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신앙 (기름부음 받은 사울에 대한 다윗의 존경심)
김영익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 불레셋군과 전쟁으로 서로 대치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불레셋에는 골리앗이라는 거인이 있었기 때문에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에 온갖 욕설을 퍼붓는데도 이스라엘 진에서는 그와 맞서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가 꺾이고 겁에 질린 나머지 벌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진에서 빠져 나오 몰래 도망치기까지 하는 이스라엘 병사도 있었다. 사울 왕이 골리앗을 죽이는 이에게 많은 상금과 공주를 주고 세금도 면제해 줄 것을 약속했지만 나서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중 집에서 양을 치다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로 형을 찾아간 다윗은 그의 형들의 만류와 사울의 타이름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느님 야훼께 신앙 안에서 돌팔매질을 하여 골리앗을 죽인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사기가 올라가고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다. 개선하는 사울과 다윗을 환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다. “사울이 나가면 당장 천 명이나 죽였고, 다윗이 나가면 당장 만 명이나 죽였네. 적을 무찔러 대승리 대승리… .”
이 노래를 들은 사울은 부아가 치밀었고 이러다간 다윗이 자신의 왕위마저 빼앗을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다윗의 거동을 일일이 살피게 하는 한편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과 친형제나 되듯이 사랑했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다윗으로 하여금 도망을 치게 한다.
도망한 사울을 처치하도록 신하들에게 사울은 명령을 하나 이 명령은 실패로 돌아간다. 따라서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게 된다. 다윗이 지브 황무지 숲 속에 숨어 있을 때, 그를 목격한 사람들이 사울을 만나 소식을 전하고 다윗을 생포하는데 협조할 것을 약속한다. 사울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다윗을 포위하나 그 때 마침 불레셋 군이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은 사울은 불레셋 군과 싸우기 위하여 발길을 돌린다. 불레셋을 통하여 다윗을 도운 하느님 야훼 덕분에 다윗은 무사히 자신의 부대를 엔게디라는 곳으로 이동시킨다.
사울은 불레셋 군을 격퇴하고 돌아오자 마자 다윗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다시 다윗을 추격한다. 사울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들염소 바위께로 지나갈 때였다. 길 가에 양의 우리가 있었고 거기에 굴이 보였다. 사울은 그 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묘한 것은 바로 그 굴 속 깊이 다윗이 먼저 들어가 있었던 줄을 사울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기회가 왔습니다. 원수를 갚고 모든 화근의 뿌리를 뽑을 날이 왔습니다. 야훼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원수를 네 손에 넘겨 줄 테니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라.’하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날이 온 것입니다.”하면서 다윗에게 조용히 말했다.
다윗은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하의 말대로 야훼께서 사울을 넘겨 준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울이 이 굴 안으로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굴 안은 칠흑같이 깜깜하다. 바로 코 앞에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사울에게 다가서서 칼로 그의 목을 베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이다. 이런 기회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다윗의 가슴은 뛰기만 했다.
다윗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손으로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인기척이 들리고 사울의 말소리가 들렸다.
“다윗이 이 근처에 숨어 있단 말이냐?”
“네, 방금 입수된 정보입니다.”
“그럼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해라. 이제까지 여러 번 겪어 온 터지만 다윗이란 놈은 호락호락 잡힐 놈이 아니다.”
이 소리를 들은 다윗은 분노가 치밀었으며 한편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사울이 잠든 후 다윗은 단검을 빼들고 살금살금 사울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사울을 단검으로 막 내리치려는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번뜻 스쳤다. 사울은 몸을 바르르 떨며 쳐들었던 단검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다윗은 한 손으로 밑 쪽을 더듬었다. 사울의 옷자락이 손에 잡혔다. 그는 단검으로 손에 잡힌 옷자락을 베어 냈다. 사울은 몸을 한 번 뒤척이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다윗은 뒷걸음질을 쳐서 사울에게서 떨어져 가서 다시 굴 안쪽 깊숙한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윗은 이상한 감회가 일었다. 나라의 왕인 동시에 장인이고, 퍽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원수 같은 사이.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을까? 다윗은 착잡한 상념에 잠기게 되었다.
