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와 룻
김현규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는 구약에서 전해오는 아름다운 고부간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아직 이스라엘 왕국이 건설되기 전 판관시대말기에 백성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몹시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그 때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가서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모압 땅에서의 생활 중 생활고에 지쳐 그만 객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두 아들을 키운 나오미는 모압 여성인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들들이 차례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나오미는 늙은 나이에 과부로 지내야 하는 두 며느리를 거느려야했습니다.
그 무렵 베들레헴이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는 며느리에게는 새 남편을 맞아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시어머니의 배려에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나오미를 혼자 내버려둘 수 없어 시어머니와 동행하고자 하였습니다. 룻기 1장 16-17절에 나오는 룻의 노래는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들레헴에 돌아 온 그들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보아즈의 밭에 가서 추수 후에 떨어진 이식을 줍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안 보아즈가 그의 하인들에게 보릿단에서 일부러 이삭을 빼내어 저 여인의 앞에 흘려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래서 룻은 이삭을 넉넉히 주울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안 나오미는 룻과 보아즈를 결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보아즈는 시아버지인 엘리멜렉의 사촌인지라 아주 늙고 병약하였습니다.
그래서 늙은 보아즈의 침실에 들라는 시어머니의 명을 거역할 수도 있었겠지만 룻은 즉시 시어머니의 명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때 보아즈가 룻에게 말하였습니다. 돈이야 있든 없든 젊은 남자를 좋아할 법한데 네가 시어머니에게 이렇듯 효성을 다하니 내가 너를 맡아 주마. 그리고는 다음날 마을 어른들 앞에서 나오미의 남은 밭은 사들이고 룻을 아내로 맞아 고인의 이름이 세상에 길이 전해지도록 그 대를 이어줄 자식을 낳게 해주어야 한다고 밝힌 후 보아즈는 룻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이 모든 절차는 며느리를 사랑한 시어머니 나오미와 시어머니를 사랑한 며느리 룻에게 하늘이 내리신 섭리요 은총이요 축복이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님께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이 나오미와 룻처럼 깊은 사랑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아울러 사랑이 지닌 참된 가치, 참된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현실 속에서 볼 때 인간은 자신의 실패에 늘 실망하면서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존재이며 넘치는 현재의 안전 조치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며 대중 속에서 고독해 하며 차분히 침잠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평화를 염원하면서도 내적인 보챔, 즉 수많은 현실적 욕망에 시달림을 받는 존재이며, 자신과 진정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상호간에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화해하지 못하는 모순된 존재이기도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하며, 또한 인간은 현실 속에서 자신을 일회적으로 고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은 인간다운 성장과 성숙을 추구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로이 선택하시며 충만한 약속을 선물로써 선사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 시작하고 행동해야 하는 과제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적 원리로서의 회개와 외적 원리로서의 사랑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삶은 삶의 현재 조건에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구현시키는 구체적 실재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인격자로서 존중받지 못했으며 사랑을 체험하지도 못한 사람에게 죽음을 극복한 새생명으로서의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라고 말할 수 는 없습니다.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은 현세에서 참으로 순수한 사랑, 몰아적 사랑을 체험함으로써만이 가능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닌 능동적 감정입니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닌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손쉽게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의 투신과 노력을 기울인 수습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타인과 일치를 이룹니다. 주는 것을 향해 있으며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생명력을 건네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모두를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케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나무로 자라듯이 우리의 신앙도 사랑을 통해서 성숙해야만 합니다. 이 정도면 내가 할 일을 다했다고 나름대로의 만족과 위로를 찾을 때, 그리고 더 이상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거기서 그냥 머무르거나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거기에 바로 신앙인의 고뇌가 있으며 신앙인의 아름다움이 함께 있습니다. 거기에 바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을 맞아들이며 그 분 안에서 사랑을 가꾸어 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그릇되지 않도록 올바로 이끌어 달라고 동방박사를 인도하던 그 빛을 우리에게도 비추어 달라고 기도 드립시다.
나오미와 룻 (룻 1-4장)
김동희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 축일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만, 특별히 오늘은 구약성서 룻기에 나오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의 이야기를 통해 고부간의 문제를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건설되기 이전인 판관시대 말기에 백성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늘 고달팠습니다. 그때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마흘론과 길룐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엘리멜렉에게는 보아즈라는 부유한 사촌 형제가 있었지만 그는 보아즈에게 신세를 지느니 이방의 나라에 가서 살 길을 개척해 보리라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달픈 나그네살이에 지쳐 엘리멜렉은 그만 모압 땅에서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어린 두 아들을 혼자 키운 나오미는 모압 여자인 룻과 오르바를 며느리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아들 마흘론과 길룐도 아비를 따라 죽게 되어, 청상으로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제 청상의 두 며느리를 또 거느려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야훼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베들레헴 지방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모압 시골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에 돌아갈 결심을 하고는 두 며느리에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새 남편을 맞아 다시 결혼하라고 타일렀습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서로 끌어안고 통곡하였습니다. 시어머니의 극진한 배려에 감동하여 작은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큰며느리 룻은 천하에 의지할 곳 없는 시어머니 혼자 먼 길을 떠나게 할 수 없다며 나오미에게 극구 동행을 청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머님과 함께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죽기 전에는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때는 보리를 거두어들일 무렵이었습니다.
