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나의 이야기 (집을 나간 딸)
김용철
레아가 야곱에게 낳아 준 디나에 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디나는 히위 사람 하몰의 아들 세겜으로부터 겁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세겜 사람들은 레아가 낳아 준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주도로 인해 학살을 당한다. 이 잔인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유다 종족이 사실상 수위권을 잡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첫째, 아들인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소실 빌하를 범하는 결과(창세기 35:22)로, 또 둘째 아들인 시므온과 셋째 아들인 레위는 세겜 사람들의 학살로 제명된다. 따라서 유다만이 수위권을 차지하게 된다.
디나의 겁탈은 결국 세겜의 멸망을 가져온다.
한 여인의 인권을 유린한 죄에 대한 결과이다. 이는 오늘날 수없이 일어나는 성(性)의 문란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한 인간의 삶을 단순한 性的(성적)인 만족을 위해 남용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린 시절 타인으로부터 받는 상처는 살아가는데 큰 아픔으로 남는다.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겁탈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가져온다.
미국 영화 중에서 어린 시절 겁탈을 당한 자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있다. 자매 중에서 동생은 결국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말며, 언니는 일생을 복수의 칼을 갈고 동생과 자신을 겁탈한 남자를 쫓아 죽음의 칼로 복수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비록 살인이라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지만 일생을 복수라는 일념으로 생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야 할 여성에서 살인이라는 극단으로 몰고 간 것은 성(性)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비윤리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복수의 칼날 아래에서 남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것은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나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다. 그러니 제발 잊혀달라.” 이 말은 겁탈한 남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있어서 그날은 결코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일생 벗어버리지 못하는 아픔이요. 상처였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또 다른 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살인은 또 다른 죄를 낳게 된다. 그래서 야곱은 경솔한 학살을 타일렀고, 시므온과 레위의 난행을 꾸짖었다.(34:30) 그 결과로 시므온과 레위의 종족은 약속의 땅 분배에 있어서 제 몫을 받지 못하고, 다른 종족 속에 흩어지게 되며 수위권을 잃게 된다. 예수님은 분명 칼에는 칼을 원하지 않으신다. 칼에는 칼로 맞서게 되는 이들은 시므온과 레위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보여주신다.
살인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 그 어떤 행위라도 살인은 용납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디나를 욕보인 세겜을 멸망시키지만 살인을 한 시므온과 레위 역시 똑같이 벌을 내리신다.
디나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면을 다시 되새겨야 한다.
첫째. 인간의 성(性)은 아름다운 것이다. 서로가 존중해 주어야 하며, 쾌락이나 즐거움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하느님은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성(性)을 허락하신 것이다. 스스로 절제하면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다. “그자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했는데도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비록 시므온과 레위의 한탄은 여성의 정조를 존중하는 것이지만 살인은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됨을 본다.
디나 (집을 나간 딸 : 창세 34,1-31)
배원일
오늘 우리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여인들 중/ 쉽게 그 이름을 접하지 않았던/ “디나”라는 여인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디나’는/ 야곱과 그의 부인 레아 사이에 태어난 야곱의 외동딸입니다. 물론 야곱은 레아와/ 그녀의 동생 라헬 사이에서 많은 아들들을 얻게 되었지만/ 딸은 오직 ‘디나’ 한 명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가족들을/ 가나안 지방의 세겜이라는 땅에 살도록 마련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느님의 보호아래/ 세겜 지방에서 평안한 삶을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야곱의 삶은 정착된 생활을 했어도/ 아직은 유목민 생활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남자 형제들은/ 들에 나가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집에는/ 언제나 야곱과/ 그에 아내인 레아와/ 라헬/ 그리고 외동딸인 ‘디나’ 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10대 소녀인 ‘디나’는 항상 한정된 공간 속에서 지냈기에/ 이러한 삶이 조금은 답답 하 였습니다. 놀고도 싶고 친구도 사귀고 싶었지만/ 디나는 늘 외로웠습니다.
당시 세겜은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아름다운 경치와 발달한 문화를 지닌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나’는 멀리 보이는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였고,/ 그 곳에 가면/ 지금의 답답함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모든 형제들은 가축을 돌보기 위해 들에 나가 있었고/ 부모님들도 쉬고 계시던 시간/ ‘디나’는 가족들 몰래 세겜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디나’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10대 소녀라면 누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디나’와 같은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나’의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행동은/ 선량한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한 민족의 와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또한 야곱 집안은/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더 이상 세겜 땅에서 생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삶을 지내면 지낼수록 우리들의 모습은/ 늘 다람쥐 쳇바퀴처럼 같은 자리만을 맴도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또한/ 반복되는 이 일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 볼수록/ 아쉬움이 많이 있음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의 일상적인 삶보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모습을 찾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TV 드라마를 자주 보게 되는 이유 중에는/ 우리들 마음속에 이러한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등장하는 인물들과 나를/ 비교도 해보면서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그 인물을 부러워 할 때도 있으며,/ 반대로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그 인물에 비해 조금은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 계시는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이런 것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끼며, 친한 분들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지만/ 그 주인공처럼 행동하고 삶을 바꾸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만을 위한 욕망은/ 오늘 말씀에 나타나는 ‘디나’와 같이 잘못된 결과가 생길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서의 여러 곳에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려하다가는 웃음거리가 되며(집회 18,31),/ 또한/ 욕심이 잉태되면 죄를 낳고/ 죽음을 가져 오게된다(야고버 1,15)‘
그러나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라는 속담처럼/ 아예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체념 속에 사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삶을 선사 받은 우리들의 합당한 모습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 속에 사로잡히고/ 희망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체념하는 우리들에게/ 빛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 희망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욕망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구원의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모든 인류를 풀어주고 구원을 시키려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기꺼이 우리들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마지못해서/ 억지로 따랐던 것이 아니라/ 기꺼이 순명하며 충실히 이행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자매 여러분!!
우리들 각자에게 맡겨진 삶 속에서 우리들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나는 ‘디나’와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이행하는/ 예수님의 삶을 닮기를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참된 희망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우리들은/ 지금의 삶 속에서 우리들 각자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더욱 당신의 뜻을 찾고 바랄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 드리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