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은 본래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하시는 분이신 데,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사람이 되어 오셨고, 복음선교를 하실 때에는 머리 둘 곳도 없을 만큼 청빈의 삶을 사셨으며, 이재 다시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인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가난과 고통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까? 가난과 고통이 좋은 것입니까? 성경에 보면 적어도 구약에서는 가난도 고통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일 수는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저주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 중에 누구도 이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난과 고통은 우리에게도 큰 불행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이 길을 가시는 것입니까?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이 길을 가신 근본적 이유는 우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고통으로 치유되고 구원된 인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있습니다. 그분의 생각, 그분의 마음, 그분의 말씀, 그분의 활동, 그분의 삶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이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없고, 완전히 남을 위한 존재,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당신을 남김없이 비울 수밖에 없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아낌없이 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더러 거기다가 우리의 잘못, 우리의 죄, 우리의 탓, 그 모든 것을 당신이 대신 지시는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기 위해 왔다”(마태 20,28)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끝날까지의 인류가 범한 모든 죄를 주님은 당신 두 어깨에 지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주님의 이 모습을 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ꡒ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이사 53,2-4). 그렇습니다. 이렇듯이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가 이어서 말한 대로 ꡒ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습니다”(이사 53,5).
고통받는 야훼의 종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불타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박해당하시고, 고독하신 그리스도 하느님의 침묵 속에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때 그토록 철저히 버림받으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믿고 의탁할 수 있는 형제이며 친구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또는 그 이상을 이미 다 겪으시고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치유되고 구원되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분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다 사하여주시고, 무죄 선언을 하였습니다(로마5,18참조).
이제 우리는 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삶도, 존재도 다 우리를 위해서 바치셨는데,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철두철미 이타적인데 우리는 철두철미 이기적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부하게 만들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가장 가난한 자 되셨는데(2고린 8,9) 우리는 남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뿐더러 우리는 청빈보다는 물질적 부를 추구하고 희생보다는 안락을 추구합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는데(마태 20,28), 우리는 정반대로 봉사하기보다 봉사받기를 원합니다.
사순절은 진실히 이런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황금만능의 가치관 전도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는 물론이요 교육계, 종교계까지 썩어가는 구조적 망국병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병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망국병이라는 표현 그대로 우리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다행히 새로 출범한 새정부는 이 망국병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 대통령은 이 병을 고치는 데에 모든 국민이 동참해주기를 촉구하면서, 국민 모두 함께 고통을 나누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것은 먼저 정직하고 성실하며 가진 것을 서로 나눌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계층과 지역간의 격차를 좁혀가면서, 국민 모두가 대화함으로 하나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솔선수범해야 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란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닳아야 합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와 함께 생각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행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기적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런 뜻으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라고 호소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곁에서 “목마르다” 탄식하는 예수
우리는 사순절을 뜻깊게 지내기 위해 매일 재를 지키며 고신극기를 할 수 있고, 또는 매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서 참으로 이웃 사랑을 사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 소외된 이웃,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의 형제 되어, 그들을 돕고 그들과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동시에 마음 상한 이웃이 있으면 서로 용서함으로써 화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같은 이웃 사랑 실천이 없으면 고신 극기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사도 바울로의 말씀대로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 13 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올해 사순절 담화문을 통하여, 실제로 물이 없어서 목타는 아프리카 대륙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에게 교회 구성원 모두 가 도움의 손길을 뻗치도록 호소하십니다. 그들 안에서 십자가상의 예수는 오늘도 “목마르다”(요한 19,28)라고 탄식하십니다. 우리는 교황님의 이 호소에 구체적으로 응답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이 날로 사막화되어 가고 있는 원인은 교황님이 이 담화문에서 지적하시듯이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산업개발과 기술 이용이 환경에 심대한 손상을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탓으로 “비옥하고 풍요로웠던 대지가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환경 오염의 문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합니다. 이 문제를 우리 역시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오늘의 아프리카의 문제는 바로 내일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목마르다”라고 탄식하는 이는 비단 사막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여러 모양으로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인정이 메마른 우리 사회에 사랑과 자비에 목말라 하는 이가 많습니다. 생명의 말씀, 삶의 참된 가치에 목말라 하는 이, 아직도 정의에 목타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의 목마름을 적셔줄 수 있습니까? 이는 교회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본당과 수도 단체들이 진실로 사귐과 섬김과 나눔으로, 지역사회 속에서 목말라 하는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 정의와 펑화의 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2000년대 복음화입니다. 그러면 그 샘터에서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목마른 이를 통하여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실 것입니다. 사순절에 여러분 모두에게 이같은 은혜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3. 1994년 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도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고를 고쳐주었구나”(7l사 53,5).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은 이처럼 상처 입으셨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은 상처 입으셨습니다. 이 상처는 참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의 의지가 되고 피난처가 됩니다. 우리는 죄 많은 인간들이고, 하느님 앞에 고개도 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위하여 상처 입은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느님 앞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은 이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에게 무죄 선언을 하십니다(2고린 5,21;로마 8,34; 1베드 2,24 참조).
