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히브리서와 그 주변의 종교 세계.
히브리서와 그 개념 세계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대의 역사적 배경 뿐 아니라 종교적 배경을 가능하면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당연히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자주 비교되는 종교로서는 역시 유다교를 든다. 그러나 유다교 안에도 여러 가지 경향과 유파(流派)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이 다소간에 그리고 직접 간접으로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영향을 주었을 법하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철학자 필로의 제자라고도 하고 반대로 그의 적수라고도 한다. 또는 헬라계 유다교에 속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묵시사상의 추종자라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영지주의 계통의 개념과 모형을 이끌어들여 그리스도교를 헬라 문명권에 좀더 잘 납득시키려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들은 저마다 히브리서에서 그 근거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어느 한 이론만으로는 히브리서 전체의 배경을 결코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1. 히브리서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우리 히브리서는 필로와 같은 구약 성경 칠십인 역 사용했을 뿐 그 해석 방법이나 전망이나 관심사와 여러 가지 전승도 서로 비슷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둘 다 존재론이나 인간 심리에 관련되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소위 제의 범주(祭儀範疇)를 광범위하게 이용했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히브 8장-10장을 참고하면 이 사실을 즉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이 서로 매우 가깝다는 사실은 둘 다 할라카나 율법에 관한 문제에 있어 비슷한 입지를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관찰할 수 있다. 가령 대사제는 날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백성을 위해서 제사를 봉헌해야 한다는 견해를 예거할 수 있다(히브 7, 27. 참조 필로, Sped Leg[=특별한 법] 1, 131). 우리의 저자가 논증을 전개할 때 어떤 철학적인 전제들을 원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필로와 비교해 볼 때 다소의 유사성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유다교를 플라톤 철학에 입각해서 재해석하는 품이 그렇게 광범위하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으며 체계적으로 그리 하는 것도 아니다. 성서 해석도 마찬가지다. 그가 우의적 해석을 즐겨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필로처럼 그렇게 철저하고 체계적이며 일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그는 조직적으로 어떤 신학이나 인간학을 전개할 의사도 없었다고 보여진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그가 종말론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라고 할 것이다. 사실 필로는 이 종말론이라는 주제를 기피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2. 히브리서와 꿈란.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종말론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할 때 우리의 필자는 혹시 유댜교의 묵시주의자들, 특히 꿈란의 엣세네파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다른 요소들도 꿈란과의 관련을 암시하는 것이 사실이다. 종말론에 관련되는 몇몇 구약성서 해석은 이런 가정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사실이다(1, 2). 그리고 무엇보다도 꿈란과의 사상적 접촉을 강하게 추측하게 하는 요소는 히브리서와 꿈란의 이른바 사제계(司祭系) 메시아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꿈란에서는 정치적 메시아인 다윗의 후손을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사제계 메시아인 아아론의 후손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1QS 9, 11; 1QSa 2, 12-15).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피상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히브리서의 성서 해석학과 꿈란의 소위 페셰르 식(pesher式) 성서 해석과 동일시할 수도 없고 또 히브리서의 그리스도론을 두 사람의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꿈란의 메시아 사상의 그리스도교 재판이라고 할 수 없다. 히브리서의 메시아 사상은 단순히 꿈란에서 연역할 수는 없다. 그 뿌리는 좀더 깊은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또 히브리서의 메시아 사상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까다로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종말 기대는 매우 활발하고 생동적이다. 매우 중요한 점에서 그 종말론은 단순한 유다교 묵시사상의 변종도 아니고 꿈란 문헌들에서 쉽게 연역되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역시 종말의 사건이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사전에 이미 일어났다는 그리스도교의 확신이다. 그렇다고 미래적 종말론이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미 현실화한 종말의 사건은 지금 벌써 진행 중이라는 확신도 독창적인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의 차원은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있다. 종말의 현재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생활 방식은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활기차게 현실화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다(10, 22-24). 이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가 열어주신 길로서 하느님의 현존에까지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10, 19-21). 이 종말론은 그러기에 현세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미래의 대재난을 기다리면서 불안과 공포 가운에 전전긍긍해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봉사와 낯선 땅에서 당하는 고난을 참아내는데 있다(13, 13-16).
3, 히브리서와 영지주의.
히브리서에 일종의 이원론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세대의 이원론이 그렇고(2, 5; 6, 5) 육과 영의 이원론이 그렇다(7, 16; 9, 9-10). 이러한 이원론의 배경은 바로 영지주의라는 지적이 심심지 않게 제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영지주의를 확대 해석해서 히브리서에 적용한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다. 저자는 단순히 초기 그리스도교와 당대의 유다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우주론적 소재와 표상을 빌려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저자가 고전적 의미의 영지주의에서처럼 물질세계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지적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또 그 그리스도론도 때로 신화적인 표상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2, 10-16) 그 근원이 영지주의에 이른다는 주장은 분명 속단이다. 영지주의와 히브리서에서 다 같이 관찰되는 공통 요소들은 그 이전의 초세기 헬라계 유다교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의 의도는 결코 다른 종교의 개념이나 도식이나 모형을 이용하여 어떤 교리를 체계화하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여러 가지 출처를 달리하는 전설이라든가. 철학과 신학의 몇몇 표본이라든가 성서 해석과 전례 양식문이라든가 또는 마지막으로 웅변술과 수사학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는데 있었다.
