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말
김영익
다윗에게는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통틀어도 다시 찾아볼 수 없는 미남으로써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무랄 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압살롬에게는 누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다말이라고 했다. 그녀도 천하 일색이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이며 다말의 이복 오빠인 암논이 다말을 짝사랑했다. 그러나 오누이지간이라 결혼할 수 없었으므로 암논은 억제할 수 없는 욕정과 함께 가슴만을 태우고 있었다.
어느 날 암논의 친구인 요나답이 암논을 찾아왔다. 요나답은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데 매우 영리했다.
요나답이 암논에게 “왕자님,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어디 편찮으십니까?”
그러자 암논은 만사가 귀찮은 듯이 입을 다문 체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럼 왜 이렇게 침울해 계십니까?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시원하게 말해보시지요.”
그러자 암논은 조심스럽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요나답은 웃으면서 “그까짓 걸 가지고 뭘 그렇게 애를 태우십니까? 당신의 시중을 다말이 들게 하다가…” 하면서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러자 암논은 몸이 달아서 “시중을 들게 하다가 어쩐다는 건가?”하고 물었다.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시중을 들게 하다가 다말을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면 그만 아니오.”
암논은 그런 수단을 써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혼자 애를 태우고 있는 자신이 어리석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요나답의 손을 잡으며 “어떻게 하면 다말이 내 시중을 들도록 할 수 있을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요나답은 “앓는 체 하십시오. 그러면 아버님이 문안을 오실 것이고, 그 때 아버님께 누이 다말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먹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시중을 들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습니까?”
암논이 자리에 눕자 정말 아버지 다윗이 병문안을 왔다. 그러자 암논은 요나답의 말대로 다윗에게 다말을 청했다. 그러자 다윗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암논의 청을 받아들였다. 다말은 아버지의 말을 따라 암논이 보는 데서 반죽을 하여 과자를 만들어 가지고 암논 앞에 놓았다. 그러나 암논이 먹지 않자 다말은 “오빠, 좀 들어보세요. 그래서 기운을 차리셔야죠?” 그러나 암논은 단지 찌푸린 얼굴로 있다가 짜증스럽듯이 다른 시중꾼들을 모두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리하여 암논과 다말 두 사람만이 방에 남게 되었다.
그런 후 암논은 힘없는 목소리로 “얘, 그 과자를 집어서 먹여다오.”하고 부탁을 했다. 다말이 과자를 암논의 입에 넣어주려고 했을 때였다. 암논이 다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이제까지 다 죽어가는 시늉을 하던 암논이 갑자기 열기를 띠면서 애원하듯이 말했다.
“다말아, 내 말을 들어 줘.”
암논은 이성을 잃은 채였고 눈을 이글거리며 고르지 못한 호흡은 너무도 뜨겁고 불규칙했다. 오빠의 거동이 수상함을 느낀 다말은 태연한 체하고 “오빠, 갑자기 왜 이러세요?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암논은 “이만하면 알 수 있잖아. 시치미를 떼지 말고 이리 와.”하면서 다말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그녀의 목을 두 팔로 휘감으려고 했다. 그러자 다말은 질겁을 하면서 “오빠,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하면서 암논의 두 팔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암논은 다말의 목을 더욱 힘있게 끌어안으면서 “왜 이러다니.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그 동안 너를 흠모해 왔어. 내가 이처럼 병이 난 것도 다 너 때문이야.”하고 말했다.
다말의 가슴은 몹시 뛰었다. 그녀의 목줄기에 와 닿는 암논의 입김과 호흡은 너무도 강렬했고 뜨거웠다. 그리고 암논은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고 한쪽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하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오빠가 자신의 몸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디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다말은 “오빠, 이러지 마세요, 제게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이스라엘에서는 이보다 더 죄되는 일이 없어요.” 다말은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제정신을 잃은 암논에게 다말의 간절한 호소가 들릴 리는 만무하였다.
“오빠, 이러시면 정말 안돼요. 오빠한테 욕을 당하면 저는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 일은 숨겨질 수 없어요. 그러면 오빠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몹쓸 사람이 되는 거예요. 오빠, 제발 이러시지 말고 아버님께 저를 달라고 말씀해 보세요. 그러면 틀림없이 아버님은 저를 오빠에게 주실 거예요. 그 때까지만 참아주세요”
다말은 단순히 거부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암논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호소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과 오리비가 당할 결과를 이야기하면서 대안을 제시했다. 이 같은 다말의 태도는 당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종속성을 승인하는 것이었고 아버지와 딸 사이의 관계를 그 순간 청산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암논과의 관계를 정당하게 추진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암논은 그녀가 자기의 누이임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대안을 제시하는 다말의 이야기는 불이 붙은 암논의 가슴에 기름을 뿌린 셈이 되었다. 그는 성난 들짐승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다말의 몸을 덮쳤다. 그리고 억지로 다말을 눕혔다.
“오빠!”
다말의 비명에 가까운 마지막 호소는 단순한 소리일 뿐 암논은 마침내 자신의 뜻을 이루고 만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암논은 침대에서 일어나서 다말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마구 헝클어지고 옷이 찢겨진 채 다말은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운 암논은 갑자기 그녀가 미워졌다. 보기가 싫어졌다. 어서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가 주었으면 싶었다.
“울긴 왜 우는 거야. 꼴도 보기 싫어. 어서 사라져.”
암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열하고 잔인하게도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자 탐욕의 희생자가 미움의 대상으로 전락된 것이었다. 그의 가슴에 일단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자, 그것은 걷잡을 수 없도록 번져 갔다. 사랑이 증오로 변하면 그런 것일까. 이제 암논에게 다말은 단순히 제거해 버려야 할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제가 가긴 어디로 가요. 오빠가 저를 내쫓으면 제몸을 망쳐 놓은 것보다 더 나쁜 일이에요. 오빠는 정말 너무해요.” 다말이 야무진 목소리로 항의했다.