처음에 다윗은 사울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기를 못 살게 굴고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원수이지만, 그는 나라의 어른이고 자신의 장인이기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울의 옷자락을 베어 든 순간 야속한 감정이 다윗의 가슴을 떨게 하면서도 한편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다윗은 부하에게 “아무래도 꺼림칙하오. 죄를 짓는 것만 같소. 내 손으로 야훼의 기름을 받은 내 임금을 해치는 것은 야훼께서 금한 일이 아니겠소. 그런데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단 말이오.”하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후회했다.
그러자 부하가 “하지만 사울은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의 원수인데 그런 걱정은 하실 것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니오. 아무리 원수라 하더라도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운 사람은 아무도 함부로 손은 댈 수 없는 것이오.”
다윗이 이렇게 말하자 부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다윗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누구든 사울 왕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한편 사울은 자기의 옷자락이 잘려 나간 줄도 모르고, 얼마 있다가 굴에서 나와 부하를 거느리고 그 곳을 떠났다. 만일 자기가 찾고 있는 다윗이 같은 굴속에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사울은 얼마나 놀랄 것인가. 더군다나 다윗이 자기의 옷자락을 베었다는 것을 알면 어떤 생각이 들것인가.
얼마 뒤 다윗도 굴에서 나와 사울의 뒤를 쫓아갔다.
“나의 임금님이시여!”하고 다윗은 사울을 불렀다.
소리를 들고 돌아다 본 사울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자기가 뒤쫓고 있는 다윗이 자기 뒤를 쫓아와서 부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어리벙벙했으므로 다윗을 잡으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때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다윗이 왕을 해치려 한다고 하는 당치도 않은 사람의 말을 임금님께서는 어찌 믿고 계십니까. 오늘 임금님께서는 굴에 들어갔다 나오신 일이 있습니다. 아마 임금님께서도 짐작하실 지 모르나 그것은 바로 야훼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맡기신 것이었습니다. 부하들이 임금님을 죽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야훼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임금님을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라고 부하에게 타일렀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아버님, 자 이 손에 있는 옷자락을 보십시오. 저는 임금님께서 아까 들어가셨던 그 굴 속 안쪽에 먼저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임금님을 쉽게 죽일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옷자락만 어둠 속에서 몰래 베어냈던 것입니다.”
이때 사울은 다윗이 들고 있는 옷자락과 잘려 나간 자기의 겉옷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착잡했다. 그것은 공포와 경악의 감정이 뒤섞인 것이었다.
다윗은 말을 이었다.
“이것은 제가 임금님을 해치려는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제게는 나쁜 마음이나 죄과가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잠깐 사울을 올려다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울의 얼굴에는 차츰 회유의 빛이 떠올랐다. “임금님께서 제 생명을 노리시지만 저는 임금님께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습니다. 야훼께서는 임금님과 저 사이를 심판하시어, 저를 위하여 임금님에게 벌을 내리실 지는 몰라도, 저는 조금도 임금님에게 손을 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옛 속담에도 ‘악은 악인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자기 혐오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스라엘 대왕이신 임금님께선 누구를 찾아 출동하셨으며, 누구를 추격하시는 것입니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아오셨습니까? 야훼께서 재판관이 되시어 우리의 사이를 판가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바른 판결을 내리셔서 저를 임금님의 손에서 구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윗이 말을 마치자, 사울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들 다윗아!”
다윗은 허리를 더욱 굽혔다.
“이것이 정말 네 목소리냐!”
사울은 부하들이 보고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는 너를 못살게 굴었는데도 너는 나를 극진히 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구나. 너는 네 착한 마음씨를 오늘 나타내 보였다. 야훼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다. 이 세상 사람 그 누가 원수를 만났는데도 무사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선한 일 때문에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기를 빈다.”
