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의 헌금 (마르 12,41-44)
안융
강조점 :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 인간을 위해 내어 놓으셨듯이 우리도 진정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
이따금씩 신문이나 T.V.화면을 통해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한 사람들의 기사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의 평소 삶의 모습을 읽게 되죠. ‘검소하게 살고, 늘 절약하며 자신에게는 인색할 정도의 절제를 보였던 삶이 마치도 최대 공약수처럼 두드러져 나오는…. 그렇게 아끼며 모았던 모든 재산을 아무 거리낌없이 훌쩍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어놓는 그 용기와 관대한 마음에 찬사를 보냄과 동시에 그 분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흉내내보고 싶은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 4장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 우리는 그녀가 바친 보잘 것 없는 헌금을 통해 진정한 봉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성서에서 그녀는 단지 동전 두 개를 가진 과부였다고 소개되고 있고, 이것이 그녀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동전 두 닢.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 돈, 그러나 가난한 과부에게는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돈. 예루살렘 성전의 헌금함에다 이 과부가 동전 두 개를 넣었을 때 찰랑하는 소리도 별로 못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한다”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이 과부는 조용히 제 할 일만을 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이 헌금함에다 동전을 넣는 것을 주시하면서, 헌금함의 반대편에 앉아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많은 돈을 가지고 와서 자랑스럽게 보라는 듯이 헌금궤에 넣고 갑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과부 한 사람이 성전에 들어와 동전 두 닢을 넣고 갑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을 지켜보시던 예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더욱 값지게 여기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과부의 몸으로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어쩌면 자신의 전 재산일수도 있는 동전 두 닢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을 예수께서 읽으신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경제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할 때, 그녀의 동전 두 닢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가볍게 보시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과부가 봉헌한 지극히 조그마한 헌금의 윤리적 가치를 그녀가 치른 엄청난 희생으로 계산하신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헌금을 통해서나마 자기자신을 하느님께 송두리째 바친 그녀의 마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녀는 아무런 가식도 허세도 없이 있는 그대로 전부를 바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신뢰하고, 온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여기서 잠시 요한 3,16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거기에서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간단하지만 아름다운 찬미가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는 내용의 이 성서 말씀을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연결시켜 볼 때, 우리는 진정한 봉헌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외아드님을 십자가의 번제물로 희생하시면서 까지 인간을 죄의 수렁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 하느님의 인간을 위한 희생이 얼마만큼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인지를 가르치시고자 하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다운 봉헌과 희생을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가르치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치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헌금궤에 넣은 것처럼.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체험한 우리들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어떤 삶의 자세가 진정한 신앙인의 삶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자신이 지닌 모든 것- 재능, 지식, 재산, 시간 등 -이 하느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이를 자신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먼 훗날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생을 통해 무엇을, 얼마만큼 바쳤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어떠한 상태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바쳤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바칩시다. 그러나 적게 바치든, 많이 바치든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칩시다. 그때라야 우리들의 봉헌의 의미가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과부의 동전 (루가 21,1-4)
최용혁
복음은 한 과부가 헌금함에 동전 두 닢을 넣는 장면을 아주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이 바라보시면서 과부의 행업을 칭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과부가 어떤 상태에 처한 여인인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동전 두 닢이 전 재산일 만큼 가난하다는 것밖에. 그녀가 어떻게 남편을 잃게 되었는지, 자녀는 몇을 두었는지, 그녀의 직업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과부에 대한 처사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타민족에게 종살이하는 사람,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보호해 주라(신명 24,14-18)는 규정이 있을 만큼 구약시대의 과부는 핍박받는 이, 소외당한 이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의 인권도 제대로 인정되지 않던 시기에 남편을 잃은 여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율법학자들을 경고하실 때 특별히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씀을 하시고(루가 20,47),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들어 과부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하기 쉬운지 보여 주십니다.
과부가 이토록 억눌린 삶을 살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남자만이 인정받는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하여 남편의 보호를 받는 부속물쯤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과부는 자신을 보호해줄 남편을 잃은 사람으로서 대사회적인 위치에서 방패막이 없었으므로 누가 과부에게 해코지를 하여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부가, 그것도 아주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봉헌했습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만큼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 대전에 나와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내 것을 포기하지 못해 끈덕지게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니까 말이지요. 부제인 저도 하느님께 제 삶을 봉헌했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내 시간을 투자하기 아까워하고, 내 돈을 나누기 싫어하고, 공동체를 위해 내 노력과 전심을 기울이기보다 내 취미 생활에 안주하기 좋아합니다. 여러분을 어떻습니까?
데이빗 리빙스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련된 것만을 소유하려 한다. 내가 가진 것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이익이 된다면 그분의 영광을 위해 계속 지닐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즉시 포기할 것이다.”
한 재미교포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미국인 회계사였는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일체의 금전 출납을 남편이 도맡아 했습니다. 하루는 남편의 운전기사가 그만 두게 되었는데 유리안나라 하는 그 여인은 자신이 기사 노릇을 할 테니 운전 기사의 봉급을 자기에게 달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찬성했고 매월 사백 달러의 봉급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낯선 이국 땅에서 돈을 쓰기가 어려웠던 유리안나는 자신의 서랍 속에 차곡차곡 돈을 모았습니다. 한 번은 돈을 쓰려고 보석상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마음이 크게 동하지 않아 포기했고 오히려 서랍 속에 있는 돈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는 ‘돈은 악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영세 교리를 가르치던 한국의 수녀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강원도 어느 시골에 작은 본당이 하나 있는데 교우들은 너무 가난해 비가 새는 성당을 수리하지도 못할 형편이랍니다. 그 본당의 신부님은 산너머의 공소를 자전거를 타고서 힘겹게 다니시곤 하는데 혹시 여유가 있다면 그 신부님께 허름한 중고차라도 하나 사줄 수 없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유리안나는 서랍 속에 수북히 쌓인 돈을 보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이국 땅에 와 유일하게 재미를 붙여 본 운전 기사 일로 돈을 번 것이었는데 과연 내어줄 수 있겠느냐고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녀는 사흘 밤낮을 고민하다 나흘째 되는 날 드디어 백 달러 짜리 뭉칫돈을 남편에게 내주며 한국을 송금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를 보며 남편은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위대하다. 한국 여성은 용감하고 위대하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사랑하지요? 그 사랑이 불로 여러분 자신을 태워버리십시오. 그러면 조금씩 내 시간, 내 재산, 내 에너지를 주님을 위해 봉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