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 시기는 베드로 사도 이후.

 

라. 집필 시기는 베드로 사도 이후.




1. 문학적 형식으로 보아서.


ㄱ. 이 편지가 수신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그리스도인 일반을 대상으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지적했다. 발신인과 수신인 사이의 상호 관계를 밝혀 주지 않는다는 점이 가령 바울로의 편지들과는 차이를 보여 준다: 발신인 베드로가 수신인들의 교회를 세웠다던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말이 없는 것이다. 광범위한 그리스도인 일반을 수신인으로 하여 편지를 쓰려면 발신인 개인의 이름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절대로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서나 인정을 받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빌어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유명한 사람일수록, 권위를 더 많이 인정받는 사람일수록 더욱 좋다. 또 그 사람이 현장의 목격 증인이고 청취 증인이라면 더욱 좋다. 그러기에 필자는 자기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 강조하는 것이다(1, 1a. 16. 17). 역으로, 그가 정말로 베드로 사도였다면 이렇게까지 강조할 필요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ㄴ. 이 편지가 유언(遺言)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는 것도 그 집필 연대가 사도 시대 이후에 속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필자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머잖아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1, 14). 그래서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독자들이 자기가 남겨 놓은 가르침을 계속 기억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가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 남아 있을 미래의 독자들을 위해 현재 아직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베드로”가 편지의 형식으로 남기는 유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 된지 오래이고, 필자는 다만 그 베드로의 이름을 빌어 쓴 편지로 보아야 마땅하다. 소위 <유언> 문학이라는 유대교의 유형은 성격상 과거의 유명 인사의 이름을 빌어 현재의 독자들에게 필자가 원하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하나의 문학적 허구(虛構)요 가상(假想)이기 때문이다.


ㄷ. 마지막으로 이제까지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사도들의 그리스도 선포를 문헌으로 고정시키겠다는 필자의 발상과 의도 자체가 이 편지의 집필 시기를 사도 시대 이후의 것으로 어림잡게 한다. 이른바 사도 전승을 문헌으로 고정시켜 이를 신앙의 기준, 곧 정통성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의지는 사도들의 전승이 일단 마감되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사도 전승의 문헌화가 바로 신약 성서라는 새로운 성서의 형성으로 매듭지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2베드는 이 사도 전승의 문헌화하고 마침내 성서로 집대성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첫 증인이라고 할 것이다. 2베드가 신약의 경전 중의 하나로 인정받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도 이런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사도들의 전승을 문헌으로 고정시킬 필요를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사도가 아니라는 것을 무언 중에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집필하는 이 편지가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기록된 성서>가 아니라는 것도 아울러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1, 10-21; 3, 15-16).




2. 신약성서의 다른 저서들과의 비교.


ㄱ. 필자는 3, 1에서 ‘두 번째로’ 이 편지를 쓴다고 한다. 그렇다면 ‘첫 번째로’ 쓴 편지는 1베드일 수밖에 없다. 1베드가 베드로의 사후(死後)에 집필된 것이라면 2베드는 두말 할 것도 없다.


ㄴ. 2베드는 베드로 사도가 죽은 후 적어도 수 십 년 후에 집필되었을 유다서를 원용하였다. 그 반대의 가정은 납득하기 어렵다: 유다서의 필자가 2베드를 요약해서 유다서를 작성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그러면서도 그 유다서를 베드로보다 그 지명도(知名度)가 훨씬 낮은 ‘유다’ 사도의 이름으로 펴냈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2베드의 필자와 유다서의 필자가 각각 어떤 제3의 자료나 원전을 이용했으리라는 가설은 전혀 근거 없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2베드의 필자는 소재면에서 자기의 목적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유다서에서 자유자재로 선택적으로 취재 · 이용했으며, 무엇보다도 예언 논증과 예표 논증이라는 방법론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자신의 편지에서 적극 활용했다고 본다.


ㄷ. 필자는 당대에 이미 바울로의 편지들이 일부 수집되어 있었다는 것을 암시 또는 전제한다(3, 16). 그렇다면 2베드의 필자가 베드로 사도라고 할 때 매우 곤혹스러운 시대착오가 벌어진다: 베드로 사도는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바울로의 편지가 수집될 때까지 살아 남아 있어야 했다는 것인데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순교한 것이 네로 황제 때라면(서기 64-68) 바울로의 편지들이 수집되었을 서기 1세기초까지는 무려 50 – 60년의 차이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3. 그 밖의 다른 시대착오들.