사울은 말을 끊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듣거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도리 것을 안다. 이스라엘 나라는 네 손에 의해 굳세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윗아, 너는 지금 내 앞에서 한 가지 맹세를 해 주기 바란다.”
“무슨 맹세입니까? 어서 말씀하십시오. 폐하의 충성된 신하는 기꺼이 맹세하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올려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 나라의 왕이 된다 하더라도 내 후손을 끊어 버리지 않겠으며 우리집 가문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리지 않겠다고 야훼 하느님에게 맹세해 주기 바란다.”
“임금님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다 한들 어찌 그런 경거 망동한 짓을 하겠습니까.”
다윗은 다시 엎드려서 공손히 절을 했다.
사울 왕의 얼굴에는 비로소 밝은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의 싸움이 끝난 것이다.
“자, 우리는 돌아가자.”
사울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사울이 돌아간 뒤에 다윗은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산채로 올라갔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다윗은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에게, 사울의 진영으로 가 보자고 제의했다. 다윗은, 사울이 떠 자기를 잡으려고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하길라에 와 있는 것을 아게 되었던 것이다. 사울은 진 가운데 누워 있고 군대는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첩자는 보고했다. 사실 사울은,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고, 기브아까지 일부러 찾아와서 일러준 지브 사람의 정보에 따라 다윗을 투격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다윗의 제의를 받자, 아비새가 다윗과 같이 가보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리하여 다윗은 밤을 타서 사울의 진영 속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갔다.
다윗이 살펴보니, 사울은 창을 머리맡 땅에 꽂아 두고 곤히 코를 골고 있었다. 총사령관 아브넬을 비롯한 군사들도 그의 주위에서 역시 잠들어 있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원수를 당신에게 내맡기셨습니다. 이제 비로소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일을 맡겨 주십시오. 그러면 사울을 창으로 찔러 단번에 죽여 버리겠습니다. 두 번 창질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말렸다.
“사울 왕을 죽이면 안 되오,. 야훼께서 기름을 부은 자를 해치는 것은 죄가 되기 때문이오. 살아 계신 야훼께서 그를 징벌해 주실 거요. 그래서 머지않아 죽게 될 거요. 그렇지 않으며 싸움터에 나가서 죽음을 당하든가. 거듭 말하거니와 내가 그를 치는 것은 야훼께서 금하시는 일이오. 그 대신 우리는 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갑시다.”
이리하여 다윗은 몰래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진중에서 빠져나왔다. 사울의 진에서는 누구 한 사람 다윗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야훼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던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진에서 떨어져 있는 맞은편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진 속에 있는 총사령관 아브넬과 군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브넬아, 듣거라.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너는 용사가 아니냐!”
얼마뒤 아브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 밤중에 소란을 피우는 너는 누구냐?”
“너는 군인이 아니다. 이스라엘에 너만큼 높은 군인이 또 누가 있느냐.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네 임금을 보호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느냐. 그간 한 군인이 임금을 살해하려고 진 속으로 잠입했었다. 그런데도 너는 태평스럽게 잠만 자고 있었던 게 아니냐. 너는 자기 책임을 이행치 못하는 좋지 못한 군인이다. 살아 계신 야훼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임금을 보호하지 않았으니 너는 죽어 마땅하지 않느냐. 자,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곧 왕의 머리맡에 꽂아 둔 창과 물병이 어디 있는가 살펴보아라.”
다윗은 이렇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그 때 잠을 깬 사울은 다윗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었다.
“아니, 저 목소리는 바로? 너는 다윗이 아니냐? 내 아들 다윗아, 네가 틀림없지?”
사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다윗이 대답했다.
“나의 임금님이시여, 제가 바로 다윗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소인의 뒤를 쫓으시는 것입니까? 제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저는 악한 짓을 저지른 기억이 없습니다. 부디 제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노여움을 푸시고 제 피로 이 땅을 붉게 물들이는 일은 없도록 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사람같이 이스라엘 왕이 벼룩 하나를 수색하러 나오셨습니까.”
다윗의 말을 다 듣고 난 사울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다.
