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의 끈기 : 그리스도의 비유 (루가 18,18)
강종명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 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한 과부가 찾아온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관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을 드린 결과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과부의 소원대로 판결을 내리게 된다. 그러면서 고약한 재판관도 들어 줄 때가 있는데 백성의 소리를 하느님이 외면한 채 버려 둘 리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기도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다.
“너희 중 한사람에게 어떤 친구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밤중에 그 친구를 찾아가서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주게…’하고 사정한다면. 그 친구는 안에서 ‘귀찮게 굴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 없네’하고 거절할 것이다”. “잘 들어라. 이렇게 우정만으로는 일어나서 빵을 내어 주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겠느냐?” (루가11,5-8).
예수께서는 이웃에게 계속 청하면 항상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우정으로써가 아니라면 귀찮아서라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기도에 대하여 분명히 가르치시는 것은 항구히 기도하라는 것이다. 청한 것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항구하게 청하라는 것이다.
이웃과의 우정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면 하물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야 더욱 더 그러하시지 않겠는가? 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11,11-13).
만약 급할 때만 응급처치 식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기도에 대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도는 타이어가 펑크 날 때 바꾸기 위해 준비해 둔 타이어가 아니라, 차 전체와 같고 생활 자체 바로 그것이다. 기도 없이 생활 할 수 없을 만큼 기도의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즉 모든 인생의 길에서 하느님과 같이 걷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멈춘다면 보통 하느님께서도 멈추시거나 나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멈추는 것처럼 하신다. 그리고 내가 다시 출발한다면 그분께서도 다시 출발하신다.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먹고 마시고 잠을 자야 하는 육신의 법칙과도 같이 나의 일과 안에 체계적으로 기도를 위해 많은 시간을 내고 가능한 일정한 시간을 갖기를 결정한다면 기도의 습관이 내 자신 안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생의 이 필요성에 하루도 빠짐없이 응하듯 이 기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비록 우리의 긴급한 요구가 단번에 해결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함을 깨닫게 하시려고 과부의 비유를 사용했다. 우리의 기도가 모두 응답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할 때 우리는 아마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과부가 했던 것처럼 귀찮게 졸라댄다면, 우리의 신앙은 겨자씨처럼 자라나서 풍부한 수확을 걷을 것이다
과부의 끈기 : 그리스도의 비유
한정수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은 한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재판관의 비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비유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정답은 1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올리는데 그 기도가 잘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다고 종종 이야기하곤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조급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사실 그대로 교만하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행실이 좋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재판관에게 소송을 걸어 올바른 판결을 받아내려면 아마도 돈이 많은 부자이거나 힘과 권력을 앞세우는 세도가가 아니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고 뇌물을 바칠만한 돈도 없는 한 과부가 이 재판관으로부터 정의의 판결을 받아냅니다.
어떻게 받아냈습니까? 그야말로 끈질기게 재판관을 귀찮게 졸라서 자신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비유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그렇게 졸라대면 그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어떻게 당신 자녀들이 밤낮 부르짖는데, 그저 외면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원한을 즉각적으로 들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과부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성서 곳곳에서 늘 홀로 산에 올라가셔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위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에게는 없었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이요 생명이며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과연 얼마나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대화하며 기도하고 있는지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하겠고 또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 일상의 분주함과 잡다함 그리고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함 속의 내적, 외적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성서를 통하여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되고 또한 기도를 통하여 그분을 만나게 되고 그러한 만남 가운데 우리가 정말로 필요한 것을 주님께 청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자비로우시고 선하시고 전지전능하며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주님께서 여러분들이 올리는 그 모든 기도를 틀림없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성서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고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났던 그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체험하며 참 기쁨과 구원의 환희를 노래하고 고백하였으며, 그 하느님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쳤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와 성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한 ‘자니’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건강했던 자니는 1967년 7월 30일, 다이빙을 하다 실수해서 머리와 목을 제외한 온 몸의 감각이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승마와 수영을 즐기고, 발랄하던 17세의 그녀가 불과 몇 초 사이에 전신불구자가 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코를 풀 수도 없는 처절한 상황에서 그녀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애원도 해 보았으나 끝내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죽고 싶었지만 자기 손으로 죽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갈등 속에서 7년을 지내는 동안 마침내 성서에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우리의 환경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든, 하느님은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그녀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붓을 입에 물어서 그림을 그리며 많은 젊은이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고통과 슬픔으로 범벅된 삶 속에서 새로운 삶에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성서 안에서 만난 하느님이었습니다. 자니는 성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써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되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증언하고 삶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40년이라는 광야의 생활이 필요했습니다. 왜 바로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고 40년이라는 기나긴 여정이 필요하였을까요? 아무래도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화의 시간이 요구되었던 것 같습니다. 에집트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이방 신들에게 우상숭배하고 이방문화에 물들어 있는 그 모든 더러운 때를 벗어버리는 정화의 시간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하느님께 기도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물들은 내 자신을 정화시키기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정화는 바로 세상 것을 끊음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우리모두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이 기도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먼저 저녁시간에 TV보는 시간을 30분이라도 줄이고 가능하면 가족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여러분들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를 사랑의 주님께서는 빠짐없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에 등장하는 한 과부와도 같이 항상 우리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주님의 구원의 초대에 성실히 응답하여 한평생 기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과부의 끈기 : 그리스도의 비유 (루가 18,1-8)
김동수
루가 복음서는 주님의 재림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구원의 때임을 설명하는 이른바 종말론에 대한 예수의 첫 번째 가르침을 서술한 다음(17,20-37), 두 가지 비유를 들면서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신다. 그 하나는 지금 설명하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18,1-8)와 곧이어 두 번째 비유인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18,9-14)이다. 이 비유는 신자들, 즉 뽑힌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꼭 올바로 판단을 내리시어 구원해 주실 것이고, 다만 그 때까지 좌절하지 말고 끈기 있게 기도하라는 교훈을 준다.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는 한 사회의 명예를 유지하는 판관인 동시에 도시 법정에 근무하는 엘리트 판사이다. 당시 법정의 통상적인 심리는 판사 세 명이 합의제로 이루어지지만 로마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치안 문제나 민사상의 문제들은 지역주민들의 자율적인 통제에 맡겼다.