ㄱ. 베드로가 생전에 당시의 대부분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재림 임박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가 재림을 비웃는 윤리적 방임주의자들이 출현하리라는 예언을 할 만한 기회는 전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세상은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지속하리라”는 반대자들의 이견(異見)도(3, 4) 사도 시대와의 시간적 간격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겠다. 이런 시간적 간격을 같이 전제할 때 이단자들에 대한 필자의 반론도 더욱 효과적이다: 세상은 아무런 변함없이 계속하리라고 주장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세상은 그대들이 주장하듯이 언제 나처럼 지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 심판을 받아 없어질 것이며 그때 가서는 재림을 문제삼고 부인하던 자들도 모조리 멸망하리라!(3, 5-13) 이론(異論)과 반론이 다 같은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공통한다: 사도 시대를 포함하는 제1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다 사라져 없어졌고 그때부터 상당한 세월이 이미 흘렀다는 사실을 양쪽에서 함께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ㄴ. 3, 2에 보면 “여러분의 사도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사도단(使徒團)을 하나의 전체로 보는 개념이다(corpus apostolicum). 그뿐 아니라 이 사도단이 하나의 정통 신앙의 기준, 정통성의 기준, 말하자면 하나의 교의적 기준(敎義的基準)으로 격상되어 나온다는 사실에 유의할 것이다. 1, 1의 믿음은 물론 이 ‘기준’에 일치하는 믿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또한 이 믿음은 1, 12에서 말하는 ‘진리’와도 사실상 동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ㄷ. 베드로와 바울로는 한 입으로 똑같은 신앙을 전한 사도들의 으뜸이라는 높은 평가는 이 두 사도의 순교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현상으로 관찰된다(사도행전 외에 1글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의 편지들 참조!).


ㄹ. 바울로의 편지들은 ‘그 밖의 다른 성서들’과 같이 권위 있는 문헌으로 간주하고 이를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죽은 다음에 지켜 볼 수 있는 현상이다(3, 15-16).


ㅁ. ‘우리 하느님이요 구원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칭은 그분은 ‘하느님’이라는 존칭과 마찬가지로(요한 20, 28: 토마스의 고백! 및 이냐시오의 편지들 참조!) 1세기 이후에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1, 11의 ‘우리 주님이요 구원자’라는 2중 호칭과도 정확하게 어울린다. 그리고 현양되신 그리스도의 왕국을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하고(1, 11)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은 완전히 생략하고 그리스도께만 찬양을 드리는 영광송으로 편지를 마감하고 있는 것도(3, 18b) 매우 이색적이기도 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생존시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그리스도론적 칭호라는 점에서 역시 하나의 시대착오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ㅂ. 이 밖에도 몇 가지 표현들과 개념들은 이 편지가 베드로 이후의 것임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 하느님 본성의 분유(分有)(1, 4); ‘인식’이 갖는 구원론적 의미의 강조(1, 5. 6; 3, 18);


– 복음 선포를 회상(回想)과 상기(想起)라는 개념으로 파악한다(1, 12f. 15; 3, 1f);


– δεσποτης라는 그리스도의 호칭과 ‘거짓 교사들’(ψευδοδιδασκαλοι)라는 말. 폴리카르포가 필립비 인들에게 보낸 편지에(7, 3)에 ‘거짓 가르침’이라는 말이 겨우 나올 뿐 ‘거짓 교사들’이라는 말은 그 이전에 사용한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다.


– ‘개는 제가 토한 것을 먹는다’는 말은 당시 헬라 전통에서 그야말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던 속담이었다;


–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로’라는 호칭(3, 15) 역시 후대에 와서야 나타난 관용구이다;


–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생활 태도와 실천에 큰 차이가 있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도 역시 후대의 관심사라고 할 만하다(1, 3. 8; 2, 20; 1, 5. 6);


– 예수의 거룩한 변모를 재림의 예표로 알아듣는 새로운 해석도 이 편지가 후대의 것임을 말해 준다.


– 필자가 베드로 사도였다면 자신이 목격 증인이요 청취 증인이라는 사실을 그렇게까지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터였으니까.




4. 표면상의 다른 표지들.


ㄱ. 우리 편지의 필자가 정말로 베드로 사도였다면, 자신의 선포 사명이 실패로 끝났음을 사실상 시인하면서까지 거짓 예언자들, 거짓 교사들의 출현을 굳이 예고했을 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이것은 유언 문학 유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관행적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단자들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단죄하는 표현 양식이 베드로의 품위에 손상을 입히면 입혔지 거기에 걸 맞는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ㄴ.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표현 양식이 이교도와 이단자들을 상대로 하는 후대의 호교론적 논쟁 수법을 많이 닮았다고 하겠다.


ㄷ. 문학적 코이네 언어를 방불하리 만큼 그리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실력, 무려 57개에 달하는 신약의 hapaxlegomena(한번만 사용된 낱말들)는 물론이고 그밖에 잘 사용되지 않는 어휘 선택과 구사도 베드로 사후의 어떤 저자를 암시한다고 하겠다.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적 수사학적 기법에 상당히 정통하고 있었다는 평가도 같은 결론으로 이끌어 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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