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와 다섯 자매 (여자의 상속권)

 

모세와 다섯 자매 (여자의 상속권)


                                                                     김종민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여러분과 하느님의 소중한 피조물인 여성의, 그 고귀한 존엄성에 대해서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사실 지난 수세기 동안 여성은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이고 지구촌 곳곳에서 상대적으로 고유한 인격성을 수탈 당해 왔음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남성위주의 사고 방식과, 특히 왜곡된 유교 문화 안에서 표출되어온 가부장적 분위기의 소산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성차별’의 해소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도 하고, 또 그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세상 안에서의 제몫을 찾으려는 노력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 의도 안에 포함시키셨던 그 존엄성이 충분히 채워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여성의 문제는 아직도 많은 숙제를 사회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남겨놓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난 세기의 여성에 대한 억압의 반대 현상으로 오늘날 나타나는 현상들은 사실 걱정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특히 性에대한 자유화는 오히려 성을 상품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으며, 일부의 여성 운동은 남성들과의 대결 구도를 취함으로 인해 갈등과 불화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성의 소중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 의의를 찾아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민수기 27장에 나오는 ‘다섯 자매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해줍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섯 자매는 아들 없이 죽은 슬롭핫이라는 사람의 딸들입니다. 40년간의 광야 여정을 마친 후에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에게 유산으로 땅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당시의 관습상 여성은 유산 상속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다섯 자매의 아버지인 슬롭핫은 이미 광야에서 세상을 떠났고, 또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남자 형제조차 없었습니다. 분명히 당당한 이스라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서 정작 그들이 받을 유산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섯 자매들은 모세에게 호소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없다고 해서 다들의 이름이 문중에서 사라져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아버지의 근친들이 그 땅을 차지할 때 저희에게도 얼마쯤 나누어주십시오.” 이러한 이들의 호소는 모세로 하여금 야훼 하느님의 뜻을 여쭙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정하신 하느님께서는 흔쾌히 그 호소를 들어 허락하시며, 여성에 대한 상속권을 당당한 하나의 법규로 제정토록 하십니다.




사실 구약 성서에서 ‘땅’이 지니는 중요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토지 소유의 몫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여인들의 호소는 단순히 경제적 불이익에 대한 불평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자기 자신들도 당당한 하느님의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둘도 없이 고귀한 피조물로서의 마땅한 권리를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왜냐면 당시 가문이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죽어서도 그 이름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했고, 하느님의 축복을 분명히 받고 있다는 가장 가시적인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중요한 땅의 의미에 비추어 볼 때, 그 이전까지 여성이 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길이 법적으로 없었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근본적 차별의 부당성은 하느님의 새로운 법 제정으로 배제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여인들의 지혜로운 태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 여인들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처사에 대해 무조건 불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체념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토지를 상속하려하지 않는 모세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당한 처지를 하느님께서 반드시 바로 잡아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분명하고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였고, 그들의 타당한 주장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날까지 많은 여성들이 사회 안에서 약자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은 우리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성차별은 잔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교회의 성직자만의 탓도 아니오, 교회의 남성들만의 탓도 아니오, 교회의 여성들만의 탓도 아닙니다. 이 문제는 모든 이들의 함께 협력해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누구 한 사람, 혹은 한 무리의 사람들의 노력으로는 참으로 해결의 길이 험난할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여인들 이야기 속에서 그러한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 역시, 여인들의 지혜로운 대처와 모세의 현명한 처사와 하느님의 정의가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도 행전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초대 교회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교회의 구성원 중 어느 누구 하나도 소외됨 없이 한 데 어우러진,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까? 그 교회의 모범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오늘 재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그냥 덮어두어선 안됩니다. 무조건 참고 덮어두는 것이 미덕이 아닙니다. 그러한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해결과 개선의 길을 모색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다른 이들의 지적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겠습니다. 특히 자신의 기득권에만 집착하여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그곳을 살아있는 교회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갖는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권리와 뜻을 기어코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고집스러운 방식은 오히려 더 많은 반목과 갈등의 원인이 될 뿐이며, 그것이 하느님의 뜻과 가까울 리 없습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이 공동체는 결코 완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고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을지 진지하고 현명하게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공동체의 모습은 하느님 나라의 천상적 모습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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