“내가 죄를 지었다. 내 아들 다윗아, 그만 떠돌아다니고 내게로 돌아오도록 하여라. 네가 내 생명을 중히 여겼으므로 내가 다시는 너를 해치지 않겠다. 나는 몹시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
다윗은 사울에게 부한 한 사람을 보내어 창을 가져가라고 했다. 그리고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않은 것은 야훼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가 임금님의 생명을 중히 여긴 것같이 제 생명도 임금님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저를 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끝을 맺었다.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어다. 네가 앞으로 큰 일을 행할 것이고 또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을 확신한다.”
이렇게 말하고 사울은 자기 궁궐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윗도 제 길을 갔다.
우리는 이 이야기 안에서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고 선택하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신앙 안에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한다.
먼저, 사울은 야훼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왕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그 왕위를 하느님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위한 도구가 자신의 권위와 존재임을 망각한다. 그래서 사울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라와 백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다윗을 시기와 질투로 일관하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제거하려고 한다. 따라서 사울 안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치졸함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진정으로 참회하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충동적이고 위선적인 말과 행위 등을 하는 한 인간의 단면을 쉽게 읽을 수가 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는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도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반면에 다윗의 모습은 참으로 하느님 중심적인 삶, 즉 그리스도인의 신앙태도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배우게 한다. 다윗의 모습은 처음부터 하느님 중심적이고 하느님의 결과로서 다윗의 삶은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골리앗과의 싸움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사울의 온갖 계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중심적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선택하는 경우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울의 태도는 단지 인간적인 측면과 개인적인 안위를 초월한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흔히들 자신의 죽음이나 생존과 관련한 인간의 선택은 비록 그것이 또하나의 죄임에도 불구하고 정당방위로 간주되고 스스로도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하고 합리화할 수 있는 여지가 현대에는 충분히 고려되고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다윗이 굴 안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상황 안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의 부하는 다윗에게 하느님의 말, 즉 ‘원수를 네 손에 넘겨 줄 테니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라.’는 말씀을 이용하여 다윗이 사울을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그렇게 하도록 다윗을 충동질한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과 말 그리고 선택은 부하의 말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의 생각이고 인간적인 방법인가를 분명하게 깨우쳐 준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고 사울이 죽으면 자신의 안위가 보장된다는 사실 앞에서 다윗은 많은 인간적인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안위를 뛰어넘고 있으며, 사울을 바라보는 관점이 한 인간이요 자신의 원수가 아닌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귀한 존재로, 그리고 자신의 장인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다윗이 “원수라도 기름부음 받은 왕이기에 아무도 손댈 수 없다.”는 말에서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다윗은 오직 하느님만을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분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관점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의 다윗의 이해는 원수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고 사실상 자신의 안전 외에는 사울에 대하여 항상 열려있는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울의 기본적인 태도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반복된 자신의 인간적인 기회를 하느님의 일, 즉 하느님이 자신의 처지와 사울의 모습을 아시고 하느님 손수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대신함으로써 인간적인 이해와 감정 그리고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있다.
더욱이 다윗이 사울을 살려줌과 동시에 사울에게 가서 겸손하고 낮은 자로서 사울을 설득시키는 모습은 참으로 다윗이 사울을 자신의 왕이며 장인이며 한 식구로서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랑의 몸부림임을 우리는 볼 수 있게 한다.
신앙인인 우리들,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들,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는 우리들, 그래서 하느님을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하고 하느님만이 우리의 삶의 기쁨이며 우리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모습은 참으로 우리의 모범이 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의 태도는 어떤가?
다윗의 신앙 (기름부음 받은 사울에 대한 다윗의 존경심)
남상근
불신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제자가 스승을 믿지 않으면 교육이 가능할 수 없습니다. 사병이 장교를 믿지 않으면 안보가 뒤흔들립니다. 신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성직자를 믿지 못하게 되면 하느님의 가르침은 힘을 잃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스승이 스승답지 못하고, 군인이 군인답지 못하고, 성직자가 성직자답지 못하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과 명령과 권고를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끊임없이 신뢰하고 기다려줄 때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일화는 바로 그와 같은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윗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입니다. 당시의 사울 왕은 자기 수하의 다윗이 승승장구하여 백성들의 신임을 얻게 되자 질투를 느끼고, 자신의 왕위가 위협받고 있다고 여기고 다윗을 축출하여 죽이려 합니다. 이를 알아챈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쳐 엔게디 산중에 은신할 때의 일입니다.