따라서 팔레스티나에는 두 가지 법정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곧 종교적이 법정과 세속적인 법정이다. 유다인끼리의 소송은 주로 종교법정에서, 이방인과 유다인들이 얽힌 소송 문제는 주로 세속 법정에서 심리하였다. 과부에게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부탁 받은 재판관은 비록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경건한 자였지만 세속 법정이 아니라 종교 법정에 속한 판사로 보인다.
같은 도시에 어떤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똑같은 청원을 가지고 재판관 앞에 한번만 간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갔다. 그녀는 이 불의한 재판관에 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하며 졸라댔다.(3절)
고대 근동 사회에서 과부는 힘없는 자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착취의 대상이었다. 구약성서는 이를 폭넓게 증언한다(이사 1,16-17; 시편 94, 1-7; 욥 22,9-11). 예수께서도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에 대해 언급하신다(마르 12,40 = 루가 20,46-47). 그렇다면 과부가 올바로 처리해 달라는 사안은 무엇인가?
비유에는 분명한 설명이 없지만 재산 문제와 관련된 것 같다. 당시 권위 있는 판관은 특히 재산권의 침해와 관련하여 단독으로 사건을 처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남편을 여윈 아내는 자신과 아이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상속재산을 차지하는 것이 마땅하나 이런 조건이 그대로 이해되는 예가 드물었고 남편의 형제들이나 친척 등에게 상속재산을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는 수가 많았다. 당시는 극빈자를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없기에 자신의 생계유지를 할 힘도 없으며 굶어죽는 상황뿐인 것이다.
또한, 과부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통상적인 뇌물을 바칠 여유도 없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는 육탄공격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문제의 해결을 끊임없이 호소한다. 과부가 호소하는 말투도 무례하기 짝이 없다. 재판관에 대한 존칭도 생략하고 아첨하거나 자신을 낮추는 표현도 없다. 그녀의 절박한 처지가 그녀로 하여금 일반 상식을 뛰어넘게 한 것이다.
이런 과부의 청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은 이를 오랫동안 묵살한다. 만일 그녀의 청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고 세인들에게 보다 큰 존경을 얻을 것이나 그 고약한 재판관은 이미 하느님을 경외하거나 사람을 존중하기 포기한 자이기에 세인의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부의 청을 계속 외면한 것이다. 하지만, 재판관의 독백,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는 지금까지의 상황의 전환점이 된다. 여기서 ‘못 견디게 굴다’라는 말을 원문대로 보면 ‘눈 밑을 때린다’. ‘때려눕히다’라는 뜻을 가진 권투용어이다. 즉, 가난하고 가장 힘없는 계층인 과부에게 완전히 당할까봐 두려워 백기를 들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마치면서 재판관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나서 비유가 부각시키려는 메시지를 밝히신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7-8a절)
비유를 듣는 청중의 기대는 재판관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뜻에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거나, 끝까지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아 천벌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청중의 기대는 어긋난다.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어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부의 끈기에 재판관이 두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은 이런 불의한 재판관에 정의로운 하느님을 대비시켜 파렴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기에 손을 드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 자신이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보호하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어찌 거부하겠느냐?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또한 오랫동안 청을 하게끔 하는 불의한 재판관과 달리 지체 없이 백성의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그리고, 8절 후반부,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라는 질문은 초대 교회가 이 비유를 17,20-37의 종말론적 담화에 연결시키기 위해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초대 교회 공동체가 임박한 예수의 재림 앞에서 지녀야할 한결같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유의 본질인 끈기 있는 청원은 바로 이 믿음을 얻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아차리게 하려고 이 귀찮게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그분 앞에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 손이 비어있음을 보여드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확신과 신뢰에 차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청하면 그분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그것도 고약한 재판관처럼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체없이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언제나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끊임없이 간청하면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정말 참인가? 그렇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즉,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때는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이 전제가 되며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청해야 할 것이다(1요한 3,22; 5,14).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은 우리의 간청을 물리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청해도 받지 못합니다. 그 까닭은 여러분은 쾌락을 탐닉하려고 잘못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