있습니다(전도 3,1-8).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모든 현존(現存)이 비현존(非現存)에 의해 위협을 받는가 하면 끝내는 비현존이 현존을 삼키고 맙니다. 한 세대가 오는가 하면 다른 세대가 넘어가 찾을 수가 없습니다(전도 1,4). 인생의 황금기인 청춘도 일장춘몽처럼 사라지고(전도 11,10), 삶의 뜻깊은 사건들이 기약하는 행복의 풍성한 온갖 약속도 ‘모든 강물을 집어삼키고도 범람하지 않는 바닷물’과 같습니다(전도 1,7).
인간의 시선은 욕망과 탐욕과 배금주의에 젖어있고(전도 4.7-8;5,9), 그 입은 욕망을 뱉어내고(전도 6,7), 미련하게도 만족을 모르고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바람과 같이 사라지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전도 1,9). 사람들은 보다 여기에 새로운 것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이미 있던 것에 ‘새로운 것’이라는 상표만 붙였을 따름입니다(전도 1,10-11).
이와같이 시간은 화살처럼 제 갈길을 재촉하며 흘러갑니다. “이미 있던 것이 다시 있을 것이며, 한번 일어났던 일이 반복될 것이니 거기에 새로운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 코헬렛은 한탄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갇혀 또는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데, 우리가 하는 일은 어제 있었던 것을 내일에 끼워 맞추는데 지나지 않습니다(전도 3,15). 코헬렛은 이같은 순회적인 사건의 움직임을 보고(전도 1,6-9), 오직 망각과 단조로움과 지루함밖에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폐쇄된 이 세상을 생각하는데에 지쳤습니다. 시간은 우리 마음속에 회복이 불가능한 환멸과 상처만 줄뿐입니다.
현대의 우리 코헬렛들은 인간이 내세우는 제 가치관에도 비애를 맛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의 직분을 망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태양 아래를 훑어보십시오. 법이 차지해야할 자리에 범죄가 있고, 의인이 들어선 자라에 죄인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하느님께서 의인과 죄인 이 둘다 판단하실 것이며, 모든 것이 다 제 때가 있다”(전도 3,16-17)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판관은 그릇되게 판단하고 예루살렘의 왕은 늙고, 우둔하기 짝이 없다”(전도 4,13-016)고 생각합니다. 지방장관들도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뇌물수수에 급급하고 있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아무에게도 도움받을 길이 없습니다(전도 5,7).
착한 행실, 근면한 노동, 윤리적인 덕행도 아무 보상받을 길이 없습니다(전도 8,8-10). 오늘을 쳐다본 코헬렛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행해지는 또 하나의 헛됨이 있다. 그것은 의인들이 악인들의 행실에 따라 대접받고, 악인들이 의인들의 행업에 따라 대접받는 부조리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헛되고 헛되다”(전도 9,11). 개인의 능력이 제 아무리 빼어나도 ‘줄타기’에 실패하면 인정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도 코헬렛과 같이 무관심과 허탈의 유혹에 저항할 기력마저 잃고 있습니다. 서로 상반된 양극인 날 때와 죽을 때(전도 3,1)는 모든 것을 허무화시키며, 죽음은 현자와 우둔한 자를 가리지 않고 덮칩니다(전도 2,12-16).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아귀다툼을 벌리며 고투하고 있습니까? 선현들에게서부터 줄곧 내려오는 지혜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헛도니 부조리일 뿐입니다”(전도 11,8).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치관이 경멸의 구석으로 몰리고 있으니 코헬렛과 같이 역겨움만 느낄 뿐입니다. 우리는 삶의 허무함을 보고 헛되다고 부르짖던 코헬렛의 외침에 공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백명의 아들들보다 낙태된 아이가 더 행운아가 되고(전도 6,3), 살아야할 생명을 가진 산 자들보다 이미 죽은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아 태양 아래 자행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 행복하다(전도 4,2)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진 것 또한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써 재산을 모아 창고에 넣어도 먹어치워 버리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전도 5,10). 뼈빠지게 수고해도 그 결실을 얻지 못하고(전도 2,18-23), 얻어도 남에게 빼앗기기 일쑤입니다(전도 6,1-2).
