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반대자들과 독자들은 누구였나?
1. 반대자들.
필자가 논박하고 그 위험을 경고하는 반대자들은 2, 5. 6; 3, 7에서, 그리고 의심 없이 유다 4에서 ‘불경건한 자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이 다음 세상 종말에 있을 처벌 심판 때 모조리 벌을 받아 멸망하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이들은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자들이다. 이들이 그 신앙을 저버리고 이제는 교회 공동체 안에 몰래 숨어 들어와서 허황한 자유를 약속하면서(2, 19) 공동체를 멸망의 위험에 빠트리려 한다는 것이다(2, 1). 이들의 이단은 무엇인가? 교리적으로는 자신들을 구원하신 주님을 부인하고 천사들을 업신여기며(2, 10-11) 윤리적으로는 자유를 구가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아무리 죄를 지어도 물릴 줄 모르는 자들로 묘사되어 나온다(2, 14). 이런 이단의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는 이 편지의 필자가 보기에 주의 재림과 심판을 부인한 데서 연유한 것 같다. 한 때 이 이단자들을 학계에서는 소위 ‘영지주의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보통 신자보다 우월한 인식을 가지고 있노라고 자부하고 따라서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은 몸으로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노라 고하면서 이들은 물질과 육체를 멸시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바로 이 육체를 멸시한다는 뜻으로 매우 문란한 생활을 했었다. 필자가 그려 주는 이단자들의 자기 모순에 빠진 생활 태도는 바로 이 영지주의라는 배경에서 가장 잘 해명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가 유난히 이들의 그릇된 자유와 도덕적 퇴폐를 고발하고 이들의 소위 ‘우월하다’는 지식에 참된 인식을 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여기에서 설명된다고도 했다(1, 2. 3. 5. 8. 12. 16; 2, 20. 21; 3, 17-18). 그러나 ‘인식’(γνώσις)과 ‘참된 인식’(ἐπίγνωσις)은 구별해야 할 것이다. ‘참된 인식’은 일종의 선교 용어로서 전통적으로 바울로를 위시하여 교회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던 것으로 특별히 ‘영지주의’와 관련 없이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용어였다. 반면에 ‘인식’이라는 말은 1, 5의 문맥에서 맨 처음 열거된 덕목도 아니고 신앙보다도 더 중요시 된 것도 아니고 신앙과 동일시되지도 않는다, 여기의 인식은 일종의 변별력(辨別力)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열거된 다른 여러 가지 덕목을 실천에 옮기는데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며,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인식’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 이단자들은 또한 육신의 부활을 그 자체로서 부인한다는 말을 우리 필자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를 정면으로나 우회적으로나 반박하지도 않는다. 재림을 부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지주의자들처럼 육체 그 자체를 업신여기기 때문에 육신의 부활을 부인했다는 말을 우리는 듣지 못한다. 또 필자가 3, 12에서 “하늘은 불에 타 없어질 것이요,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하고 말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처럼 물질 세계를 죄악시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유대교 계통의 묵시 문학 소재를 원용하여 처별 심판의 불가피성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이들이 교리 적으로 천사를 업신여겼다고 했다. 2, 10에서 필자가 이들은 ‘주권들을 얕잡아 보고 영광들을 모욕하는데 두려움이 없다’고 한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여기서 ‘주권들’과 ‘영광들’이란 천사들의 이름들인가? 이 이단자들이 천사들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대고 그 이름을 마술이나 마법 따위에 악용한대서 필자는 이들을 비난하고 있는가? 실상 유대교와 특히 엣세니들은 천사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그리고 천사들의 이름을 남용하지 못하게끔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한 선례가 사해 문헌에 전해진다고도 한다. 아니면 오히려 타락한 신령들 곧 타락한 천사들을 저주하던 저 엣세니들과 베드로 후서의 이단자들을 동일시해야 하는가?1) 최근 주해서를 낸 안톤 푁틀레(A. Vögtle)는 이 대목의 ‘영광들’을 그리스도가 심판하러 재림할 때 그리스도를 수행할 천사들을 의미할 것이라는, 매우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2) 그렇다고 이들의 신원이 더욱 확실하게 밝혀지는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재림 심판 때 그리스도와 함께 올 천사들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와 그분의 심판을 업신여긴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들이 재림을 부인한다는,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또 이 반대자들이 영지주의적 동기에서 바울로의 편지들과 그 나머지 다른 성서들을 오용 또는 남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말도 단언하기 어렵다. 이런 저런 이유와 이 아래에서 우리가 더 거론하게 될 다른 이유로 해서 이 반대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다는 말을 우리는 결코 자신 있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혹시 이단자들이 바울로의 편지들을 남용했다는 필자의 글에서(3, 16) 이들에 관한 좀더 자상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지는 않을까? 아닌게 아니라 필자에 의하면(2, 19) 이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했다고 한다. 이 경우 이들은 바울로의 자유의 메시지를 그 권위 있는 근거로 끌어들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사실 바울로는 예컨대 2고린 3, 17에서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갈라 5, 1. 13도 이 자리에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구절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는 꼭 이런 식으로 이단자들이 바울로를 이용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또 이 이단자들이 유다 19b에서처럼 성령을 모시고 있노라 는 주장을 폈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주장을 우리 필자가 펴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따라서 이 반대자들이 성령 ‘소유’를 호언하던 광신주의자들이었다는 일부 성서학자들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셈이다.
