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주님의 만찬(2)

 

오늘로 세 번째 강좌가 시작됩니다. 한 주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이 강좌를 찾아주시는 분도 차츰 많아지는 것 같아서 기쁘고 또 의욕을 느끼게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지난주에는 마태오의 소명을 다뤘지만 이번 주에는 우리의 첫 강좌의 주제인 주님의 만찬을 계속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반응이 궁금하군요. 희망 사항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강좌는 쌍방향이라고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2.1 바울로(계속)


2.1.2. 1고린 10, 14-22.


이 단락은 주님의 만찬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지는 않는다. 주제는 주님의 만찬에도 참석하고 우상들에게 바친 제사와 제찬에도 동시에 참석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다. 결론은, 주님의 만찬에 참석하는 고린토의 교우들은 이교도들의 제사와 제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밝히는 가운데 바울로는 주님의 만찬과 우상들에게 바친 제사를 비교하면서 주님의 만찬의 성격과 그 의미를 밝혀준다.




1, 분석.


14절은 이 단락을 이끌어 들인다.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을 잘 새겨서 판단해 보고 우상숭배를 멀리하라고 명령한다. 우선 주님의 만찬에 참석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성체성사 또는 성찬례의 의미를 되새겨보라고 초대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이 성찬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바울로는 16절에서 기존의 전승을 인용한다: 축복의 잔과 빵을 나누는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한몫 나눠 받는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 그리스도와의 성사적이며 인격적 친교와 일치가 교회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밝혀준다(17절). 18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선례를 들어 제사에 참석하고 제찬을 음복(飮福)하는 동안에 이 제찬에 동석하는 사람들은 이 제사를 드리는 제단과 일치를 이루고 친교를 나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달리 말해 이 제단에서 희생되는 제물을 봉헌 받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들이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런 비교를 통해서 넌지시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이 이교도들도 자기네 제사와 제찬 음복을 통해서 이 제물을 봉헌 받는 우상과 잡신들과 일치를 이루고 친교를 나눈다는 것이다. 그러니 19절에서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사에게 바쳐지는 제물을 흠향(歆饗)하는 우상들은 실존하는 존재들도 아니고 또 이들이 사이비신(似而非神)과 같은 존재로 인정받고 있어도 그들의 배후에 어떤 존재들이 있다면 그것은 귀신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이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친다고 하지만 실은 귀신들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느님 또는 신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20절). 그러기에 이런 이교도들의 제사에 동참한다는 것은 귀신들과 친교를 나누고 일치를 이루며 그들을 마치 주님처럼 모시고 섬기며 그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하다: 주님의 잔과 주님의 식탁은 귀신들의 잔이나 식탁과 양립이 불가능하고 공존이 불가능하다.




2. 맥락.


10장의 전반부와 마찬가지로 이 단락 역시 우상숭배를 일절 가까이 하지 말 것을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만큼 고린토 교회에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이견과 혼란이 심했기 때문에 바울로는 이런 폐단을 시정하고 주님의 만찬의 위상을 다시 한번 제 자리에 매김으로써 올바른 성만찬 거행을 독촉한다고 할 것이다. 이어서 바울로는 이런 성찬에서 얻은 결론을 바탕으로 고린토 교우들에게 우상숭배와 특히 우상들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를 두고 실천적인 지침을 몇 가지 시달한다(10, 23-11,1).그리스도인들은 우상들에게 바친 제찬, 특히 시장에서 파는 육류를 양심에 거리낌 없이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대원칙을 제시하고 그러나 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의 문제는 이미 8장 1절에서부터 거론되었다. 8, 1-13에서는 이 문제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이란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그런데 각자 자신만의 자유와 양심을 분별없이 행사하고 내세우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우리가 우상도 존재치 않고 잡신도 없고 이교신(異敎神)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확신하고 비록 우상들에게 일단 제물로 봉헌한 다음 시장에 내다 파는 게 관례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의 확신과 거기에 근거하는 자유에 입각하여 이런 고기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바울로의 지론이다. 그러나 일부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확고한 판단과 확신을 갖지 않을 수 있다. 이 교우들은 신앙 면에서 어찌 보면 심성이 약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라니 이것을 감히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 면에서 심성이 강한 사람들이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먹는 것을 보고 우상에게 바친 고리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니까 우상과 잡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이, 따라서 양심에 일말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이런 고기를 먹는다면, 그것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소심하고 민감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스캔들이 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바울로라면- 일생 동안이라도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금육 선언을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형제자매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서 그리고 그 형제의 양심을 존중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겠다는 것이다.