즉 하느님은 이 예수님을 보시고 죄 많은 우리를 죄 없는 자로, 의인으로 판정하십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로마 3,25).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구하시러 당신 아들을 내놓으셨고, 그 아들 그리스도는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될 길 없는 우리, 영원히 죽음의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당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그 절망에서 구하여주십니다.
이렇게 상처 입은 예수님이 계시어,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비록 죄인일지라도”(로마 4,5) 언제나 용서받고 구원됩니다. 그분이 계셔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려졌습니다(로마 5,20). 이 얼마나 큰 위로요 기쁨이요 해방이요, 펑화입니까?
이제 이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은 2000년 전에 수난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현재의 나를 위해서 수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 내 안에서 나를 위해 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수난하시고 죽으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의 사순절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는 참으로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때문에 상처 입으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시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주님 친히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분을 위해서 말뿐이고
구체적으로는 아무 것도 드린 것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입니까?
셋째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정말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원수까지 용서하십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에 용서를 비셨습니다(루가 23,34).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복음화란 바로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이렇게 서로 진실히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더 나아가 평화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부터 이 용서와 사랑을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부부간에, 부모자식과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올해는 UN이 정한 가정의 해입니다. 가정은 우리 자신의 가장 기본적 삶의 터전이요, 생명과 사랑의 샘터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도덕과 윤리의 타락으로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가정에서 상처받고 있습니다. 피흘리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우리 가정이 다시 생명과 사랑의 샘터가 되고, 우리 자신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사랑을 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4. 1995년 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에서는 원수되어 있는 유다인과 이방인을 화해시켜 하나의 새 민족을 만드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에페 2,15-16).
그리스도는 이처럼 온 세계 모든 이가 인종, 피부색, 민족, 계급 등 모든 차이를 넘어서,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되고, 서로 형제 자매되어 사랑함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의 일치 속에 하나될 수 있도록, 당신을 온전히 희생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32). 교회는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사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가슴이 찔려 피와 물이 흘러내릴 때, 거기서 나왔습니다(교회헌장 4참조).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도처에 만연되어 있는 이기주의, 물질주의, 퇴폐풍조와 아울러 극단적 종교적 원리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찢어진 세계에는, 어느 때보다도, 상처의 치유와 모든 분쟁과 다툼의 종식과 평화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수난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분의 몸인 교회가 이 시대에 용서와 화해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교회는 사실 언제나 인류세계를 구하기 위한 십자가의 소명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우리 조국의 현실을 볼 때에 더욱 그렇습니다. 올해는 이른바 광복 50주년입니다. 광복의 기쁨,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그 기쁨을 다시 새기게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큰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올해는 또한 이 땅과 이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광복 50년의 기쁨보다 분단 50년의 슬픔과 아픔이 더 큽니다. 우리는 같은 핏줄, 같은 민족인데 왜 이렇게 서로 미움과 불신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까?
상식적으로는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비극이요 슬픔입니다.
