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특강 – 내 이웃을 버려 둘 것인가?

 

 


내 이웃을 버려 둘 것인가?   




                                                         김수환 추기경






 


“내 이웃을 버려둘 것인가?” 이것은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입니다.


이 말은, 물질보다도 정신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 외면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은 말할 것도 없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이웃사랑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웃사랑을 우리는 흔히, 신자로서 닦아야 할 여러 가지 덕행 중에서 가장 좋은 덕행이지만, 그래도 여러 덕행 중에 하나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서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적으로 보면, 이웃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 또 중심적인 계명입니다. 뿐더러, 첫째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이웃사랑의 실천 없이는 완성 될 수 없다고 성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 관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웃 사랑의 실천 없이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로는 갈라 5,1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 마디에 요약됩니다. 구약에서도 이미, 이웃사랑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지만, 신약에서는 이웃사랑이야말로 유일한 계명이라고 할 만큼 반복됩니다.


예수님 친히 요한 14,3에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세상이 그것을 보고, 내 형제임을 알리라.”


또 다른데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사랑이라는 것은 결코, 여러 계명 중에 하나에 불과한 것이거나, 여러 덕목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덕목, 모든 덕행의 중심이며, 완성이며, 그 전부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본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이며, 두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웃사랑과 하느님 사랑과는 절대로 대립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핑계삼아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만큼 이웃사랑은, 믿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그렇게 성서는 이웃사랑을 직접간접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 에 대한 문제를 놓고, 깊이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방금 들은 루가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 말씀을 순서대로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번은 율법학자, 그 당시 여러 가지 계명을 지키는 사람, 책, 법규를 공부한 사람인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성서말씀대로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다시 반문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희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이 반문하시는 것은, 율법학자들의 속셈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가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스스로 율법을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직접 내려보라는 뜻으로 유도하는 반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 율법학자는 바른대로 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해서,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사랑입니다. 이웃에 대한 전적인 사랑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로는 정답이었습니다. “옳다,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질문 같은데서 “생명과 사랑”이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해도, 자기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얻는다 해도 내가 생명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 영원한 생명은, 우리는 돈으로나 권력으로도, 세상의 어떤 지식으로도,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지식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이 생명을 주고서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으로써만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율법학자에게 “가서 그대로 실천하라. 네가 말 한대로 사랑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더구나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랑 없는 삶은 기쁨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참된 삶이 아닙니다. 이만큼 “사랑과 삶”이 뗄 수 없이 계속적으로 밀접하게, 내적으로,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본디, 인간이 사랑을 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서 지녀야 할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자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제일 필요한가? 역시 사랑입니다. 우리 서로간에 상호존경과 상호신뢰와 상호 돕는 이웃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우리 삶이 필요한—- 우리 모두가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도 좋을 만큼, 그런 가치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계속해서, 율법학자는 바리세이파 사람으로서, 언제나 자기가 옳다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누가 제 이웃입니까?”하고 되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는 속뜻이 숨어 있섰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은 생각도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세이파 사람들 사이에는 “누가 내 이웃인가?”하는 문제를 두고서, 견해차이가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본래 구약의 율법서에서 보면, 사랑의 계명인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됩니다. 이스라엘 사람 안에서 이 사랑의 계명이 의무가 있섰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한 것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사는 이방인, 나그네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본디는 그랬는데, 후기 유대교에서는 말하자면,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가까이 옴으로서는 이웃에 대한 계명이 달라져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함께 사는 외국인 중에서도 같은 하느님을 믿고, 유대 율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은 삶에 한해서, 이웃사랑 계명이 적용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세이파 사람들에게, 특별히 실천적인 면에서는 이것이 더욱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가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도 이 율법을 모르는 일밥 백성 중에서 무식한 대중과 천민이 여기서 제외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 미사 때에 읽은 요한 7장을 여러분이 봤습니다. 바리세이파 사람들이 성전 경비병들을 예수를 잡으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잡으러 갔다가 돌아 올 때 맨손으로 왔습니다. “가서 보니, 그렇게 기막히게 놀라운 말을 한 사람을, 그 전에 본 일이 없었습니다.”하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성이 나서 하는 말이, “이 율법도 모르는 무식하고 저주받을 족속—-”하고 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성전 경비병은, 아주 천민이 아닌데도 그들에게 “이 율법도 모르는 무식하고 저주받은 족속 등!”하고 욕을 했으니까, 바리세이파 사람, 일반 백성, 율법학자, 그들에게까지도 천민, 저주받은 사람들까지도 이웃사랑이 해당된다고 성서는 보도합니다. 그러니까 더구나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원수에게까지 이웃사랑이 해당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바리세이파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먼저 같은 핏줄과 같은 종교의 테두리 안에, 같은 파벌에 속해 있어야 하고, 그 중에서도 친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핏줄, 종교, 파벌, 혹은 친분 이것들은 이웃사랑에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그러나 바리세이파인은 본디 율법정신에 비교해 볼 때, 자기들의 실천이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안 했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진 율법학자는, 예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의견을 듣고 싶어“누가 애 이웃이냐?”고 예수께 되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웃 개념”은 얼마나 넓은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핏줄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친분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우리의 “이웃 개념”도 달라지지 않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께서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하는 이 질문에 대해서, 한 비유를 들면서 대답하십니다. 그것은 곧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에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가진 것을 모두 빼앗겼다. 두들겨 맞아 반쯤 죽게되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비유의 전개를 보면,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을 우리이웃으로 내 세웁니다. “어떤 사람”으로 말씀하시는 데에는 뜻이 깊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으로써 그가 예루살렘에서 에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두들겨 맞았다! 상처를 입었다! 고 표현하지만, 그 사람의 국적도 말하지 않았고, 그 사람의 종교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신분도 말하지 않았고, 그냥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란 그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제가 지나갔습니다. 그는 보았지만, 피해 갔습니다. 그리고 역시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레위는 구약시대에 사제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역시 지나가다가 보고 지나쳤습니다.