이어 9, 1-2에서 바울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행사하는 데 있어서 어떤 심정과 동기로 이를 자제하고 있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9, 3-14에서는 자신의 자유를 자제하는 것은 그럴 권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불가피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했다고 해서 대수로울 것은 없다는 논리이다. 이 자유의 자제와 유보는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지장이 되지 않고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라고 바울로는 단언한다. 사랑은 자유를 자제하게 하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복음의 투명도와 신임도가 자기로 해서 떨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13-14에서 바울로는 사도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을 선언하고 주장하는데 아무런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얼마나 당당한 자세인가?! 그렇지만 그는 이 권리를 포기한다(9, 15-18).


자유의 자제와 유보를 요구하는 다른 또 하나의 동기가 있다. 바로 선교라는 동기이다. 9, 19-23은 이 동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해 준다. 바울로는 자신의 이런 행동 양식과 동기의 최종 목표는 스스로는 복음 선포하면서도 자신은 그 복음이 약속하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거기서 탈락한다면 그거야 말로 가장 큰 낭패요 자기모순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데 있다고 밝혀준다. 운동 경기에서 승리를 겨냥해 모든 힘을 다 기울이는 출전 선수와 같은 심정이라는 것이다(9, 24-27).


이러한 그의 자세는 자만심과 근거 없는 자신감과는 거리가 멀다. 자만심과 자신감, 이것은 하나의 착각일 수도 있고 오만일 수도 있으며 진실을 호도하는 자기기만일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로는 이런 자기기만에 큰 낭패를 본 시나이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의 선례를 들어 타산지석으로 삼으라고 경고한다(10, 1-3). 이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었고 기적의 만나와 물을 마시면서 광야를 횡단했다. 그들은 이집트의 종살이 질곡에서 해방되어 이런 특전을 누리게 되었으므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남용했다고 할 만큼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자만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런 자기기만과 허위의식을 깨우치고 그 과망(過望)과 자만을 처벌하기 위해 그중의 대부분을 광야에서 쓰러지게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를 밟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확실하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고 성령의 은사를 입어 영을 체험하고 구원의 인식을 얻게 되었고 주님의 만찬에 참석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상황에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겁을 낼 것인가? 겁이 나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지 못한데서야 말이 되겠는가? 다 소심한 탓이다, 강한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이 강한 교우들, 뱃장이 두둑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에 차 있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자만심이요 자기기만이다. 바울로는 이런 교우들을 타일러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이 단락에서 우상숭배와 주님의 만찬을 비교하면서 양자는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언한다. 우상숭배를 멀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주해.


14절. 신앙은 가끔 기피하고 외면하고 멀리해야 할 것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우상숭배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만용과 “나만은 염려 없다”는 자만으로 해서 넘어지고 구원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위험을 멀리하고 회피하는 것이 상책일 때가 있는 것이다. 시나이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타선지석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시련과 유혹이 없으란 법이 없다. 그러기에 하느님이 신의에 신뢰하고 의탁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시련과 유혹을 의도적으로 일부러 찾아 나서고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고 또 사실 그래서도 안 된다. 하느님을 시험하는 도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유혹을 피할 수 있는, 빠져나갈 구멍을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조작하거나 조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으레 도와주시겠지 하는 자만심과 지나친 기대는, 악마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게 하려던 유혹과 그 성격이 아주 비슷하다: 사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원을 믿고 아무런 필요나 이유도 없이 덮어놓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은 하느님이 당신의 아드님을 안전하게 보호해주시는지를 떠보는 행위이다. 만약 도와주시지 않으신다면 예수의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원은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되고 하나의 허위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악마가 노린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도와주신다면 이 사실로 해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원이 확인될 것이고 예수는 자신의 이런 신원을 과시하고 하느님은 곧 “나의 배경”이라고 뻐기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 허영과 자시과시 역시 하나의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사랑 받는 이들”이라는 호칭으로 바울로는 독자들에게 애정을 표시하고 동시에 그들의 호감을 사서 자신의 말에 더욱 귀 기울이게 하려는 의도를 여기에 나타난다.