4. 히브리서와 신약성서.
히브리서와 여타의 신약성서의 다른 저서들을 비교할 때 서로 공통하는 면도 있고 차이점도 있는데 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울로 사도와의 비교에서 관찰되는 유사점과 상이점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혹시 바울로의 직제자는 아닐지 몰라도 바울로의 학풍을 따르는 사람으로 볼 수 없을까? 가령 에페소서, 골로사이서 또는 사목 서간들의 저자들처럼 자신들의 이름은 감추고 대신 바울로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사도의 사상을 계승하고 보급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 저자는 그런 동기에서 자신의 이름을 감추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아예 바울로의 이름을 밝히 내세웠을 것이다. 그러치 않은 것을 보면 히브리서의 익명성은 그가 바울로의 이름으로 자신의 편지를 집필해서 사도의 권위를 빌어 독자들을 설득하려 했다는 의도에서 해명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대사제 그리스도론 만해도 바울로와는 전혀 다르다. 바울로처럼 우리 저자도 유다교의 율법을 비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7, 16-19) 그 비판 근거는 전혀 다르다. 바울로는 율법의 시효가 제한되어 있다고도 생각하고(갈라 3, 15-29) 또는 율법은 죄가 권세를 부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고도 생각한다(로마 6, 20). 여기에 비해 우리 히브리서의 저자는 율법 하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제사 의식을 규정하는 법이라고 생각했고 그 법적 효력은 이미 실효 된지 오래 라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 저자도 바울로와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지만 이 두 사람의 신앙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울로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갈라 2, 16) 얻게된 하느님의 은혜로운 선물 곧 하느님의 의화 은총을 받아들이는데 있다기 보다는(로마 3, 21-31)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즐겨 견뎌내게 하는(12, 13) 그 희망 찬 충성과 신의에 있다고 보았다(11, 1):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역시 그분에게 대한 신앙 고백에 명문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신앙 고백문의 내용을 수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본받는 것이라고 해야 우리 필자에게는 더 정확한 신앙의 정의라고 할 것이다.
히브리서와 제2 바울로 서간집에는 서로 비슷한 점이 관찰된다: 골로사이서에서는 천사 숭배와 관련된 잘못된 믿음과 관행을 지적하고 이를 시정하려 한다(골로 2, 18). 히브리서에서도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애써 입증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두 저서의 배경이 동일한 역사적인 상황을 전제한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권고나 경고 부분에서는 이와 관련된 우려나 시정 사항이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장의 논리 전개는 그리스도의 현양의 결과로 하늘에서 얻게 된 그의 지위를 돋보이기 위해서 흔히 있어오던 상징적 소재와 표현을 그 바탕에 깔고 있을 뿐 어느 특정 교회 공동체의 어떤 특정의 탈선이나 남용이나 오류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요한 계 그리스도교의 전통과는 어떤 관련을 갖는가?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만 공통점이나 접촉점을 발견할 수 있을 뿐 히브리서의 말씀-그리스도론과 요한 계의 계시자-그리스도론은 거리가 멀다.
여타의 신약성서 중에 히브리서와 가장 유사점이 많은 저서로서는 흔히 베드로 1서를 드는 것이 보통이다. 1베드 역시 일종의 권고와 격려의 편지이다(5, 12). 그리스도론 역시 시편 110(3, 22)을 바탕으로 하는 현양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의 제사로 이해하는 구원론(1, 2.19; 2, 12-15)과 병합해서 전개하고 있다. 그분의 희생 제사로 우리는 양심을 깨끗이 씻을 수 있게 되었으며(3, 16),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3. 18). 히브리서 역시(13, 20) 1베드와 마찬가지로(2, 25; 5, 5) 그리스도를 목자로 그려준다. 구원론적 구도(構圖)에 있어서도 이 두 작품은 유사하다: 1베드에게 구원이란 종말에 가성 약속된 유산을 상속받는데 있다(4, 7; 1, 4-5). 이 구원은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을 영화롭게 한다(1, 11; 4, 13; 5, 4). 그리고 물론 이런 영광을 차지하려면 끝까지 충실하게 참아내야 한다(1, 6-9; 2, 20), 그리스도의 고난을 한몫 나눠야 하며(4, 13)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수모와 비난을 견뎌내야 한다(4, 14; 히브 11, 26). 신앙 생활은 또한 덕성스러운 생활, 덕을 실천하는 생활인데 히브리서와 1베드가 열거하는 덕목들에는 서로 공통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나그네 영접(4, 9; 히브 13, 2)과 공권력에 대한 순종은 둘 다 강조하는 듯하다(5, 5; 히브리 13, 2). 이 정도만 비교해 보아도 이 두 저서가 얼마나 서로 비슷한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가 사제 그리스도론과 같은 독특한 전승을 매우 힘차게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신약성서에서 매우 특이한 작품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울러 상호간에 공통하는 전승과 신학적 전망도 적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지켜 볼 수 있다. 로마 교회 전승과 각별한 유대를 갖는다는 말을 해서 좋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