이단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부인했고 윤리적으로는 자유방임의 퇴폐적 생활을 하면서 인습적인 도덕적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뜻에서 자유를 구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 있게 부인할 수 있으려면 자기들은 이미 구원을 하나의 완전한 현실로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의미 있게 제시하거나 주장할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그들의 말을 믿었겠는가? 그렇다면 이들의 구원의 현재적 향유(享有) 주장과 재림 부인 사이의 인과 관계는 어떤 것인가? 푁틀레의 판단으로는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상호 교호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첫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죽었는데도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보면 재림은 아예 기대할 필요조차 없지 않느냐 하는 의구심(疑懼心)을 자아내고 마침내는 재림은 아예 없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재림이 예상 밖으로 지연되자 구원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는 애초의 주장은 더욱 굳어지고 동시에 윤리 분야에서 모든 행동거지(行動擧止)가 갈수록 느슨해지고 문란해졌을 것이다. 반면에, 현재 구원을 향유한다는 확신은 장차 있을 구원의 완성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게 하고 나아가 재림 신앙 자체를 부인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들을 이미 부활한 자들로 생각했다는 증거도 없으며 하느님의 본성을 지금 완전히 나눠 받고 있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1, 4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은 우리 편지의 필자가 유대교와 헬라 세계에서 흔히 사용되던 표현으로 세말의 재림과 심판 끝에 믿는 이들이 누리게 될 최종적 구원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 편지의 반대자들에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이들이 영지주의자들이라던가 또는 성령 체험을 바탕에 깔고 있는 광신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들은 분명 영지주의적 성향(性向)을 띠고 있었지만 아직은‘영지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기껏 물질 세계와 육체의 조건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어떤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이 고행주의(苦行主義)와 거세주의(去勢主義)의 경향을 띠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와는 정반대의 윤리적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는 말로 이 단락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2. 독자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장차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는 선포와 믿음은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신조(!)에 속한다. 이 기본 신조에 대해서 강한 의혹을 품게 됨으로써 마침내 세계의 종말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심각한 회의(懷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재림 및 종말에 대한 약질 신앙으로 보아 이 편지의 독자들이 이 방계 출신의 신도들이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또 독자들은 최근에 입교한 이 방계 신도들로서 과거의 그릇된 퇴폐적 생활에 쉽게 다시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이 적지 않았다(2, 18). 또 필자는 유다서를 이용하면서도 거기에 인용되어 나오는 유다교의 위서들을 인용하지 않고 탈락시킨 것도 독자들이 이방계 출신이어서 이런 위서들에 전해지는 일부 전승 요소들을 잘 모를까봐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추측된다. 특히 유다 6. 7. 9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유다 14f의 경우는 그러나 다르다: 유다 14는 알다시피 헤녹 1, 9의 인용이다. 2베드의 필자가 왜 이 헤녹 예언을 빠트렸는가? 푁틀레에 의하면, 유다 14 및 15는 그리스도가 틀림없이 재림하여 당신의 재림을 부인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처벌하리라고 예언하는 이 헤녹서의 구절은 – 2베드의 필자가 보기에 – 그 논거가 너무 ‘일반론적’이었다. 여기에 비해 우리 2베드의 필자는 3, 5-13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재림 부인론자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논박하고 싶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런 이유에서 2베드의 필자는 유다 14f를 인용하지 않고 탈락시켰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