그러기에 광복 50주년을 참으로 뜻깊게 기리기 위해서, 우리는 올해 어떤 일이 있어도 분단의 벽을 허무는 일에 착수하여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동족으로서 서로 미워하지 말고, 비방하지 말며, 서로 만나서 함께 펑화통일의 길을 모색하는 데 뜻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회, 종교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그 길을 모색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도 교회대로 평화통일의 길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모든 이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수난하신 주님의 그 수난을 깊이 본받고 사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되어 있는 유다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키고,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기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상에 제물로 바치셨듯이, 올해 우리 믿는 이들은 이 땅에서 같은 핏줄이요, 동족이면서 원수되어 있는 남과 북이 화해하고 하나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 이기주의를 버리고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 동포들은 연변을 통하여 우리 남쪽 사정을 나름대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변을 통해서 북한 동포들이 아는 남쪽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잘 살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나 물질주의, 이기주의에 빠져 있고, 과소비와 사치로 사람들이 타락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더러 인정이 메마르고 없는 이들, 약한 이들을 업신여기며 심지어 연변에서 온 동포들을 불법체류 등의 약점을 악용해 착취하고 학대하는 등, 비인간적인 짓을 예사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변에서 온 동포들을 우리와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한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인 인식밖에 가질 수 없는 북한 동포들이, 물질주의 이기주의로 타락한 남쪽과 평화통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반대로 이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물든 남한을 공산혁명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남북간에 왜 이렇게까지 대화의 길이 막혀 있는지, 왜 북의 체제가 극단적 폐쇄주의와 이로 말미암은 심각한 경제난,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지를 단편적으로나마 설명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현재와 같이 돈만 알고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한 우리가 바라는 평화통일을 결코 성취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통일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시기에 촉구하신 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물질보다는 인간을 존중할 줄 알고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 약한 이, 연변 동포들, 또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진실로 인간다운 인간이 될 때 이 소식이 또한 자연히 연변이나 기타 경로를 통해서 이북에 그대로 전달될 것입니다.
“남쪽의 우리 동포들은 잘 살 뿐 아니라, 그렇게 후덕하고, 동포애도 많고, 없는 이들과 고통을 나눌 줄 안단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동포들에게 왜 총을 겨누고 있어야 하는가?” “빨리 통일되어, 이런 동포들과 함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우리의 살 길이 아닌가?” 북한 동포들의 생각이 이렇게 변화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엄청난 통일의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통일의 길은 결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 곁에 그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바로 옆에 있는 가난한 형제, 고통받는 형제, 굻주리고 헐벗은 형제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 줄 알 때 거기 통일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가 마음 상한 이웃과 서로 화해하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손잡을 때 거기 통일의 길이 있습니다. 사실 남쪽에 사는 우리 모두가 진정 인간으로서 남을 존중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나눌 줄 안다면, 그것이 곧 통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며 통일의 힘입니다. 그럴 때에는 통일비용이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같은 인간존중과 이웃 사랑이 또한 세계화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정신적 바탕이 없는 세계화는, 일등만이 살아남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무서운 현상을 나타낼 것입니다.
“내가 너회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b).
주님은 죄 많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죄를 다 용서하여주시고 원수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습니다”(마태 8,17). 그분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아낌없이 주시고 또 주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이처럼 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 1996년 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1. 친해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금 주님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어, 당신과 함께 하느님 안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끔 수난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런 죄도 없이, 당신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인간들로부터 하느님을 모독한 죄, 백성을 선동한 죄 등, 여러가지 죄목으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채찍으로 치고 가시관을 씌워 조롱하면서 갖은 모욕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극악무도한 대죄인처럼 사형 언도를 받으신 그분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까지 고통의 길을 오르셨으며, 그 십자가에 못박혀 참혹하게 죽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렇듯이 모욕과 고통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2.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입니다.
시몬느 베이유(Simony Weil)의 말대로, 예수님은 이같은 죽음을 결코 영웅적으로 위풍 당당하게 맞이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악인들 중의 하나로 몰렸다”는 예언 말씀대로, 두 강도와 같이 못박혀 죽으셨습니다(루가 22,37).
이사야는 이 야훼의 종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고, 인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 이런 일을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 본 사람도 없다”(이사 52,14-15). 주님이 겪으신 수난과 십자가 죽음은, 참으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치욕의 극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수난과 죽음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 스스로 “내 마음이 죽기까지 괴롭다”(마르 14,34)고 고통을 실토하셨습니다. 또한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너무나 괴로워 피땀을 흘리셨고(루가 22,44),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가 22,42)라고 간절히 빌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로부터는 아무런 답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홀로 버려졌습니다.