15절. 바울로는 독자들이 분별력이 있는, 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신임과 신뢰를 드러내면서 호소한다. 바울로가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생각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꼬는 것도 아니고 아부는 더욱 아니다. 바울로는 독자인 고린토 교우들의 건전한 상식과 판단력을 인정한다. 그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대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바울로는 이런 의미에서 권위주의자가 아니다. 사도로서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고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설득하려 한다. 신앙에 입각한 올바른 판단을 자주적으로 내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준이 바울로의 사도로서의 말씀이요 그 근거가 바로 주님의 잔치에 관한 공동체의 전승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16절. 그런데 이 공동체의 주님의 만찬 전승에 따르면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한몫 나눠 받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음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가)”축복의 잔”의 축복은 능동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잔이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축복이란 인간이 하느님께 기도하여 얻을 수 있는 그분의 혜택이나 선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축복이란 사실은 이 잔을 들면서 바치는 찬양의 기도를 의미한다. 하느님께 찬양의 기도를 바친다는 것을 “축복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축복은 복을 내려주십사 하고 비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이다. 우리가 잔을 들고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지, 잔이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축복의 잔이라는 이 말과 의식은 유다교에서 유래한다. 그렇다고 과월절 만찬 때 돌려 마시는 셋째 잔이라고 못 박을 필요는 없다. 유다교 관습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음식을 은헤로히 내려주시는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기도였다. 수동적으로 표현하면 축복을 받는 것은 잔이지 우리가 아니다. 잔이 가져다주는 축복도 아니고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물도 아니다. 그것은 이 잔을 들면서 바치는 감사의 기도요 찬양의 기도이다. 한마디로 eulogein(찬양하다)과 eucharistein(감사하다)는 사실상 같은 뜻이다.


나)”우리가 찬양하는… 것”이라는 관계문도 그 뜻이 분명치 않다. “축복의 잔”에서 ‘축복’이라는 말의 동어반복일 수도 있다: “우리가 찬양하는 찬양의 잔은…“ “찬양한다”는 직설법 현재 시칭은 이 성만찬 거행이 반복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나중에 다시 볼 기회가 있겠지만, 아마 매주 일요일, 그러니까 주일마다 반복해서 이 성만찬을 거행했을 것이다.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 1인칭은 만찬에 동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감사의 기도를 들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해석이 있으나 좀 지나치다. 마치 성만찬의 주례자가 집단적이라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Schrage에 반대). 차라리, 동석한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공동체적으로 주님의 잔을 돌려 마시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뜻으로 “우리가 찬양한다”고 알아들으면 무난하다.