이 사제! 이 레위! 두 사람은 다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와 제사를 드리고, 에리고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리고는 당시 사제들이 사는 고장입니다.




왜, 그들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예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겁이 났는지! 부정을 탈까 그냥 지나갔는지! 자기도 강도를 당할까 두려웠는지! 그냥 지나갔습니다. 사람을 보고도 그를 도와주고 싶은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 옆을 지나면서도, 아무런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사제나 레위나 같은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주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어떤 문제성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를 보면, 예수께서는 비유를 드시는데 비유의 내용도, 비유를 쓰는 용도도, 예수께서는 고의적으로, 선택적으로 그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그냥 지나친 사람들이 하필이면 사제∙레위인인가? 그냥 “어떤 나그네”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사제∙레위인인가? 왜? 사제∙레위라는 신분을 여기에 등장시키는가?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에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서란? 그 깊은 뜻은 무슨 뜻인가? 예루살렘에서 에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던 것은, 상상으로도 그들은 쉽게 사제와 레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경건한 태도로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란 것을 연상시킵니다.




사제와 레위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성전에서 엄숙하게 제사를 드리고,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라도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실천했어야 했습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정신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르코는 말합니다 : —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바치고, 제사를 바쳐도, 그와 같은 예배의 정신에 곧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를 등장시키고, 또 그들이 강도 당함을 보고도 피해 지나가는 것으로 묘사하시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그 당시 사제∙레위∙율법학자인 바리세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그들이 빠져있는 신앙과 실천의 거리를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고의로 사제∙레위를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야고보 서한을 보면,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로는 1고린 13장에서 사랑이 없이는 어떤 좋은 법규도, 어떤 깊은 신학 지식도, 어떤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심지어 큰 자선행위도, 영웅적인 행위도 소용이 없다고! 바로 이 점을 예수께서는 지적하시기 위해서, 이 비유에서 사제∙레위를 등장시킵니다. 오늘 날 우리 자신도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성당에서는 기도를 바치고, 미사를 열심히 봉헌하지만, 이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에서 우리 실생활이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이 같은 반성은, 곧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줍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웃사랑”을 참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하나 등장시킵니다. 그런데 그는 사제, 레위 그리고 유대인도 아닙니다. 그는 사마리아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 땅에서는 나그네입니다. 먼 지방에 사는 사람입니다. 뿐더러 그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과는 아주 사이가 나빴습니다. 서로 원수같이 여겨지고, 민족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혼혈아처럼 여겨지고, 하느님도 믿지만 다른 이단도 믿고, 유대인들로부터 천시 당하는 사마리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같은 강도를 만난 자를 보고서, 아주 처절한 마음, 가엾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가 그를 위로하고, 치료해 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 데리고 여관에 데려가 간호하고, 그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의 돈을 주었습니다. 이틀 분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2만원에 해당됩니다. 그렇게 하고는 주인에게 말하기를 “만일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그것까지 갚아주겠으니, 잘 돌봐주십시오!”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 상처받은 사람에게 현재 뿐 아니라, 내일 모레까지, 그것을 내다보고 걱정하고 돌봐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이웃사랑”의 실천자를 사제, 레위, 유대인도 아닌, 하필이면 사마리아인을! 곧 나그네요, 먼 길을 여행하는 유대 땅에서 “이웃사랑을 실천한 자”로 등장시킵니다.




