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골리앗을 이김

 

다윗이 골리앗을 이김


                                                                     황주원






사람들과의 첫만남에 있어서 가장 먼저 그 상대방을 파악하고 판단하는 것은 외적인 모양에서 나오는 것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그  외적인 것은 어찌 보면 사람에게 있어서 극히 일부분 일 수도 있지만, 그 선입견은 많은 부분 지속적인 만남 안에서  계속 간직될 수도 있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외적인 이미지를 중요시하고  많은 시간을 외모 가꾸기에 할애한다. 어찌 보면 그것은 인위적으로 잘 보이려고 꾸미는 것이고 그것은 간혹  좋은 평가를 가져오기고 한다. 또 한편 40세가 되면 얼굴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 말 이면의 내적인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는 객관적인 특성을 지니기도 한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개방적으로 받아 드리지 않을 땐, 또한 작은 가능성이지만 열어 놓지 않을 때 하느님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구약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우리의 선입견을  부수어 버리는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아직 군대 갈 연령이 안된 미소년이고 골리앗은 불레셋의 군인들을 대표 할 만한 인정받는 장수이었다. 이스라엘의 현역군인 누구도  나설 용기를 가질 수  없는 거부의 체구를 갖고 있는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이스라엘의 군인 누구도 나설 수 있는 용기가 없기에 골리앗이 짓거리는 모든 욕설과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도 치욕스럽게 듣고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그를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은 군인들의 사기를 땅에 떨어 드리고 패색이 짙은 상황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암울한 상황에서 40일 동안 아무런  방도 없이 굴욕을 참아  내야만 했다. 여기서 ‘사십’이라는 숫자는 구약에서 좀 색다른 의미가 있다.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고난의 시간이고, 하느님의 현현을 기다리면서 인간 겸손을 배우는 시간이기도하다. 인간이  자신의 힘이 무력함이 잘 드러나는 사십일이 흐른 후, 새로움이 펼쳐질 시간이 무르익었을 때,  ‘다윗’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이스라엘 진영에 오게 된다.




이때 이스라엘 군인들이 느꼈던 것처럼 다윗 자신도 그 객관적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지만 다윗은 골리앗의 이스라엘 군대에게 하는 모욕을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또한 그 모욕이 하느님께 향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저 불레셋의 오랑캐 녀석이 도대체 누구기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거느리시는 이 군대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겁니까?”(사무엘상 17.26b)




다윗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그 오랑캐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저자 때문에 상심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나가 저 불레셋 놈과  싸우겠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말리며 말했다. 네가 나가 저 불레셋 놈과 싸우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싸움으로 몸을 단련해 온 자인데, 너는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 아니냐?”(사무엘상 17,32-33)




이렇게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울 왕이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을 대표해서 말한다. 그러나 골리앗에 맛선 다윗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그 마음 안에 가득했기에 이렇게 말한다. “사자와 곰으로부터 소인을 살려 내신 야훼께서 저 불레셋  놈에게서도 소인을 살려 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골리앗 앞에 나서서 큰소리로 말했다. 네가 칼을 차고 창과 표창을 잡고 나왔다만,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을 믿고 나왔다. 네가 욕지거리를 퍼붓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느님의 이름을 믿고 나왔다.”(사무엘상17,37a. 45.)




다윗은 돌팔매만이 유일한 무기였고 갑옷도 칼도, 육체적인 힘도 없는 소년일 뿐이지만 이스라엘 장수와 군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향한 믿음이 강했던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은 이겨낼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전혀 해볼 가능성이 없지만 다윗은 한방에 이겼다.


  


우리들은 상식을 깨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고 상식이 깨지는 상황을 기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힘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거기에 개입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 상황이 하느님의 은총이든 또다른 무엇이든 간에 어떤 사건과 인간을 만남에 있어서 얼마나 그 사안이나 사람에 대해서 개방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인간은 성숙해  가지만 또 한편으로는 경험에 의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2+2=4인 것과 같이 더 이상의 개선의 여지를 닫고 있을 때가 많다.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불가능성을 통해서 역사하시기에 깨어 있는 삶이란 가능성에 대한 열려 있는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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