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주석

 

제4 장.


이 4장의 단락별 구분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3, 1에서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3장 전반에 걸쳐 말씀의 들음에 믿음과 신뢰와 순종으로 응답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니까 역점을 말씀의 들음 또는 청종(聽從)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비해 이 4장에서는 이 말씀의 들음이 지향하는 최종적인 목적이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가는데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이 목표 달성에 최선을 다 할 것을 부탁하고 격려한다.  4장의 전반적인 취지를 일단 이렇게 확인한 다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단락별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1-3a절: 첫째 경고와 호소는, 약속이 엄연히 살아있는데 혼자서만 약속된 대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낙오하게 되었다고 지레 단정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다 함께 두려워하자고 한다. 독자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지만 여기의 경고의 대상은 누구나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그런 일이 없도록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왜냐하면(2절) 그리스도인들도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예외 없이 약속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달리 말해 약속의 말씀을 누구나 들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약속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혜택을 입지 못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혜택을 입었다. 그 까닭은 하나는 약속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을 단순히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은 말씀에 믿음으로 공감하고 수긍하며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결코 낙오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고 격려한다. 이렇게 최초의 믿음을 약속이 살아있는 동안은 끝까지 지켜나가야 한다고 한다. 어떻게? 곧 말씀에 신임과 공감을 보내고 그 말씀에 따라 약속대로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약속의 말씀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바로 복음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듯하다(1절의 ejpaggeliva”와 2절의 eujhggelismevnoi의 말놀이에 유의할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3a에서 신약의 하느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을 다시 한번 표명한다;;;. 우리는 믿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여기의 제1인칭 복수 직설법 현재는 장차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미래를 선취하는 현재라고 보아 무난할 것이다.) 그 근거로 필자는 시편 94, 11을 인용한다. 안식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부정적 서약문 양식인데 여기서의 맥락으로는 오히려 긍정적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 같다. 달리 말해 안식에 들지 못하고 아직도 유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리고 아직도 유랑하는 이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이 확신은 하느님의 맹세의 말씀이 보증한다. 3c: 이렇게 이해하고 보면 이 구절의 논리가 잘 이해된다: 과연 우리 믿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안식에 틀림없이 들어가게 되어있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세상 만물의 창조가 이미 끝났는데 아직도 무슨 일이 남아 있어서 안식에 들지 못하고 하느님이 맹세까지 하면서 안식을 다짐해야 하는가?  여기에 우리의 필자는 답한다. 4절: 과연 이 의문은 당연하다: 실상 성서의 창세기 2, 2(칠십인 역)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엿새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7 일에는 모든 일을 쉬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여기 시편의 말씀 역시 단호하다: 그들은 결단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즉, 아직도 안식에 들지 못하고 유랑하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안식에 틀림없이 들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6절: 과연 이 구절에서 필자는 지금까지 말하고 싶지만 보류해 왔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과연 안식에 들어갈 사람들이 아직도 몇몇 남아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먼저 복음을 전해 들었던 이스라엘이 그 불신으로 하여 안식에 들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 7절: 하느님은 당연히 ꡒ오늘ꡓ이라는 어떤 날을 정해서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어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제공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불신하지 않고 믿었는데도 아직 안식에 들지 못하고 유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또 사실 그렇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하느님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 안식을 취한 후 그토록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다윗을 시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오늘 너희가 그의 목소리를 듣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8절: 여호수아의 가나안 복지 점령 또는 점유가 정말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었다면 다윗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리 말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안식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9절: 여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아직도 안식을 취해야 할 안식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10절: 사실 안식에 일단 들어간 사람 여호수아는 하느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하던 일을 멈추고 쉬어야 정말로 안식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하느님의 백성을 안식에 이끌어야 하는 과업을 완수했다면 아직도 그 백성이 쉬어야 할 안식일이 남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11절: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자! 왜냐하면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가 불신의 선례를 따라 넘어지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약속의 말씀은 복음의 말씀일 뿐 아니라 심판의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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