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헬 (사랑의 기적)
김용철
야곱의 아버지 이사악은 야곱에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을 너와 네 후손에게도 주시어 네가 지금 자리잡고 사는 이 땅을,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차지하게 되기를 빈다”라는 축복을 주시며 야곱을 떠나 보낸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을 찾아간다.
야곱과 라반의 둘째 딸인 라헬의 사랑은 우물가에서 부터 시작된다. 양들을 몰고 오는 라헬에게 야곱은 우물의 돌뚜껑을 열어 라헬의 양들에게 물을 주면서 서로 만나게 된다. 라헬은 언니인 레아보다 요셉에게 더 사랑 받는 인물로 등장한다. 성서는 그 이유에 대해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뻬서 야곱은 라헬을 더 좋아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정작 결혼에 있어서 라헬은 레아에게 요셉을 빼앗기게 된다. 하느님은 사랑 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태를 열어주시어 아들을 낳게 해주시지만 라헬에게는 아기를 잉태시켜 주지 않으신다.
여기서 라헬을 살펴보면, 인간인 야곱에게 사랑을 받으나 하느님으로부터는 축복을 받지 못하는 라헬을 만나게 된다. 하느님의 축복은 많은 아들을 잉태하는 것이다. 라헬은 레아가 요셉에게 아들 6명을 낳아 준 후에야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라헬도 돌보시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 주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공정하시다. 비록 라헬이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시자 하느님께서는 사랑 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더 많은 아들을 잉태하도록 축복은 주신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야곱을 통해 더 많은 사랑을 받은 라헬은 하느님의 축복(아들의 잉태)없는 긴 고통의 터널을 걸어왔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인간적인 사랑과 행복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할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느님의 축복이 없이는 진정한 행복과 사랑이 완성되지 못함을 라헬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축복을 비는 라헬의 기도는 우리 모두의 자세이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며, 그 축복으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
라헬 (사랑의 기적)
김동원
훗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딸들 레아와 라헬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 동방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외삼촌 라반을 만났습니다. 라헬에게 반한 야곱은 7년간 일을 해주고 라헬과 혼인할 것을 약속 받았지만 7년 후 잠자리에 든 것은 바로 라헬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그랬음에도 라헬과 혼인하여 장인을 위해서 다시금 7년간 일을 해주었습니다.
레아와 라헬과 결혼한 야곱은 자신이 반한 라헬을 더욱 사랑하였기에 차별대우를 받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고는 레아와 그 몸종에게 아이를 낳게 하십니다.
그러나 라헬은 야곱에게 아기를 낳아 주지 못하게 되자 언니를 시새우며 “저도 자식을 갖게 해 주셔요” 하면서 자신의 몸종이라도 자리에 들어 아기를 낳아주도록 하였습니다.
마침내 라헬이 야곱에게 아들 요셉을 낳아주니, 야곱의 평생의 기쁨이 되었고, 야곱이 늙은 후에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라헬은 “하느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다”하고 다시 하느님께 “나에게 아들을 하나 더 점지해 주셨으면”하고 기원하였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그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간 후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기도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에브랏이라는 곳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서 베냐민이 태어납니다. 이제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족장이 됩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을 때, 산파는 그에게 말하기를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도 아들입니다.”라고 했지만 라헬은 베냐민을 낳은 후 숨을 거두었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무덤 위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라헬이 두 아들을 낳을 때까지 겪은 마음 고생 때문에 라헬은 둘째 아들을 ‘내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의 벤오니라고 했으나, 야곱은 ‘오른 팔이 되는 아들’이란 뜻의 베냐민이라고 지었습니다.
라헬은 야곱을 처음 만난 날부터 야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축복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한 라헬이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리면서 애태우던 마음을 우리는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이 그저 본인에게 부과된 짐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부부간의 사랑만이 중요하지 자녀는 그 사랑의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라헬은 야곱의 아이를 낳지 못해서 야곱에게 조르기까지 하지만 야곱은 하느님께서 아기를 허락하심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모든 자녀들은 하느님께 청하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실 때에만 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모든 소유와 땅을 지키고 번창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양치기요, 그의 땅을 가는 경작자들이요, 그의 장사꾼이요, 또한 그의 노년의 지주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자녀들을 “태의 열매” 또는 “야훼께서 주시는 유산”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허락해서 주시는 자녀라는 커다란 선물을 품어 9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돌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선물이요 은총인 자녀들이 부러울 것 없는 재산이 아니겠습니까!
