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을 부은 여인 (요한 12,1-8을 중심으로)
김용석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예수님의 수난을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 갈 것이다”(마르 12,33) 라며 당신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베다니아에서 기름을 발리신 사건을 통해 당신의 수난을 암시하시며 그 수난에 우리는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과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은 베다니아에 가셨습니다. 베다니아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적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바리사이파인들과 대사제들이 ‘예수님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요한 11,53)하게 된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와 다른 손님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요한 12,3) 드렸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향유는 값비싼(아모 6,6) 그리고 성별하는(출애 39,38) 물건이었고, “야훼께 드릴 선물”(출애 35,5) 중에 하나였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발라드린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을 받고 팔 수 있는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당시 1데나리온이 남자 장정의 하루 임금이었다고 하니 삼백 데나리온이면 굉장히 큰 값어치가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본 유다는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요한 12,5)라며 불평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막지도 않으셨고 거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투덜거리는 유다를 향하여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요한 12,7) 하시고 또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마리아의 행동이 당신의 장례일을 위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9,30)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당신의 수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유다는 예수께서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 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요한 13,21)라 하신 그 사람이고 또 그는 ”도둑“(요한 12,6)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더구나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며 그 수난에 함께 동참하는 모습을 모여주고 있습니다. 이 ”고난의 시간“(요한 12,27)은 향기로운 향유를 바름으로써 그 고통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며 수난과 죽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이 보이는 그녀의 행동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마르 26,13; 마태 14,9) 그런 행동이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금방 성과가 드러나는 것이 더 눈길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만큼 현실세계에 사로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 가치 없어 보이는, 유다의 시각으로는 낭비로 밖에 비치지 않은 마리아의 행동은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예수님께 드린 것이었고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수난은 바로 가까이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분의 수난은 인간의 눈으로는 실패로 밖에 비추이지 않겠지만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당신 수난을 통하여 하느님의 무한한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유다의 마음이 아니라 마리아의 마음처럼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여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떠한 이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무한하였듯이 우리가 드리는 사랑 또한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