다) 보통 “친교”라는 말로 번역되는 koinonia를 무슨 뜻으로 알아들어야 하는가? 가장 논란이 심한 질문이다. 기본적인 의미는 분명하다: 무엇인가를 나누어 가짐으로써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친교를 의미한다. 잔을 주고받음으로써 생기는 친교를 안중에 두고 있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다만 각자의 잔을 서로 상대방에게 주고받으면서 나누는 것이라기보다는(한국식으로 말이다!), 잔 하나를 가지고 서로 돌려 마신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눠주고 나눠 받아 함께 모시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빵과 포도주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 먹고 마시는 자리에 동석한 그리스도인들끼리도 서로 친교를 나눈다는 것을 바울로는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차적인 친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눠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나누는 -이를테면- 수직적인 친교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교우들끼리 나누는 수평적인 친교는 이 수직적 친교에서 나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살을 먹고 이 피를 마신다는 것을 실제로 생살을 먹고 생피를 마신다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곤란하다. 또는 살과 피의 “실체”를 모신다는 것도 오늘의 철학적 또는 자연과학적, 특히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의 유다인들에게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생피를 마신다는 것은 끔찍한 짓이고 가공할 신성모독으로 느껴졌다. 이교도들조차도 이른바 신연(神宴=theoxonia)을 베풀고 한 자리에서 서로 먹고 마시지만 이 잔치의 주인이요 잔치 음식을 제공하는 이는 신들이지, 사람이 신을 마치 음식처럼 먹고 마시는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것은 하나의 -식인이 아니라- “식신”(食神=theophagia))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빵과 포도주를 만찬에 동석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리켜주는 단순한 상징일 뿐이라고 한다는 것은 적어도 일방적인 해석이다. 이 빵과 포도주를 다른 보통 빵과 포도주와 구별하도록 축별(祝別)해주는 것은 이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라고 말한다는 것도 다소 일방적인 정신주의적 해석이 아닐까 싶다. 바울로는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는 교우들의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빵과 이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하게 하고 현존하시게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달리 말해 성만찬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는 단순히 영적으로만 그리고 상징적으로만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바울로는 말이 없다. 분명한 것은 빵과 포도주를 매개로 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빵과 포도주에 임재하시고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빵과 포도주는 그것이 상징하는 분을 대신하고 하나의 실재로 작용하게 한다. 빵과 포도주는 결코 공허한 상징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우상숭배의 제사 끝에 나누는 이교도들의 제사 음복에 참여하지 마라는 바울로의 지시도 만일 이 제사 참여가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다면, 전혀 근거 없는 지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아무런 설득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이교도들도 제사와 음복으로 신들과 친교를 나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에 따르면-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 또는 그 배후의 잡신들과 실제로 친교를 나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에 빠진 이교도들의 제사에 참석한다면 적어도 그리스도인도 우상숭배자, 다신(多神)숭배자들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오해의 소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하나의 사회적인 몸짓이 기능상 객관적으로 가져다주는 오해이며, 이런 사회성을 띠는 제사 참여는 불가피하게 이런 모호성을 선천적으로 띠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로는 주목하는 듯하다. 그리스도인의 행태는 분명해야 한다. 자기가 믿는 신앙과 어긋나게 행동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스캔들을 받을 것이고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의 신임도와 설득력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교도들의 제사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교도들도 잘 알고 있지만 인간적인 친교를 위해서 이들 이교도의 제사에 참석하러 온다는 것은 제3자들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여러 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가톨릭 정치인들을 한번 생각해볼 것이다. 일제 때의 신사참배와 가정집에서 드리는 제사 참여도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성만찬 참례는 동석자들로 하여금 정말로 그리스도의 운명과 그 죽음의 효능에 참여하게 하지만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이나 원소 그 자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는 것이 아니다. 친교는 어디까지나 성사적인 친교이지 그 무슨 물리-화학적 작용이나 반응이 아니다. 그리하여 잔을 마시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한다. 이 동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으심으로 이뤄주신 종말론적 구원을 한몫 나누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한, 우리를 대신한 헌신의 이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후만찬 전승의 해석 말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다(“여러분을 위해서”). 이 죽음은 십자가에서 달리신 분의 죽음이요, 지금은 부활하여 드높여진 분으로 이 만찬에 현존하신다. 이로써 만찬 참석자들은 예수의 죽음이 가져다 준 속량(贖良)과 구원 효과에 동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죽음과 운명 자체에 동참하는, 말하자면, koinonia 연관 체계 안에 참가하게 된다. 결국 그것은 그분과의 인격적 친교를 실현해 준다. 그래서 바울로처럼 말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빵을 쪼갠다”는 표현 자체도 주님의 만찬 전승의 용어가 유다교에서 유래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빵을 쪼개다”는 성만찬 때 받아 모시는 축별된 빵을 쪼개서 나눠 먹는다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을 부수고 조각낸다는 것을 상징하는 뜻이 아니다.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빵은 서로 나눠주고 나눠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중에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사적으로 모시는 것이지 생화학적으로 모시는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만 모시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바울로에게서 예외 없이 언제나 교회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거나, 적어도 여기서만은 그런 뜻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터무니는 조금도 없다. 11,24를 보아서도 그렇고 여기 10, 16a의 병행하는 구절과도 전혀 맞지 않는 억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시킨다는 이 성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분의 몸인가 아니면 부활하여 드높여진 그분의 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양자택일에 있지 않다. 로마 7,4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분명히 십자가에 달리신 몸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이 그리스도는 동시에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몸은 피에 병행하는 표현이고 보면 이 몸을 피와는 다른 의미로, 가령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으로 알아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라는 존칭도 일차적으로 부활하신 분을 가리키다. 억지로 표현해 본다면, 빵이라는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만찬을 베푸시는 분은 그러기에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이고 동시에 부활하신 분이다.