참으로 성경 말씀대로 “때는 밤이었습니다”(요한 13,30). 감옥이든 죽음이든 선생님과 함께라면 무멋이든지 달게 받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와 제자들도 주님을 모른다며 배반하고, 도
망쳤습니다. 너무나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무서운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1고린 1,23)라고 사도 바울로는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이방인들만이 아닌 오늘의 우리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3. 왜 하느님이 하필이면 이 치욕적인 십자가,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우리의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1,24)라고 설파하였습니다. 어떻게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오고, 하느님의 힘과 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우리는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답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주님 친히 말씀하신 그 가장 큰 사랑만이 죄로써 붉게 물든 인간의 마음을 회개시킬 수 있고,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참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이 사랑을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이제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이치를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뿐더러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었을 때 그분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마르 8,3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잃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5참조). 이런 이치의 말씀은 복음에서 거듭 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떠난 제자의 길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주님의 제자됨에 있어서 필수 요건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안이한 생활에 젖은 나머지 십자가가 우리 구원의 길이요, 주님을 본받
고 따르는 길임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고통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어려운 일을 피하고, 편히 살고싶어 하며,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를 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떠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절대로 따를 수 없고, 본받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십자가 없는 인생이 없고,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이 가장 먼저 외친 말씀이오(루가 3,3), 예수님 또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마태 4,17). 우리는 진정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하신 주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주님, 그 주님의 사
랑을 깊이 깨달음으로써 회개히여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나를 구하시고자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
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 이 병고를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불치병으로 죽음의 고통을 겪은 한 젊은이가 남긴 말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젊은이의 이 말은 바로 우리의 말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역시 사도 바울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 6,14)라는 인식 아래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6. 사순절 메시지 (1997년)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심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악인들의 손에 넘겨져 참혹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이미 말하였듯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1고린 1,23). 뿐더러 십자가는 본래 살인 강도, 반역자 등 극악무도한 대죄인들을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그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요, “치욕”입니다(히브 12,2: 13,13)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거룩하신 분이, 한 인간으로서도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그 고통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극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사야가 ‘야훼의 종’에 대해 예언한 바대로 온갖 모욕과 학대로 수난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모습은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갈 만큼”,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다”(이사 53, 2-4 참조)고 말할 만큼 참혹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사람들로부터는 멸시와 조롱 속에 버림받았고, 더하여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도 절대적 침묵 속에 버림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하신 그 예수님, 언제나 벗과 형제로 모든 이를 사랑하실 만큼 겸손하고 착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이렇듯이 배척과 고독 속에 버림받아야 하였습니까? 우리 구원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이 필요하였다는 것입니까? 아무튼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습니다”(이사 53, 4).
2. 당신이 겪으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고통이 이렇듯이 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생전에 세 번이나 예언하였습니다(마태 16,21, 17,22-23: 20.18 등 공관복음참조). 그러나 시몬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은 이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자신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그 스승이, 치욕적인 십자가형 죽음을 당하신다는 자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마71 16,22)라며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마태 16,23).
하지만 제자들은 끝내 스승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주님이 수난하실 때 주님이 예언한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고, 베드로는 자신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마태 26,69-74) .
이렇게 십자가는 제자들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 뜻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의 필요성을 높이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유다인들 특히 대사제나 율법학자 등 바리사이파들의 미움 때문이었으나, 예수님 친히 당신이 십자가 죽음을 거듭 예언하신 것, 또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시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시며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신 것”을 보면(루가 24,26-27)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데는, 하느님의 섭리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일” 이었습니다.
3.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1고린 15.3)고 말합니다. 뿐더러 그는 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깊이 묵상한 나머지, 여기에 하느님의 깊은 뜻과 지혜가 있다고 믿고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1고린 2.2)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일편단심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랐으며, 그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1고린 1,23).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유다인, 그리스인 할 것 없이 모든 이의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1,24).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한 마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의 죄를 당신이 대신 지시고, 당신 자신을 속지의 제물로 십자가에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 죄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로마 5,6).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무죄 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2고린 21).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우리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페 319)을 깊이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바로 그 가장 큰사랑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을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못났고, 죄많은 존재들입니다. 뿐더러 주님은 나의 못남, 나의 죄, 나의 모든 것을 다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1고린 13,7) 그 사랑이 우리에 대한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은 실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는 어떤 고통도 어떤 박해나 치욕과 죽음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수난은 우리에게 이 말씀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사람이 되어 오시고 상처 입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 베르나르도가 말씀한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해줄 수 없는 죽음으로 이끄는 그런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 죄는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 모든 죄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이 사순절에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드러나는 이 사랑을 참으로 깊이 묵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회개를 요구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실로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며,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는데, 우리는 이 주님을 지금까지 어떻게 대하였는지 깊이 반성하고 지금까지의 배은망덕을 뉘우치는 회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우리 역시 주님의 제자되기 위하여는 주님 스스로 거듭 말씀하였듯이, 우리 자신을 끊고 매일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을 아울러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히 그리스도께로 회개하고 그분의 뒤를 따름으로, 그분을 닳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미 잘 아시는 바대로 올해 1997년은 교황 성하께서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성자 그리스도께 봉헌한 해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이심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마음 깊이 새기며 그분의 뒤를 따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상의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간곡히 부탁하십니다.
