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인용과 그 쓰임새.

 

성서의 인용과 그 쓰임새.


필자가 그의 성서 논증에 사용하는 구약성서의 본문은 분명히 일종의 칠십인 역본이 틀림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칠십인 역본과는 다른 본문을 인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칠십인 역본의 일종이라는 것은 히브리 원문을 오역하거나 다른 말로 번역한 사례에서 t가장 잘 드러난다. 가령 시편 40, 7(공동번역 40, 6)에 나오는 `귀’를 `몸’으로 번역하였고(히브 10, 5) 창세 47, 31의 `침상’을 `지팡이’로 번역했다(히브 11, 21). 현존하는 칠십인 역본과 맞지 않는 것은 필자가 본문을 인용할 때 엄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인용한데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가령 예레 31, 33-34를 히브 8, 10-12와 10, 16-17에 인용한 사례를 주의해 보면 인용이 비교적 느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원인으로서는 필자가 의도적으로 본문을 고쳐서 인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시편 21, 23과 히브 2, 12 그리고 시편 95, 7-11과 히브 3, 9-10을 비교해 보면 이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추측할 수 있는 원인으로서는 그가 사용한 칠십인 역 본래부터 현존하는 칠십인 역 달랐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 원문을 사용한 경우는 차라리 모호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인용하는 본문의 형태에 따라 거기에 적용하는 그리스도론적, 또는 구원론적 해석이 좌우된다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구약성서 이용이 중요성을 띠는 것이다. 좀더 근본적으로 말해서 히브리서의 성서 논증은 몇 가지 전제들을 필자와 독자 쌍방간에 인정할 때야 그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가령 그는 구약성서를 우선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전제하지 않고서는 그의 논증 자체를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1, 1; 4, 12-13). 또는 하느님의 영의 말씀으로 전제하기도 한다(3, 7; 10, 15). 그러나 구약의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즉 본래의 취지대로 이해할 수 있으려면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여러 예언자들을 시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는 마침내 그 아드님 안에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1, 2;, 2, 3). 달리 말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없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체험 없이는 필자의 이 해석학적 전개를 이해할 수도 없고 도대체 성립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산 말씀, 하느님의 결정적인 말씀인 그리스도야말로 구약성서의 하느님 말씀을 깨닫게 해준다는 이 해석학적 확신에 있어서는 우리의 필자나 여타의 신약성서의 저자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구약성서를 다루는 솜씨는 역시 대담하고 섬세하며 기술적으로 볼 때 매우 정교하다고 하겠다.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히브 1, 5-13에 전승에서 물려받은 찬미가에서 그가 논증을 위해 인용하는 시편 2, 7과 110, 1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어느 새 임금의 즉위식 때 전달되는 신탁이 아니다. 이 두 구절은 하느님이 그리스도에게 직접 전달해주신 신탁 말씀으로 이해되어 있다. 다른 인용문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구약성서의 인용 말씀이 하느님이 예수에게 건네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가 하느님에게 드리는 말씀으로도 기용된다: 예수님이 성경 말씀의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당신의 사명을 구약의 말씀으로 개진한다는 점에서 매우 이색적인 그리스도론적 전제라고 할 것이다(2, 12-13과 10, 5-10). 하기는 이 두 구절이 이 히브리서에서 직접 발설한 것으로 전해지는 유일한 예수의 말씀이기도 하다. 공관 복음서의 예수 말씀과 얼마나 다른가!? 우리 필자에게는 예수가 피와 살을 지니고 있는 한 구체적인 인간 존재라는 것, 그가 유다 부족 출신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가 남기신 말씀이나 가르침은 언뜻 보기에 우리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공관 복음서에서도 구약성서의 한 구절을 예수가 직접 발설하신 것으로 전하는 대목이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수난 사화에서 이런 현상을 우리는 잘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가 구약성서의 작가들에게 직접 그 무슨 영감을 제공했다던가 그들 작가나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이론이 여기서 생겨나지는 않았다. 교부 시대에는 구약의 이런 그리스도론적 성서 영감론이 적잖이 유포되어 있었고 그 근거를 히브리서와 같은 문헌에 두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이런 시각은 선재 그리스도론과 말씀 그리스도론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일정한 구약의 구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경우 흔히는 그 본문이 자리하고 있는 문학적이며 역사적 문맥을 도외시하고 필자의 사전에 주어진 어떤 체계의 틀에 다소 무리하게 그리고 인위적으로 끼워 맞출 때가 많다(히브 2, 6-8의 시편 8, 5-7 그리고 히브 7, 21의 시편 110, 4; 히브 10, 50-7의 시편 40, 7-9를 참조하라). 그렇다고 늘 그런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적절하게 구약을 인용하고 적용하는 때도 없지 않다(히브 3, 7; 7,10).