그러자 암논은 큰 소리로 종을 불러 다말을 밖으로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밖으로 내쫓긴 다말은 비통한 나머지 자기의 빛깔 고운 옷을 갈기갈기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었다. 출가하지 않은 공주는 본시 고운 옷을 입는 법이었다. 그러나 다말은 이미 처녀가 아니므로 그녀에겐 이젠 그런 옷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고 게다가 자기 몸을 망친 남자는 다름 아닌 자기 오빠였던 것이다. 이제 그는 무참하게 내쫓긴 것이다. 다말은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이제 그녀는 강간을 당하기 전과 같은 머뭇거림도 없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 산산이 부서졌다고 해서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오빠에 의해서 당시의 사회구조 안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게 된 것이다.
다말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정신나간 여자가 되어서 걸었다. 그리고 오빠인 압살롬의 집으로 갔다. 그러자 압살롬은 한눈에 모든 것을 눈치챘다. 다말이 암논의 병간호를 해 주러 갔다가 처참한 모습으로 망가져서 돌아왔으니 무슨 변고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너, 암논과 같이 있다가 왔지? 암논이 너를 건드렸지?”
다말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눈과 몸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뭐니뭐니해도 네 오빠가 아니냐. 그러니 너는 지금 당장 소문을 퍼뜨리지 말고 잠자코 있어라. 네 가슴이야 오죽 쓰리겠느냐마는 지금 울고불고 한다고 돌이켜질 일이겠느냐. 때가 오면 내가 다 알아서 하마. 이 일로 너무 마음 쓸 것 없다.”
압살롬의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무슨 요절을 내고 싶었으나 지금은 참는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마음을 달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동생을 위로했다. 다말은 압살롬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압살롬에게 맡긴다는 뜻이었다. 그 이후 한 남자, 더욱이 오빠에게 강간당하고 조롱을 받고 버림을 받은 비련의 여인 다말은 압살롬의 집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녀는 삶의 대지에서 끊기었고, 오라비의 죄로 인해서 고통받고 고통과 고통을 벗한 여인이 된 것이다. 비록 압살롬이 미래를 기약하고 있지만, 그녀의 현재는 끊임없는 고통의 삶을 살게된 것이다.
한편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몹시 분개했다. 그리고 암논의 죄악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자권에 대한 사랑으로 다윗은 암논에게 기분 상할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의 사회인식을 잘 반영하듯이 아버지 다윗은 여성이며 딸인 다말을 위한 정의는 부정되고 남자이며 장남인 암논의 편을 든다. 이제 압살롬은 암논과 말도 하지 않는다. 누이동생 다말을 욕보인 일로 앙심을 풀고 있었다. 그리고 암논을 죽일 계책을 준비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반성하게 된다.
암논이란 인물은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욕망과 행위는 천륜인 가족 공동체의 기본적인 질서마저도 저버리는 것이며,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아무런 책임과 죄책감도 없는 파렴치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에게서 우리는 거짓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다말은 순수한 사랑을 지니고 참으로 지혜스러운 여인임을 잘 보여 준다. 다말의 순수한 사랑은 아버지 다윗의 명령에 대한 순명과 오빠 암논의 음식수발 요구에 순수하게 응함으로써 오빠에 대한 사랑 그 외의 어떤 마음도 보이지 않는다.
다말은 자신이 처한 위기에 직면에서 침착하게 오빠의 요구가 무엇인지 식별하고, 위기 상황 속에서 암논의 남자로서의 권위와 아버지 다윗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용함으로써 암논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을 그 위험에서 구해내려고 한다. 그리고 침착하고 논리적으로 오빠를 설득하려는 과정 안에서 자신은 물론 오빠를 지키려는 지혜로운 배려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다말의 설득은 바로 하느님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말의 순수한 오빠에 대한 사랑, 다말의 지혜와 하느님의 소리는 암논의 탐욕에 의하여 잔인하게 무시된다. 그래서 당시 사회구조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잘 드러내고 있는 다말은 사랑을 모욕과 상처 그리고 저버림이라는 종신형을 그 대가로 받는다. 따라서 암논의 욕망 앞에서 인간의 지혜와 양심 그리고 하느님의 소리는 마치 가치 없고 힘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삶의 욕망과 탐욕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한다. 욕망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문제에 직면해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 안에서 성범죄는 사회의 악이며 그 심각함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이 현실 안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이 참다운 사랑이고 참다운 사랑의 표현이었나를 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가 참으로 인격적인 책임이 동반되고 있는 것인가를 묻게 된다. 근친상간의 문제로도 현상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현실 안에서 나는 성욕구와 사랑에 대한 참다운 식별을 필요로 한다.
둘째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 즉 나나 타인이 재물을 얼마나 가지고 있고 재능이 무엇이고 어떤 지위와 직책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약육강식의 논리는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시킴으로써 인간을 있는 그 자체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가치기준이 상실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가치기준은 결국 자신은 물론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그리고 배려 등 우리 모두가 혼자가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존재임을 망각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서의 암논과 다말의 모습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대의 다양한 성폭력이나 온갖 사회의 문제 등은 바로 우리의 문제이며, 우리의 선택이었고 우리의 책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로 타인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며, 우리 가정과 자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죽음으로써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결과임을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욕망으로부터 보호를 필요로 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삶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많은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이는 바로 우리 자신 각자 각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냉정한 물음 앞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어떻게 대답하고 선택할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며, 내가 살고 우리가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고 있고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 가를 묻고 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살아있는 자로서,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냉정한 선택과 지혜로움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그 분명한 선택을 대답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