이같은 회개와 사랑의 실천은 우리 자신을 구할 뿐 아니라 우리 이웃과 우리 사회, 우리나라를 구하고 세계를 구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가치관 부재와 도덕의 타락 속에 정치 경제적으로 너무나 혼미에 빠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는 현재의 혼미와 타락에서 구원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 때,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나라와 겨레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분 아니라 속죄의 십자가를 지고 갈 줄 알 때, 그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큰 빛, 희망의 빛이 되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누룩이 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생명의 힘이 될 것입니다.
7. 1998년 사순절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다시 주님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시어, 수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수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며, 또한 이를 오늘 우리 자신의 삶 속에 구체화시키는 것이 이 시기의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른바 IMF의 구제금융 없이는, 나라 전체가 부도를 내고 도산을 면치 못하는 참으로 엄청난 총체적 경제난국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자체의 힘만으로는 1,5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정부도 기업도 노동자도 가정도 마치 부자인 양 착각하고, 너무나 부실했던 탓으로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큰 시련을 겪고 있고, 그 중에서도 많은 중소기업이 부도를 내고 쓰러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어떻게 살면 좋을지 모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실망과 좌절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는 정신 아래 우리의 삶을 깊이 반성하고, 국민의 힘을 합하여 경제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이 난국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나라 살리는 정신이, 국민 운동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나라 살리기 금모으기’는 좋은 예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위아래 없이 공동체 의식에 눈을 뜨고, 서로 위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분담하고, 가진 것도 나누는 애국애족심입니다. 바로 이웃사랑 실천입니다.
그 때문에 사순절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 사랑의 극치인 그분의 수난의 의미는 어느 때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도 깨닫지 못합니다. ‘왜 하필 내가 이 고통을, 이 병고를, 이 불행을 겪어야 하느냐?’고 묻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왜 하느님의 아들되시고 죄없으신 그리스도가 악당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참혹히 처형되어야 하였는지, 하느님은 왜 이것을 막지 않으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알아듣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당신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함을 거듭 예언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1,23-24)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참혹히 처형된 그리스도가, 아무것도 몸에 걸친 것 없을 뿐 아니라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고,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는”(이사 52,14),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마저 빼앗긴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힘이 되며, 하느님의 지혜란 말입니까? 우리가 이 사순절에 이것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깨달을 수 있다면, 진정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고, 세상의 잣대로 잴 때,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비극 자체입니다 그 이상의 불행, 그 이상의 패배, 그 이상의 고통이 있을 수 없고, 그것은 곧 죽음과 암혹과 절망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로는 – 한때는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바울로가 – 하느님의 힘이요, 하느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뿐더러 바울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1고
린 2,2)고 말할 만큼,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였고, 그분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목숨바쳐 전하였습니다. 바울로에게 있어서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십자가 없는 복음도 구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 3,8-10)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로는 결국, 그리스도처럼 자기도 같은 고난을 나누고, 같이 죽는 것을 가장 소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고 영원히 사는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죽음을 이긴 생명, 불사불멸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의 힘과 지식, 지혜, 기술 등 온 세상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능력,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고, 그 아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인간의 상상과 지식을 초월하는 절대적이요 조건없는 사랑, 우리를 가이없이 사랑하시는 이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5).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힘이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이 힘과 지혜는 오늘 우리들이 당면한 문제, 곧 총체적 난국으로부터 나라를 구해내는 데 있어서도 참으로 힘이요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때에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욕심을 따르기 쉽고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재기와 매점매석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 다수가 이렇게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빠진다면, 이 나라는 망하고 이기주의에 빠진 국민 자신도 망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고 나라를 살릴 길은 국민 모두가 이미 서두에 언급한 대로 같은 운명 공동체임을 깨닫고, 모두가 서로를 위하고 고통을 분담할 줄 알며 가진 것도 내놓을 줄 아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그 정신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이렇게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웃 사랑, 나라 사랑을 할 줄 안다면 우리는 기필코 이 난국을 극복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더욱 아름답고 빛나는 나라로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힘과 지혜는 나라를 구하는 데도 최선의 길입니다.
성령의 해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이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체험하고,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