사울 왕은 삼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 온 이스라엘을 뒤집니다. 왕은 마침내 다윗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함께 숨어 있는 굴 가까이에 이르게 됩니다. 사울 왕은 동굴에 홀로 들어가 뒤를 보는데, 마침 다윗은 굴 안에 부하들과 함께 있을 때였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원수 사울을 당신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그를 칩시다”. 다윗이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을 죽이고자 혈안이 된 사울이 무방비상태 일 때 없애 버렸을까요? 다윗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기름으로 축성하신 이를 내가 손을 댈 수 없다”라고 그는 부하들의 권고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슬그머니 사울에게 다가가 그의 겉옷 자락을 몰래 짤라 냅니다. 그리고 일을 마친 사울이 굴을 나설 때 크게 소리칩니다. “나의 상전이신 임금님이여!” 사울이 뒤돌아봅니다. 어둠 속에 누군가 있습니다. 다윗은 예의를 다해 절을 하며 간청합니다. “임금님, 당신은 오늘 주님께서 당신을 제 손에 넘겨주셨음을 보셨나이다. 아버지여, 보소서! 여기 당신의 겉옷 자락을. 저는 이렇게 겉옷 자락만 자르고 칼을 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감히 임금님을 해치거나 반역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제가 잘못이 없는데도 임금님께서 저를 잡아 죽이려하시니 어찌 된 일이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사이를 판가름해 주시고,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사실 보잘 것 없는 출신은 다윗은 사울과 사무엘 예언자에 의해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는 사울이 아직 왕위에 있다는 점을 항상 기억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집니다. 비록 자신을 박해하는 인물이지만 그는 분명 주님께서 택하시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맡기신 왕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결국은 주님께서 알아주실 것임을 항상 신뢰합니다.
이제 다윗의 진심을 알게 된 사울은 감격합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그는 크게 울부짖습니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나는 너를 못살게 굴었는데도 너는 이렇게 잘해 주었다. 오늘 야훼께서 나를 네게 넘겨주셨는데도 너는 내게 이렇듯 한없는 은덕을 베풀어주었구나. 원수를 만나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네가 내게 베푼 바를 주님께서 갚아주시기를 바라노라. 진정 네가 왕되기에 마땅하니, 이스라엘이 네 손안에서 견고하게 번성하리라.”
다윗은 사울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저 눈 한번 찔끔 감고 그를 없앤다면 그로서는 더 이상의 고통이 없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방식을 택합니다. 다윗은 비록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사울을 큰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울이 부하들과 더불어 다윗을 공격할 수도 있음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나를 믿어주지 않는 사람, 나를 위협하는 사람, 나를 사지로 몰아 넣는 사람을 믿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사울을 믿었습니다. 사울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임을 믿고, 마지막까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사울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불신을 넘어서게 만듭니다. 불신이 가득한 세상일지라도 신앙인은 자신을 불태워 세상의 어둠을 비출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로 세상의 불신을 몰아내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임을 굳게 믿는 이들입니다. 동시에 변함없으신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을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고 계심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든 이들을 끝까지 믿어 주어야 합니다. 아직은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더라도 그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믿는 것은 그가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사랑해주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지어진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를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불신이 가득한 세상이라고 탓하지 맙시다.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한숨을 쉬지도 맙시다. 내가 먼저 한없는 신뢰를 보여주지 않는 한 세상의 어둠을 몰아 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하셔서 온 세상을 사랑하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런 사명에로 거듭 새로이 불림 받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불신을 걷어냄을 증거하도록 합시다. 아멘.