룻은 밭에 나가 추수 후에 떨어진 이삭을 줍게 해달라고 나오미에게 청하였습니다. 시어머니의 허락으로 룻은 밭에 나가 이삭을 줍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보아즈의 밭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보아즈가 일꾼들을 격려하러 나왔다가 룻을 발견하였습니다. 보아즈는 룻에게 “네가 남편이 세상을 뜬 뒤에도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었고 고향을 버리고 부모를 떠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낯선 이 백성에게로 왔다는 말을 내가 들었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날개 아래로 안식처를 찾아 왔으니 야훼께서는 넉넉히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하며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머슴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명하였습니다; “보릿단에서 일부러 이삭을 빼내어 저 여인의 앞에 흘려주어라. 그녀가 이삭을 넉넉히 줍게 하여라.”
일이 이쯤 된 것을 보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목욕시켜 향수를 바른 다음 보아즈의 침실로 들게 하였습니다. 룻은 보아즈가 늙고 병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명에 순종하여 보아즈의 침실에 들었습니다. 이에 보아즈는 “돈이야 있든 없든, 젊은 남자를 좋아할 법인데, 네가 시어머니에게 이렇듯 효성을 다하니 내가 너를 맡아 주마.”하며 룻에게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마을 어른들 앞에서 나오미의 남은 밭을 사 들이고 그 아들 마흘론의 아내였던 모압 여자 룻을 아내로 맞아 고인의 이름이 세상에 길이 전해지도록 그 대를 이어줄 자식을 낳게 해 주어야 한다고 밝힌 후 보아즈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는 보아즈와 룻에게서 자식 오벳을 얻어 자기 자식으로 알고 길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오미에게 ‘당신 가문의 대를 이어주신 야훼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며느리가 낳아 준 아들, 아들 일곱보다 더한 며느리가 낳아 준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며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룻의 아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으며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됩니다.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던 모압 족속의 딸인 룻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었으니 룻과 나오미 두 고부간의 뜨거운 사랑이야말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구원의 끈을 이어준 상징적 사건으로서 이 이야기는 많은 점을 생각케 합니다.
고부간의 갈등이 일어나는 원인은 시어머니에게도, 며느리에게도 있지 않습니다. 그 원인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의 양식을 갖고 살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집안이 며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미 불화의 소지가 있는 불씨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한 여성이 어느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은 또한 이러한 불화의 가능성을 전제로 결혼을 약속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결혼은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을 가진 한 집안과 다른 한 집안이 만나 보다 더 풍요로운 행복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기도 합니다. 결혼 자체는 불화의 원인도 행복의 싹도 될 수 있는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들과 삶의 방식들을 존중하면서 그 가운데 이제 합해진 처지에서 가장 좋은 몫을 선택해 나가는 것이 두 당사자의 혼인과 집안간의 결합이 이루어 가야할 과제입니다.
이러한 과제를 잘 수행하는 데에는 물론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들은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에서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처지를 뒤바꾸어 생각해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먼저,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에게 차마 이국 땅으로 가자 말하지 못합니다.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맞아 행복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까닭은 자신들의 기구함 못지 않게 시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떠나가는 둘째 며느리 오르바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큰며느리 룻은 늙은 시어머니 혼자 먼 길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민족이면 제 민족입니다. 어머니의 하느님은 제 하느님입니다. 죽음이 갈라놓지 않는 한 어머니 혼자 떠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이 마주치는 사랑을 축복해 주셨고 당시 가장 저주스런 것으로 이해되었던 대가 끊기는 것을 면하게 해 주셨다고 성서는 말해줍니다.
게다가 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 오벳을 통해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 왕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측면을 보여줍니다. 나오미와 룻의 사랑 속에서 온 인류를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함께 하는 고부간, 사랑 안에 성장하는 가정 속에 우리 인간의 미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참으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일 겁니다. 감사합니다.