재산이나 재물이 있어도 갑자기 닥쳐오는 재앙에서 보호할 수 없으며, 평생의 사업으로 벌어들인 재산도 대대로 물리기는 힘든 법입니다. 인간이 어머니의 태중에서 발가숭이로 태어났듯이 죽을 때에도 빈 몸으로 갑니다. 애써 벌어들인 재산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전도 5,12-16) 예수께서 비유를 드신 복음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미련한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네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가 12,20)
Ⅲ
이상과 같은 코헬렛의 체험은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반성과 공감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이 ‘헛되다’라는 코헬렛의 말은 일시적이요, 아무 유익도 없이 불안정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절개도 지조도 없는 입김이나 수증기와도 같다는 말입니다. 코헬렛의 이 ‘헛되다’는 말은 인간 실존에서 이러한 헛됨을 못 보게 하는 완강한 적수가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 하느님의 연인이 될 수 있는 우리의 무상(無常)을 파헤치고자 해도 잠시동안의 행복에 눈이 먼 우리의 심성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빠스칼도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심연이 가져다줄 파멸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 앞에 장애물을 세워놓은 뒤 그곳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팡세 276). 우리는 인생의 종막이 죽음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눈가림하고 없는 양 헤맵니다. 인간의 우매함이란 이 지상에서 자기가 나그네라는 점을 잊으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를 솔직하게 고백하여 인간 경험세계의 한계점을 파헤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희망이신 하느님을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환멸을 은폐시키려는 거짓과 기분풀이의 정감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절대 희망이신 하느님과 겸허한 사랑의 유대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헛된 우상을 파괴한 폐허 위에서야 ‘숨어계신 하느님’이 드러납니다. 헛된 것을 추구하는 어두워진 마음과 눈으로는 참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믿고 그분에게만 희망을 둘 때 하느님을 계시하는 탁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잿더미 위에 앉아있던 욥을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는 산다는 것이 하나의 의무요 고통이었습니다. 의로운 일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이란 잿더미와 고통뿐이었습니다. 그 무엇하나 항구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재앙을 당한 뒤 위로해 주러 온 친구조차 엉뚱한 소리만 내뱉고 가버렸습니다.
하느님도 침묵을 지켰으니, 혼자 번민을 안고 고독에 떨 뿐이었습니다. 욥이 하느님께 던진 질문도 아무 대답을 얻지 못한 채 허공만 맴돌았습니다. 우리도 욥과 마찬가지로 우주와 역사 사이의 비극적인 부조화(不調和)를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뿌리째 흔들리고 우리의 인생관은 초점을 잃고 있습니다. 고독한 우리의 삶은 쉽게 주위에 상처만 입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꼭 먼 곳에만 계시는 것같고 세상은 불안하고 성가십니다. 우리는 욥이나 코헬렛과 같이 이 모든 비극의 책임을 하느님께 전가시키기도 합니다. 인생이 이토록 톱니가 맞지 않으니,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잘못이 아닐까 하고.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한 시인의 입을 빌려 이렇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덕은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또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신앙해야 합니다. 이처럼 신앙과 희망은 형제지간입니다”(뻬기)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보다 더한 고통과 실망을 체험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하셨습니다.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누리던 욥도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습다. 그는 끝내 삼베옷을 걸치고 삭발한 채 재를 머리에 뿌린 후 하느님께 외쳤습니다.
나는 알몸으로 내 어머니 태중에서 나왔다가 그곳으로
되돌아 가오리니,
하느님 주신 것, 하느님 다시 거두어 가셨으니,
하느님의 이름 찬미 받으소서. (욥 1,20)
욥은 처음 자기가 태어난 날까지도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겸허하게 자기의 위치를 발견하고는 오히려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숱한 오해와 경멸 속에 고통받아야 했던 욥은 영광스런 부활의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잿빛 하늘 아래 정처없이 방황하면서, 그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일이 있습니까? 고통받던 의인 욥처럼 과연 잿더미 위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갖가지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현실에서도 절망을 딛고 희망을 보아야 합니다. 폐허 위에 욥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비쳤습니다. 그 폐허 위에서는 하느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세계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보여집니다. 욥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욥은 생활하신 하느님이 말씀을 걸어오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때 욥은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제가 주님께 대해 소문으로만 들어 왔지만
이제 눈으로 당신을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제 스스로 제 잘못을 고백하고, 먼지와 잿더미
위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5 이하)
그리고 욥은 하느님께서 결코 우리를 저버리시는 일이 없음을 확신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억울한 고통이 엄습해와도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이라면,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 아닌 누구가 하늘에서 날 위해 주오리까
당신과 함께 있노라면, 즐거운 것 땅에는 없습나이다.
이 몸과 이 마음 다한다 하여도, 내 마음의 바위,
나의 몫은 항상 하느님 (시편 73,25-26)
행복하여라,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에게,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리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