많은 경우 본문을 인용할 때는 한 문장이나 한 구절 또는 한 단락을 단순히 인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특정의 어휘나 단어 또는 그 구절의 문장 짜임새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가령 시편 8, 5-7의 경우 `사람'(2, 8-9)이라는 단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본문에서 뚜렷하지 않은 틈을 타서 이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십분 이용한다: 원문에서는 사실 `사람’이나 `사람의 아들’이나 같은 의미인데 우리의 필자는 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시편 95의 경우는 더욱 정교하고 어찌 보면 난삽하기조차 하다: 논증의 요지는 이것이다: 하느님은 태초에 만물을 엿새동안 만드시고 이렛날에는 쉬셨다(창세 2, 2). 그런데 시편 95에 보면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야훼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마음을 무디게 가짐으로써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마치고 쉬셨는데 하느님의 백성은 아직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만일 요수아가 백성에게 휴식을 주었다면 그보다 훨씬 후대에 다윗을 시켜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리 말해 하느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그네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오늘 듣고 그 마음을 무디게 갖지 않음으로써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시편 110, 4를 대사제 그리스도론과 연결시켜 재해석하는데 있어서 필자는 창세 14, 7-20을 원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창세기의 구절은 우리 필자가 7, 2b.3a에서 일차적으로는 멜키세덱과 살렘이라는 고유명사의 어원을 따라 해석하고 이차적으로는 침묵 논법(argumentum e silentio)을 따라 해석함으로써 시편 110, 4의 그리스도론적 함의(含意)를 이끌어낸다: 멜키세덱처럼 그리스도도 인간적인 아아론과 레위의 혈통이나 가계에 따르지 않는 대사제이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대사제라는 결론이다. 비교 논법과 황차 논법(況且論法)도 드물지 않다(1, 4; 2, 2-3; 7, 22; 8, 6; 9, 14; 12, 9-11). 멜키세덱의 서계를 따른 새로운 사제직의 제정은 필연적으로 레위 사제직의  폐기를 함축한 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일종의 배타 논법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사제직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새것은 옛것을 배제하기 마련이라는 논리이다(7, 11-12). 시편 40, 7-9를 읽어보면, 6절에 하느님은 분명히 희생과 제사는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제사와 희생을 규정하는 율법은 지켜져야 한다. 어떻게? 마음에 새겨진 율법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킬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필자는 제사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제사만으로는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수 없다는 모순을 발견하고 이 모순을 바로 내면성의 논리로 극복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 뜻과의 완벽한 일치는 레위 사제직의 제의 체제를 철폐한다는 결론은 타당하다는 논리다(10, 8-10). 필자가 히브 8장-10장에 걸쳐 전개하는 예레미야 31장의 해석 역시 이 예언이 전제하는 옛 계약과 새 계약, 내면서와 외면서의 모순 대당이라는 원리를 시인할 때만 설득력을 갖는다.


히브리서는 성서를 명시적으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성서를 암시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시편 110의 경우는 대표적이라고 할 만하다. 1, 13; 5, 6; 8, 1; 10, 12; 12, 2에는 구절마다 이 시편에 대한 암시가 나타난다. 또한 11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선배들에 대한 필자의 찬사는 구약을 명시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지만 등장 인물에 관한 성서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가 독자들에게 권고와 경고를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하는 것도 바로 성서의 하느님 말씀을 “생생하고, 그 어느 쌍날칼보다 날카롭게” 하려는 그의 의도에서 설명된다고 할 수 있다(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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