이 말씀은 곧,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참된 크리스천이 누구인지에 대한 시사요, 그 답니다. 아무리 성당에 다니다 하더라도, 신자, 사제, 수도자도 만일의 경우“이웃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에, 사랑을 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사제,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평신도 가운데서도 본당회장이나 사목위원이 아닐지라도, 또한 신자가 아닐지라도, 오히려 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을 많이 들을 수 있다는, 이러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이것을 어떻게, 하필이면 그 사마리아 사람! 사제도, 레위도, 유대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신자요, 사제요, 수도자라는 것은 헛되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반문하는 그런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신자로서의 신분, 사제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으로부터 귀한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아서,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 우리 처지를 자랑해도 좋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우리는 누구보다도 앞서,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만일“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신자 아닌 사람들보다도 못하다면, 더욱이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고 행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은 옛날 바리세이 사람과 같이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바울로 사도가 그랬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참으로 이웃사랑을 교회가 증거하고 있는가? 이렇게도 반성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부활하시어 오늘 우리 가운데 살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서로간의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늘 주장하는 교회의 쇄신, 특히 우리 교구의 목표인 “하느님 백성의 일치”는 바로 이 사랑 실천에 여하가 달렸습니다.




또한 앞으로 우리가 하는 우리의 발전인 선교 200주년기념도, 이 점을 떠나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록 200주년을 우리가 어떤 외적인 큰 행사를 할 수 없다 치더라도, 만일 우리 모두에서 한국교회 전체의 삶이 외적으로 이웃사랑이 충만되어 있다면, 우리 마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에게 열려있다면,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과 진정으로 고통을 나눌 줄 안다면, 그래서 모두 특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 종교나 자기신념에 관계없이 이 교회 안에서만은 사랑과 자비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이 교회에서만은 복을 받고 위로와 용기를 받을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이 교회가 선포한 복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면,—– 한 마디로 이 교회를 보고서 모든 이를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교회는 그것으로써 선교 200주년을 기념하고 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교회는 진실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 누룩이 될 수 있고, 땅에 소금이 되고, 또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 신자요, 이 땅에 그리스도교회인 우리의 사명은 “이웃사랑”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율법학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이 질문 장면도 중요합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은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비해, 예수님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반문했습니다.




이 두 가지 질문에서, 생각의 중심점이 다르고, 생각의 중심이 율법학자는 “나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인가?” 물음으로써, 나아가 내 자신이 생각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냐?”고 함으로써, 곤경에 처한 사람, 강도 만난 사람이 생각의 중심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있어서도 중심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사랑은 남을 중심으로 할 때 “참 사랑”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남을 위한 것이 못됩니다. 자신을 바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남이 중심적인 사랑은 진실로 헌신적이며, 봉사적이며, 몰아적입니다. 남을 위해서 자신을 조건 없이 내어 줍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율법학자는 이번에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잠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잠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인류 전체에 있어서도, 도대체 인간은 “원죄 이후” 강도를 만나서 상처를 입은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죄로 말미암아 좋은 것은 다 빼앗기고,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입니다. 사랑 없이는 구원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실존적으로 지닌 고독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삶의 고달픔, 그리고 죽음이 깃든 존재입니다.




누가 인간에게 이 깊은 상처와 죽음의 고해에서 건져줄 것인가?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일을 다른 모든 이가 외면해도,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신∙구약 성서전체가 말하는 내용은, 참으로 이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상처를 고치고, 그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이 하느님은 얼마나 자비를 베푸시는지! 말해주는 것이 성서입니다.




성서의 하느님은, 이 “인간에게 이웃이 되어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모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성서의 하느님은 이 인간의 친구가 되어주신 하느님이십니다. 뿐더러 하느님은 이 상처받은 인간을 보시고, 너무나 측은하게 생각하신 나머지, 바로 당신 자신이 혈육을 취하시어, 이 상처받은 인간과 같은 인간이 되시어, 세상 속에 인생과 역사 안에 깊숙이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상처받은 인간의 친구, 이웃사람이 아니라, 그 상처받은 인간의 형제이십니다. 뿐더러 더욱 깊이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이 “상처받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상처받은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배척받은, 버림받은 예수! 드디어 십자가에 못 박혀 참혹히 죽으신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마태 25,31-42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은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그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중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이고, 그 굶주린 사람, 헐벗은 사람, 그 병고 신음하는 사람, 그 옥고를 치르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나입니다. 이런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성체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믿음으로써, 가난과 굶주림, 병과 고통 중에 버림받고 배척받는 사람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또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도를 외면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누구도 감히 외면하고, 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누구인가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버리고서”라는 이 질문은,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를 버릴 것인가? 하느님을 버릴 것인가?”하는 이 질문입니다.




가난과 병고, 소외와 천시, 우는 이웃을 버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은 곧 하느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내가 내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웃사랑”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사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되지 않고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느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십니다. 바로 그분은 우리를 간호해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본디 우리를 당신 모습에 따라서 창조하셨고, 또 성자께서 그리스도 사람이 되시어 오시게 하시고, 오신 성자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은 사람, 하느님의 아들 딸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또 이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당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에제키엘서에서 말씀하고 있듯이,“우리의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빼어내어,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를 바꾸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 5,5에서,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신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성령을 받은 우리는, 우리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사랑해야 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랑의 실천”, 사도 바울로처럼,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려는 그 성령 안에 우리 마음을 열고, 그 성령의 뜻에 따릅시다!    ———–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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