더 없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인 자녀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자녀들을 낳아 기른다는 것. 이런 진정한 사랑을 드러냄을 자꾸만 기피하고 외면하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전파하는 하느님 창조사업의 협조자여야하며, 또한 생명을 가꾸고 바르게 자라게 하여 하느님께로 이끄는 구원의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은 바로 부부의 사랑 안에 생명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젊은 부부들이 자녀 갖기를 두려워하고 자녀에 매이기를 주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 사명의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녀를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와 구원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어버이이신 하느님의 일에 우리가 진실되이 동참하여 구원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18,5)
라헬 (사랑의 기적 : 창세기 29,30,35장)
원영훈
가정에 있어서 자식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부부 사랑의 열매가 바로 자식들이고, 하느님께서 혼인의 은총으로써 인간에게 베푸는 것 역시, 자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식의 중요성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인 족장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야곱의 아내인 라헬에서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족장 아내들의 중요한 역할은 아이를 낳는 일이었다. 고대 사회의 결혼한 여인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면 불안하고, 실망하고, 초조해한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실망했고, 평생 자녀 없는 생을 보낼 것 같았다. “저도 자식을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어요” (창세 30:1)하고 라헬은 야곱에게 투덜거렸다. 야곱과 라헬을 서로 사랑했다. 그러나 해산을 할 수 없어서 실망한 라헬은 야곱에게 “저에게 몸종 빌하가 있지 않습니까? 그의 방에 드셔요. 빌하가 아기를 낳아 줄지 압니까?” (창세 30:3)라고 했다. 야곱이 그 와 한자리에 들었더니 빌하가 야곱의 아들을 낳았다.
라헬은 “하느님께서 내 사정을 바로 보살펴 내 호소를 들으시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하였다. 후에 빌하는 또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라헬의 언니 레아도 그의 몸종 질바를 야곱의 소실로 들여보냈다. 질바도 야곱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 마침내 라헬이 야곱에게 그들의 아들, 요셉을 낳아주니, 야곱의 평생 기쁨이 되었고, 야곱이 늙은 후에도 위로가 되었다. 라헬은 “하느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었다”하고 다시 하느님께 “야훼께서 나에게 아들을 하나 더 점지해 주셨으면!” 하고 기원했다.
야곱의 가족이 가나안으로 돌아간 후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기도를 이루어 주셨다. 에브랏 (=베들레헴이다)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서 베냐민이 탄생했다. (야곱은 열 두명의 아 들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이 되었다.) 그러나 라헬은 베냐민을 낳은 후 숨을 거두었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가에 묻혔다. 야곱은 라헬의 무덤 위에 비석을 세웠다. 라헬이 두 아들을 낳을 때까지 겪은 마음 고생 때문에 라헬은 둘째 아들을 벤오니(내 슬픔의 아들)라고 했으나, 야곱은 베냐민(오른 팔이 되는 아들)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라헬이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느꼈던 간에 라헬은 야곱을 처음 만난 날부터 야곱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축복 받은 여인이었다. 야곱은 아름답고 사랑한 아내를 잃은 슬픔을 영원히 잊지 못했다.
라헬과 오늘날의 젊은 여인들의 자식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자식에 대한 관심은 비슷하지만, 자식을 갖고자하는 간절한 심정은 오늘의 젊은 여 인들에게는 필수적인 사항은 아닌 듯 싶다.
야곱의 두 아내와 소실이 낳은 열 두 아들은 야곱의 모든 소유와 땅을 지키고 번창하게 했다. 그들은 야곱의 양치기요, 그의 경작자들이요, 그의 장사꾼이요 또한 그의 노년의 支 柱들이었다. 그 시대에는 자녀들을 가리켜서 “태의 열매” 또는 “야훼께서 주시는 유산” (상속된 재산)이라 했다. 관례들이나 습관들을 비교해 볼 때, 오늘날은 라헬의 시대와 많이 달라졌다. 인구의 증가율도 상승했다. 그래서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비용도 많이 들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젊은 남녀가 “어떻게 우리가 많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겠어요?”하는 것 도 나올 수도 있다. 다양한 이유로, 아이를 유산시키는 일은 흔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늘날 토론의 쟁점이 되었다. 임신하지 못해서 초조해 하던 라헬과는 다르게, 오늘날의 일부 젊은 어머니들은 임신을 할까봐 초조해 한다. 이들은 아이를 가진 어머니를 부러워하기보다는 직업적으로 성공한 여인을 훨씬 더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훨씬 더 자유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젊은 남녀 중에는 부부간의 사랑이나 보살핌을 희생하고서라도 직업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시대의 잘못된 결단이 개인들의 사생활에 심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라헬처럼, 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라헬과는 반대의 이유로, 희망을 잃고 절망적인 심정 에서 어떤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에 빠진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 사랑과 질서가 있는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은 아직도 큰 기쁨이요, 영원에 대한 인류의 소망이다. 아이를 유산시키는 일이 폭발적인 큰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 우리가 살던지 아이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없어질 수 없다. 아이들은 호 기심으로 충만하고, 미래에 대한 기적을 가져오고, 우리가 그들을 가르치기보다는 훨씬 더 우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남녀가 결혼, 직업, 아이 문제에 대해서 자기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에서보다는 하느님께 겸손하게 그 해답을 구하게 될 때, 그 젊은이들은 참 슬기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라헬의 시대 이래로 본질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았고, 하느님도 변하시지 않았다. 그 분은 아직도 예전과 같은 위대한 영이시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지배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아름다움의 세계요, 절망과 공포와 증오의 세계가 아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는 이런 면에서 또는 저런 면에서 시련을 받고 있는데, 이 시련 을 이기기 위해서는 슬기가 필요하다. 지혜는 그를 찾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자식을 포기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자식(즉, 가정)과 자기 자신을 모두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