다윗의 유언과 죽음
김영익
다윗 왕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이 쇠잔해 갔다. 그리하여 자기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솔로몬에게 여러 가지 일에 대해 타이르고 주의를 주려고 불렀다.
“이제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이 꼭 가고야 마는 길을 가게 되었나 보다. 그러니 너는 강한 사내가 되어서 네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지키고 야훼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너는 모세의 율법에 씌어 있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하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무슨 일을 하고 또 어디에 있는지 거리끼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야훼께서는 약속을 지켜 주실 것이다. 그 약속이란 다름이 아니라 야훼께서, ‘만일 네 자손이 행동을 신중히 하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내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윗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으나 위업이 있었다. 솔로몬은 고개를 숙인 채 아버지 다윗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부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왕이 세상을 떠나면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처신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다윗 왕은 또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의 자격을 이와 같이 설명했다.
“백성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야훼를 두려워하면서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아침해가 떠오를 때의 밝은 햇빛과 같이, 그리고 비가 온 뒤에 더욱 밝게 내리비치는 햇빛을 받고 돋아나는 어린 싹과 같이 해야 한다.”
다윗 왕이 말을 마치자 솔로몬은 얼굴을 땅에 대고 공손히 절을 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 잘 명심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다윗 왕의 얼굴에는 솔로몬을 대견하게 여기는 듯한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 뒤에 다윗 왕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애도의 노래와 백성들의 비탄에 싸여 다윗 왕은 조상들이 묻혀 있는 다윗 성에 묻히게 되었다.
다윗은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한 지 40년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헤브론에서 7년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렸다. 다윗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솔로몬은 부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일생을 살아간 한 인간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죽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일생을 어떻게 살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각자의 모습과 말들 안에서 그 동안 그 사람의 삶이 다 함축되어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은 각 개인의 삶의 결과로 이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아들 솔로몬에게 하는 유언은 참으로 간단하면서도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 즉 “만일 네 자손이 행동을 신중히 하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내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하고많은 말들 중에서 다윗은 왜 이 하느님의 말씀을 아들에게 유언으로 줄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그 동안의 삶 속에서 하느님은 진실하신 분으로써 약속을 저버리는 분이 결코 아님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결과이며, 그 하느님의 손길과 약속의 성취 안에서 다윗은 자신의 일생의 삶이 하느님이 거저 베풀어주신 기쁨의 삶이었음을 그리고 하느님만이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자신의 기쁨이며 행복이었음을 절실하게 체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죽음 앞에서 모든 이는 진실해지며, 죽음 앞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우리 각자는 자명하게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생활 속에서 죽음은 나와 무관한 것과 같은 것으로 망각하고 사는 경우를 본다. 그래서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망각하고 있으니 이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의 특징을 가치관의 상실과 혼미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에 따를 깨어있는 삶을 자신은 물론 서로에게 권고하고 외치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달리 말해서 가치관의 혼란은 결국 인간의 죽음이며 자신의 죽음과 비참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와 반대로 깨어있는 삶에 대한 외침은 가치관의 상실의 결과에 따른 인간의 살기 위한 영혼 깊숙한 곳에서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대의 특징 안에서 다윗의 유언은 핵심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걱정하지 말하고 말이다. 즉 걱정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하느님만을 소중히 여기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만을 따라가면 된다고 말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해 주실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를 반성해 볼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다윗과 같은 신앙심이 참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고 거기에 우리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삶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과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체험이 부족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안전과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하느님 외의 다른 것을 비축하고 죽으면서 까지도 자신의 자식에게 똑같은 것을 전해 주려고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고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이게 됨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인간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 대신에 출세해야 한다고,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남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존중하라는 가훈하나 없이 살아가는 경우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이다.