17절.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몸은 동시에 교회론적 차원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주님의 만찬이 자리매김하는 곳은 바로 교회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세례가 그리스도의 몸에 합체 시켜주는 이치와 같다. 교회가 성만찬으로 비로소 처음으로 창설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이 합체가 이 만찬을 거행할 때 마다 이뤄지는 현장이 주님의 만찬 자리이고 보면 성만찬은 교회의 자기실현의 현장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과를 묶어주는 이 성사적 친교는 교우들 상호간에도 친교를 맺게 하여 하나의 몸을 이루게 한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빵이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럿이지만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빵은 성만찬에서 나눠주는 빵이고 몸은 교회로서의 전체적 의미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라는 교회가 이 빵을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빵을 먹고 교회가 되는 것이다. 몸, 즉 교회의 몸이 하나라는 사실은 성찬례에서 나누는 빵이 하나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교회라는 몸은 상징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다: 교회는 한 몸이고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여럿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성찬례 자리에서 한 몸을 이룬다. “빵이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매우 특이하다. 실제로 만찬 때 주님의 몸으로 나누던 빵이 한 덩어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빵이 하나라는 강조는 그리스도의 몸의 단일성과 일치를 잘 표현해준다고 할 것이다. 바울로는 성령의 은사를 입었다고 뽐내던 개인주의자들을 나무라기도 한다: 성체성사는 성령의 은사를 입은 소수의 소위 성령 신자들에게 불사불멸을 중개해주는 것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성령을 통해 현존하시는 주님을 우리에게 모셔오는 것이다. 바울로는 그러나 모두가 다 한 빵을 먹고 한 잔을 마시지만 모두가 다 같은 구원의 혜택을 나눠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18절: 그래서 바울로는 이스라엘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10, 1의 주제로 다시 돌아온다: 이 선례에 비추어 성찬례와 우상숭배는 양립할 수 없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이스라엘을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스라엘인가? 문자대로 직역하면 “육에 따른 이스라엘”이다. 우리나라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번역”은 “이스라엘의 관습”이라고 번역했고 우리 가톨릭의 200주년 신약성서는 “역사상의 이스라엘”이라고 번역했다. 공동번역의 “이스라엘의 관습”은 번역이라고 손치더라도 너무 느슨하고 다소 오해 받을 위험도 없지 않다. 200주년의 “역사상의 이스라엘”은 “과거의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반드시 과거의 이스라엘만을 안중에 두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번역도 일관성 있게 사용하기가 거북하다. 바울로가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상의 이스라엘, 과거의 이스라엘이지만 동시에 현재도 과거와 다름없는 이스라엘,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고집을 피면서 살아왔고 바울로의 현재에도 계속 그렇게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개념이다. 현재의 문맥에서는 10, 1 이하에서 서술하는 이스라엘이다. 즉 시나이 광야를 유랑하는 동안 야훼께 반항을 일삼고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이다. 그러니까 “육에 의한 이스라엘”은 그 무슨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립되는 개념도 아니고, 또 교회야말로 영적 이스라엘이며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전제 아래서 여기에 대립되는 이스라엘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바울로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시각이다. 어쨌든 여기서는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을 안중에 두고 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야훼 하느님께 불만을 터뜨리고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이다(10, 6-10 참조!). 여기서 말하는 제단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또는 시나이 광야 시절 성막에서 율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고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Kremer에 반대). 여기서는 19절을 신명 32, 17의 인용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도 이 제단은 황금 송아지 우상에 제사를 바치던 제단으로 알아듣는 게 옳다(출애 32,5 참조). 이 선례를 놓고 볼 때 제물을 제단에 바치면 그 제물을 한몫 나눠 받고 제사에 동참하는 것만이 아니다. 제물 음복과 함께 이 제물을 흠향하는 것으로 믿어지는, 그 제사를 받는 대상과 결합하게 되고 결국은 귀신들과 친교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19절. 그런데 이 결론은 16-18절에서 이끌어낸 결론이 아니라 18절에서만 이끌어낸 결론이다. 물론 가정적인 결론이다. 가정적이라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앞에서 제물을 바치고 음복하던 그 황금 송아지는 우상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제물은 살코기일 뿐이며 우상들이란 쇠붙이나 돌이나 나무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울로는 이미 8, 4에서 한 말을 취소할 생각이 없다.




