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이윤기
사탄은 지옥회의를 소집해서는 악마들에게 연간 보고를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가 악마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공적을 알고 싶다. 공이 가장 큰 악마에겐 상을 내리겠다.”
그러자 악마 1호가 말했습니다. “사탄 마왕님,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육욕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녀석들은 타락하고 말았지요.” 뒤이어 악마 2호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오만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녀석들은 생명을 잃고 말았지요.” 그러자 악마 3호가 일어나 말하기를, “저는 수많은 인간들을 탐욕의 죄에 빠뜨렸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고통을 겪더군요.”
마지막으로 악마 4호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죄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 때 사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참 잘했다. 악마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업적이니라. 인간들에게 죄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 말이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듯이 시편 51편은 자신의 범죄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부른 다윗의 죄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과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 주십사”(시편 51,10)하고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다윗은 하느님께 드릴 제물은 자신이 범하여 “찢어진 마음뿐”(시편 51,17)임을 고백하면서 하느님은 이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다시 받아들여 주실 것임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얻은 사건은 (2사무 11,1-12,25)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 중 요압을 출정시키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요압이 암몬은 라빠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색욕에 사로잡힌 다윗이 결국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유혹합니다. 그녀는 다윗 치하에 있는 군사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임신을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감추려고 그녀가 남편 우리야와 동침하여 임신한 것처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우리야는 자신의 동료 군사들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음을 생각하여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또 다시 죄를 짓습니다. 다윗은 책략을 써서 우리야를 죽였던 것입니다. 즉, 다윗은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 배치시키도록 요압에게 지시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야를 암몬 사람들의 진지 가운데 홀로 남겨두고 후퇴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야가 죽었다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을 때 다윗은 바쎄바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윗의 죄를 지적하려고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나단의 혹독한 질책을 들은 다윗은 회개하고 하느님의 심판에 복종합니다. 결국 첫 아기는 죽고, 다른 아들이 바쎄바에게서 태어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솔로몬입니다(2사무 12,24-25)
세상에는 인간자체를 파멸로 이끌고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세력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또한 인간본성의 나약함 때문에 우리 인간은 곧잘 유혹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그것은 다윗이나 우리들에게나 예외 없는 인간조건입니다. 문제는 죄스런 과거를 뉘우치면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얼마만큼 의탁하면서 살아가느냐일 것입니다. 다윗이 범한 죄는 죄 자체로 놓고 볼 때 더없이 추하고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시편의 기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지신 분께 자신의 마음을 열고 모든 허물을 깨끗이 해 주십사 하고 눈물로써 간청합니다. 하느님께서 받아주신 것은 바로 이 회개의 눈물입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죄많은 우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비를 입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자비, 우리들의 매 순간의 삶에 베풀어주신 자비,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 세상이 있기 전부터 당신 자비에 싸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다시는 죄의 구렁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지내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문형균
오늘 독서에서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관대하면서도 잔인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위선적이며, 권력욕에 중독 되어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출중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죄지으면서도 또한 뉘우치는 한 왕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후에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솔로몬의 어머니인 바쎄바라는 여인도 함께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 안에는 많은 질문들이 던져질 수 있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해주셨던 다윗이 이럴 수 있는가 하는 한 인간에 대한 실망과 함께, 하느님께서 얼마나 다윗을 사랑하셨으면, 이렇게 그를 생각해 주시는가? 하는 이중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 더 나아가서는 재산욕, 명예욕 등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왕이었던 사울에게 얼마나 많은 수난과 모욕을 받았고, 다른 나라로 망명하여 쫓기는 생활을 하고 살았는지 성서가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다윗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생명까지도 하느님께 맡기면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도 다윗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를 왕의 자리에까지 앉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어떠한 행위를 하느님 앞에서 행하고 있습니까?
그는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성서도 말하고 있듯이, ‘부정을 씻고 몸이 정결한 때였다’고 말하고 있고, 이것은 여성이 임신이 가능한 기간이었음을 성서가 명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바쎄바라는 여인과 정을 통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일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 여인과 정을 통하고 돌려보냈다고 성서를 말합니다.
일을 치르고 난 후에야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상의 모든 일들을 은폐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가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에서도 야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의 의식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벌이는 안간힘일 뿐입니다. 자신은 왕으로서 존재할 뿐이지, 얼마 전까지 쫓겨다녔던 다윗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을 지켜주셨던 하느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죄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을 증가시킴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살인을 저지릅니다. 바쎄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가장 치열한 전장으로 보내어 죽도록 전령을 보냅니다. 세속의 왕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손에는 전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서 그를 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바쎄바를 자신의 궁으로 불러들여서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제 모든 것은 완전범죄를 끝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쾌재를 불렀겠지요. ‘아! 이제는 다 해결되었다. 자신의 성욕으로 시작된 죄를 오히려 자신의 지혜로 바쎄바까지 아내로 얻었으니, 또한 다른 이들로부터는 참으로 인자한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은 완벽하다. 내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다윗이 안심하고 있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단이라는 예언자를 통하여 그에게 자신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언자 나단이 들려준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분노하고 계신지를 드러내 주셨습니다. 나단의 비유를 들은 다윗은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 용서를 청함은 결코 자신의 죄가 드러났음에 대한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커다란 것임을 그는 나단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서는,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결과적으로 하느님께서 그 불륜의 씨앗 속에서 다윗의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솔로몬이 탄생하도록 허락해 주십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지만, 그 벌 안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통한 벌 안에서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처럼 분노 위에 있는 ‘하느님과의 평화’를 이룩해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죄라고 인식하지도 못하고서도 많은 죄를 짓는 존재이며,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우리의 모습은 그 속에서 낙담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죄가 진홍색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삶의 희망을 주시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낙담하고 죄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이며, 하나의 구원 약속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청할 수 있다면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또한 우리가 죄로 인해 입은 상처를 치유해주십니다. 하느님은 치유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