요즘 자신의 삶 안에서 부모가 누구인지, 자녀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사는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자식이 출세를 하고 경제적인 여유를 지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식이 부모를 버리게 된다면 그 자식의 삶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부모나 자녀가 참으로 행복하게 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다시금 오늘의 가치관의 혼재와 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윗의 유언과 죽음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난 우리들이 다시금 회개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 이 외침은 바로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삶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무려 주고자 하십니까? 그러기에 앞서서 자녀와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삶으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다윗의 말과 태도는 우리에게 신앙인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다윗의 유언과 죽음
민형기
흙에서 태어난 몸 흙으로 돌아가리라.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인간도 세상의 일부분이며 하느님의 창조물 중 하나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모든 것은 창조주이신 주님의 손끝에 달려있다.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권세와 영화도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주어진 권세도, 영화도 다 부질없는 것이다.
옛날에 어떤 나라에 지혜로운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안위는 돌보지 않고 오직 왕에게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충직하게 왕을 보필하였기 때문에, 왕도 그 재상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였습니다. 그렇게 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 재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늙게 되었고, 거동도 못하고 자리에 누워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재상이 자리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재상의 집으로 문병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재상을 위로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어떤 소원이든지 다 들어줄 테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시오” 그러자 재상은 자리에 누워서 힘없는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폐하 저가 단 한 시간만이라도 더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왕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들어줄 수 있어도 그것만은 할 수가 없군, 단 1초의 생명도 연장시켜 줄 능력이 내게는 없네”. 왕의 대답을 들은 재상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내가 이제까지 인생을 헛살았구나, 진정으로 모든 것을 바쳐 경외해야 할 분께 많은 시간을 할애해 드리지 못하였구나”하고 말하였다.
온갖 권세와 부귀를 누렸으며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다윗 왕도 죽음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이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하느님께 뽑혀 왕이라는 높은 지위에 오른 다윗은 지금 자리에 누워 자나온 평생을 눈앞에 되살리면서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누린 치세를 누렸지만, 이제는 평생의 피로가 늙은 몸을 휘감고 있음을 느끼면서 침상에 누워 ‘모든 사람이 가야 하는’ 죽음으로의 여로를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면서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다윗은 말한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천주를 온전한 마음과 기쁜 정으로 섬겨라. 주께서는 모든 이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영혼의 온갖 생각을 다 알고 계시느니라. 네가 그이를 찾으면 얻을 것이요, 네가 그이를 떠나면 그이께서 너를 영원히 물리치시리라”.
그렇다. 인간이 아무리 잘 났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단 일초도 연장시킬 수 없다. 그것을 하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한 분 주 하느님뿐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괄호 쳐 놓고, 자신에게는 죽음이란 것이 비켜 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간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기 자신을 세워놓고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에서 두려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체하면서 뽐내고, 자신이 창조주나 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경외’라는 단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스개 소리가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기에, 언젠가는 영원히 극복하지 못할 한계인 죽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에는 하느님을 애타게 찾을 것이고, 하느님께 순명하고, 하느님만을 바라면서 살아갈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이른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또 말한다. “내가 주께 집을 한 지어 드리려고 생각하여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군인으로서 피를 흘렸으니, 나를 위해 결코 집을 짓지 말 것이며, 네 아들 솔로몬만이 내 집을 것이다. 내가 저를 내 아들로 삼았으니 또 내가 저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며, 저가 내 계명을 항구히 지키면 저의 나라는 영원히 계속 되리라’ 하셨느니라”
삶은 자신이 뜻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 저자는 “계획은 인간이 세우고 결정은 야훼께서 하신다.”(잠언 16,1) “사람은 속으로 제 할 일을 계획해도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시는 분은 야훼시다.”(잠언 16,9)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경외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 가장 올바르게 사는 길이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길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것이고, 모든 인간이 직면하게 될 죽음의 순간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 눈을 감고 잠이 들면 내일 반드시 다시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내일 다시 눈을 뜨고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일 매일을 삶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
만약 오늘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일만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내일 일어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는 하느님을 슬프게 해 드리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고, 주님의 일만을 생각하다가 잠이 들고, 내일 눈을 뜨지 못하고 죽는 다면 그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 실 것입니까?
당신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실 것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어떤 죽음을 맞이하길 원하십니까?
그것은 순전히 당신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자! 이제는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결단을 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