20절.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들이 제물을 갖다 바치는 우상들이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바친 제물은 무해무득한 것, 종교적 신성성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가치론적으로 전혀 중립적인 음식에 지나지 않지 않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스라엘이 바친 제사는 귀신들에게 바친 것이지 하느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20절). 그런데 이 말은 신명 32,17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로에 따르면 우상이 다르고 귀신이 다르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상은 실재하지 않지만 이 우상들이 표상하는, “소위 신이라는 것들“은 존재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꽤나 까다로운 질문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귀신들은 이 “소위 신이라는 것들”이 아닌가 싶다(8, 4등).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도 이교도들의 종교 의식은 귀신들에게 거행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우상과 귀신을 명확하게 구별하지도 않았고 또 이방인들의 ‘신’들은 “신이 아닌 신들”(非神)이라고 표현했지만 말이다(신명 32,17 외에도 시편 106, 37; 바룩 4, 7; 시편 95, 5[70인역]도 참고할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귀신들이란 일종의 영적인 존재로서 악령과 같은 사이비신(似而非神)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제사를 바치는 사람들은 막연하게 3인칭 복수를 비인칭 동사로 표현하고 있다. 정작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십중팔구 이교도들일 것이다. 바울로에게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성만찬 거행의 친교가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이교도들의 제사와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이웃 사랑에도 한계가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귀신들에게 바치는 제사에 동참할 수 없다. 동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주님과 귀신들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치다, 제사 드리다”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이것을 두고 바울로 또는 그가 이어받고 있는 만찬 전승에서도 주님의 만찬을 제사라는 개념으로 파악했다고 주장할 것은 못된다. 물론 제사라는 개념을 배제해서도 안 될 것이다. 본문에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바울로는 이교도들이 귀신들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지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제사 드린다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의 만찬도 제사로 생각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성만찬이 제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Schrage에 반대). 20절 이하에서는 이미 말한 대로 귀신들과 친교를 나누지 마라는 지시를 강조한다. 이교도들의 제사 자리를 귀신들이 득실거리는 강신(降神)의 한마당으로, 야바위꾼들의 한마당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다. 제사 참배 금지의 이유는 오히려 단순하다: 귀신들과의 친교는 주님과의 친교를 망치기 때문이다. 귀신들의 지배권과 그 권역을 인정한다면 주님은 귀신들의 라이벌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주권은 전우주적이라는 게 바울로의 확신이다.




