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한 여인 (요한 8,2-11)

 

간음한 여인 (요한 8,2-11)


                                                                     강요셉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모든 죄는 세례를 통하여 사해진다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죄들, 즉 우상 숭배, 불경죄, 살인, 간음, 거짓 증언, 사기와 같은 큰 죄들은 다시 용서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교회  안에서는 조금씩 더 큰 죄목들이 사해지고 있었으나 죄가 크냐 작으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특히 간음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러한 전반 적인 분위기가  2-3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예수님 당시의 완고한 유다인들에게 이 사건은 얼마나 커다란 스캔들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 경내에서 가르치실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신명기 9장 15절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의 목격자가 있어야 하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여인을 데려와서 예수님께 이 죄인을 다룰 가장 적절한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그들의 이 질문은 하나의 함정이고, 이 상황을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한 또 다른 방법과 기회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복음은 잘못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일치의 부재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느님의 마음과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죄지은 사람을 돕고,  용서해 주고 또 그들에게 정직과 정의 그리고 사랑을 되찾도록 서로  도와주기 위해 그들을 만난다면, 그러한 만남은 결코 이미 저지른 잘못에 대한 확인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인간의 나약성과 인간이기 때문에 받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쁜 표양을 보여 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을 죄 없는 사람으로 여겨 주시길 원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여인에 대한 처분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인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씨를 쓰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과 부정직과 남을 생각해 줄 모르는 못된 생각을 경멸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하였던지, 아니면 그들의 교활한 함정에 동요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듯 합니다.




그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을 하는 대신 예수님은 그들이 정곡을 찌르는 말을 던지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절대적인 원리 원칙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이 지상의 어떤 사람이든지 판단을 할 수 없고, 또한 어떤 범죄자에게도 그에 마땅한 벌을 줄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도전은 특정한 상황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사실 율법이나 간음한 여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잠시의 동요가 있고 난 후 예수님의 말씀이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렸다.”  이제는 예수님과 여인 그들 둘만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 앞에 그분의  피조물이 하느님의 자녀가 될 희망에 마주서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비록 자기 생활의 비밀과 모든 과거를 알고 계신 참되고 유일한 재판관 앞에 서 있으면서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스승이 자신을 구원하려고 거기에 계신다고 느끼며 진정한 참회의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여전히 사랑해 준다고 느낄 때, 자기 죄의 부조화를 더욱 쉽게 느끼게 되며 그렇게  큰 사랑을 보여 준 사람을 결코  떠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녀의 내적인 강한 빛이 그녀에게 어디에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참된 기쁨으로 이끄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여 줍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기의 모든 죄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참회한다면 하느님 품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의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또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악에 대한 슬픈 경험에서 우리가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롭고 부드러운 손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하시는 음성을  듣습니까. 바로 이 말씀이 하느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의 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의 제자가 그를 찾아와 스승에게 점잖게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악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은 나지!” 빌라도나 가리옷 사람 유다스 쯤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자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선생님 같은 위대한 수도자가 악한 사람입니까?” 프란치스꼬는 젊은 제자에게 차근차근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에게서 가장  많은 은총을 받았다네. 아마 모르긴 해도 열 사람이 받을 은혜를 혼자서 받았을 거야.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이 모양 아닌가? 만약 내가 받은 은총을 열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면 열 사람이 뭐가 되어도 되었을 텐데 ……”




프란치스꼬의 이 겸손에 찬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이 복음에서 나오는 한 사람의 죄인을 고발하는 의인임을 자칭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거룩하고 깨끗한 예수님께서도 지극한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는데,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오만한 자세로 남에게 군림하려 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서 약한 이들의 약점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성화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과 사랑을 나누어주었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용감하고  기쁘게 선포하였는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내 자신이 거룩하지 못하고 늘  하느님 은총을 저버리는 생활 속에 빠져 있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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