나오미와 룻
김태홍
현대로 접어들며 우리의 삶은 물질 만능적 사고로 익숙해져 만연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분명히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제 어디에서도 한국적인 멋과 전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그저 풍성한 말 잔치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효(孝)’를 높은 가치로 여기던 나라였습니다. 자식이 부모님을 한평생 공경하고 같이 살아가는 삶은 이웃나라에서도 높이 숭앙되던 우리만의 전통 미덕이었으며 모두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하길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효(孝)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는 성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에 많은 혼란과 영웅들이 활약하고 있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나오미’라는 이스라엘 여인 한 사람이 자기 고향에 기근이 든 관계로 모압이라는 이방인의 나라에 몸붙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남편을 일찍 여의고 두 아들을 의지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둘 다 모압의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아들도 아버지를 이어 모두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오미는 젊은 두 며느리만을 데리고 살아야 했고 여인들 셋이서 집안 안팎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미는 자신의 고향에 큰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근이 너무 심해 모압으로 피난을 왔는데 이제 고향에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풍성하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에게는 쉽게 그럴 수 없는 사연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오미와 같이 살던 두 젊은 며느리가 모두 모압의 여인들이었기에 이들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이방인이라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오랜 시간을 고민했고 결국 두 며느리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두 며느리는 한결같이 나오미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그런 며느리들을 보면서 마음이 약해져 모두 자기의 고향 이스라엘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며느리가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니 차마 그런 고생을 시킬 수 없는 노릇이라고 재차 삼차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두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각자 자신의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습니다. 마침내 첫째 며느리는 나오미의 강권에 못 이겨 재혼하기로 마음먹고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둘째 며느리인 룻은 그래도 나오미 곁에서 모시고 살겠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오미는 둘째 며느리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둘째 며느리인 룻을 데리고 자기 고향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나오미가 유다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거리는 예전과는 다르게 활력에 차 있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밭에서 난 곡식 단을 들고 웃으면서 이야기 나눴고 자기들의 축제를 성대하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고향에서도 대접받을 수 없었습니다. 나오미의 나이가 너무 많이 들었던 관계로 그 옛날 사귀던 친구는 모두 죽었으며 자기 고향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방인 며느리인 룻이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비췄기 때문에 나오미 자신도 이방인 대우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런 사람이 밉다기 보다 자신의 둘째 며느리인 룻이 더욱 사랑스러웠습니다. 자기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온갖 멸시를 참아내며 살아가는 그녀가 너무나 기특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먹고살아야 하는 과제가 있었기에 나오미는 동네 품을 팔려 먹고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오미 같은 노인을 달갑게 일꾼으로 써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오미는 집안에 있어야 했고 며느리 룻이 대신 품꾼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룻이 품꾼으로 일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이었기에 그 곳 사람들이 잘 써 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그런 애로점을 알았기에 자기와 잘 아는 사람의 품꾼으로 소개해주려고 노력했고 결국 나오미는 죽은 남편과 친척인 보아즈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큰 재력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즈의 집에 가서 사정해 볼 것을 권고했습니다. 룻은 다음날 보아즈의 농장으로 찾아가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사정을 했고 그래서 이삭줍는 허드렛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아즈가 자신의 농장을 살피러 나온 그 날 우연히 룻이 이삭을 줍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보아즈는 그 여인이 누구인가 물었고 사람들은 그가 바로 자신의 친척 되는 사람의 며느리이고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모압에서 자청해서 이스라엘로 온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아즈는 아주 의롭게 하느님을 공경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며 가난한 이들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앞으로 자기의 농장으로 와서 이삭을 주워가도록 명했고 어느 때는 룻에게 식사를 초대를 하여 자신과 같은 빵을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날은 룻이 더 많은 곡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곡식 단을 아예 흘리면서 다니라고까지 하인들에게 명하기도 했습니다. 룻은 그런 보아즈가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사람들은 보아즈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방인에게 어찌하여 그런 은혜를 베푸는 지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즈가 생각하기에 룻이 보이고 있는 효도는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잘 하지 못하는 덕행이었기에 그런 룻이 정말로 훌륭해 보였던 것입니다. 또한 보아즈는 그런 룻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즈는 룻을 쉽게 아내로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율법이 이방인과의 결혼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나오미도 자기 나름대로 룻을 보아즈와 결혼시키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보아즈는 하느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자신은 룻을 아내로 맞고 싶다고 기도하면서 이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사고 청원했습니다. 그러던 보아즈는 나오미가 이 고장 사람이고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혈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율법 조항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즉 나오미에게 자식이 모두 죽은 관계로 나오미 집안의 혈통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또한 그 혈통을 대신 이어주는 사람은 그 집안과 가까운 친척관계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그 집안의 모든 것을 이어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런 나오미의 유산을 보아즈는 떠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즈는 당장 이 사실을 원로들과 의논했고 원로들은 보아즈의 의견에 동조하였습니다. 보아즈는 그럼으로써 나오미의 모든 유산을 떠맡을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자신이 사랑하던 룻과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룻은 나오미를 평생토록 공양하는데 더욱 큰 힘을 얻었으며 새로운 남편과 더불어 결혼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는 축복을 하느님께 받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 보아즈와 룻 부부는 나중에 이스라엘을 강성한 나라로 이끄는 다윗 왕의 증조부모가 됩니다.
이렇듯이 하느님은 아주 일상적인 충실함과 효도에서 가장 찬란한 한 나라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보고 하잘 것 없이 여기는 그것은 사실은 위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결코 작은 것에 충실하지 못하는 자가 큰 것에 충실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릇된 것이 아님은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