21절. 10, 1 이하에서는 이스라엘의 선례를 서술할 때 그리스도교의 성찬례의 표현과 용어를 이용했었다. 여기 21절 이하에서는 이교도들의 제사 용어를 활용한다고 할 수 있다. 포도주 잔으로 말하면, 이교도들의 전제(奠祭: 물이나 술과 같은 액체를 쏟아 부어 바치는 제사)에 사용되는 잔도 주님의 잔과 마찬가지로 poterion이라고 불렀다. 보통 포도주를 잔에 따라 제단 위에 쏟아 붓는 의식에 사용되던 잔이다. 식탁은 16절b와는 달리 이교도들의 제사의식에 그 유례가 없어 빵 대신 사용한 대리 용어인 듯하다: 이교들은 제사 때 빵을 쪼개어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빵 대신 식탁이라는 용어를 빌려 쓴 듯하다. 말라 7, 12에서는 주님의 식탁이 야훼의 제단을 뜻하지만 구약성서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주님의’ 라는 속격 보어가 없어도, 성막이나 성전에 빵을 차려놓던 젯상을 가리켰다. 이사 65,11(70인역)에는 악마에게 차려준 식탁, 요세푸스 아세넷(소설류의 유다교 외경) 12, 5에는 하느님의 식탁이라는 표현이 나온다는 것도 참고해 두기 바란다. 바울로는 이 식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주님께 차려드리는, 신성한 식탁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주님께서 차려주시고 초대하시는 식탁으로 생각했다고 봄이 옳다. ‘귀신들의 식탁’도 귀신들이 숭배자들에게 차려주는 식탁으로서 이들을 자신들에게 묶어두려는 의도에서 마련한 종교 의식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귀신들이 제사를 받고 흠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마 이렇게 알아들어야 바울로가 왜 주님의 잔치와 귀신들의 잔치에 동시에 참석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지 그 이유를 좀더 분명하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귀신들이 차려주는 잔치를 들면 결국 귀신들의 지배권에 예속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22절.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식탁과 귀신들의 식탁을 계속해서 함께 나누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에 대한 도전이고 하나의 도발 행위이며 여기에서 당연히 예상되는 주님의 분노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주님보다 힘이 세어서 이런 분노를 제압할 수라도 있다는 말인가? 바울로의 반문이다. 굳이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다. 여기 “화를 돋우다, 질투하게 하다”는 신명 32, 21에서 따온 듯하다. 이것 역시 10, 1 이하에서처럼 시나이 광야에서 우상숭배로 야훼의 속을 끓이게 했던 그 이스라엘의 세대를 연상시킨다. “그분보다 더 힘이 세다는 것입니까?”라는 수사적인 질문은 고린토 교회의 이른 바 “강한 교우들”을 빗대는 표현일 수도 있다. 이들은 아마 영적 은사로 잔뜩 부풀어 올라 귀신들의 제사에 참석해도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질투의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 보다는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21절과 9절을 함께 감안하면 이 해석이 옳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4. 요약과 해석학적 반성.


주님의 만찬이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이 단락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주님의 만찬은 그분의 몸과 피를 성사적으로 받아 모시게 하여 그분의 죽음과 운명,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였으니만큼, 그분의 부활 생명에 동참하게 한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과거가 부활하신 분이 초대하는 이 잔치에서 재현되는 동시에, 우리를 그 죽음에 동참하게 하여 그 죽음의 효과를 얻어 입게 하신다. 그리고 여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가 이제 부활하여 몸소 우리를 초대하시는 이 식탁에 그분은 잔치의 주인으로서 우리에게 현존하시기에 그분의 몸과 피를 성사적으로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그분과 친교를 나누는 곳이 바로 이 주님의 만찬 자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잔치에 동석하는 교우들끼리의 수평적인 친교도 이 수직적인 친교에서 유래하고 거기에 근거를 두며 이 만찬 자리에서 현실화된다. 그래서 주님의 만찬 자리는 교회가 자기실현을 수행하고 성취하는 현장이다. 이 두 가지 친교는 우리 삶의 현장에 고스란히 연장 확대되어야 한다. 이웃과의 나누기는 이렇게 그리스도인과 그 공동체인 교회의 정체성을 붙들어주는 생명 줄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 없이는 교회는 하나의 집단 이기주의자들의 패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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