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필자는 다시 한번 하느님의 휴식에 “들어가다”라는 이음말을 활용하여 우리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우리의 신앙 고백을을 견지할 것을 역설한다(1절).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까닭은 이 고백이 이제부터 소개하려는 대사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서술에 그 존재론적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이 자격은 그가 대사제로서 하느님께 관한 일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자격, 달리 말해 예물과 속죄의 제사를 효과적으로 드리는 데 요구되는 자격, 곧 하느님과의 친밀성을 보장하는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5, 1).
그러나 우리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는 하느님과의 친밀성만을 갖추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대사제로서 요구되는 둘 째 요건 곧 그분이 위해주고 감싸주려는 인간들과의 연대성을 완벽하게 갖추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단언한다. 4, 15에 보면, 실상 우리가 대사제로 모시고 있는 분은 우리 인간들의 나약함에 공감할 줄 모르는, 말하자면 완벽주의적인 대사제도 아니요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무관심한 어른이 아니다. 그분은 죄만 빼놓으면 모든 점에 있어 우리와 꼭 같이 유혹을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실 수 있다는 이 가능성은 대사제가 백성을 위해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는데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요건 곧 그 백성과의 연대성을 보장하는 자질이다(15절).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실천적인 일차적 결론은 무엇인가? 16절은 이를 밝혀준다. 은총의 보좌에 진솔하게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 목적은 자비를 입어 적절한 때 필요한 도음을 얻는데 있다. 마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을 위해서나 백성을 위해서나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절차를 이제 생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암암리에 전제하는 듯하다.
그러기에 필자는 여기서(5, 1-4) 다시 한번 대사제의 선임 목적과 직능을 회상시켜준다. 대사제란 모름지기 사람들 가운데서 뽑히고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느님께 관한 일 곧 죄인들을 위해 봉물과 속죄의 제사를 바치기 위해 임명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또 몽매한 이들과 빗나간 이들을 동정할 줄 안다. 그 역시 -말하자면- 약점 투성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백성을 위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나 이런 영예를 제 스스로 취할 수는 없고 오직 아아론처럼 하느님께 불림을 받은 이라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첫째, 모든 대사제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뽑는다(5, 1a). 대사제의 기반은 민중이다. 하느님 백성이 곧 대사제의 출신 기반이다. 그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바로 이 백성을 위해서 그리고 이 백성을 대신해서 백성의 죄값으로 예물과 제물을 하느님께 드리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사제로 임명된다. 같은 맥락에서 몽매한 이들과 빗나간 이들을 대할 때 친절하게 대해주어야 한다. 단죄하지 말고 관용과 이해심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하소연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 까닭은 자신도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병상련의 논리라고 할 것이다. 아니, 동고동락하려는 연대성에 요구되는 행태라고 할 것이다. 결국 그것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고 사랑의 능력이기도 하다. 사랑이 단순한 동병상련과 동고동락하려는 정서적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나 사랑받는 이나 결국 죽음 앞에서는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하고 공멸(共滅)하고 말 것이다. 무능한 사랑은 동정과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곤궁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대사제는 모든 점에 있어 우리와 같으시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다. 연대성은 공모(共謀)에 연루(連累)되어 서로 나눠가질 수 밖에 없는 공범(共犯)의 연대성을 말하지 않는다. 죄는 근본적으로 반신(反神)과 인간 증오를 함축한다. 그래서 죄인들과의 공범은 결국 하느님께 대드는 반신의 저항 집단 구성원끼리의 유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할 수도 없고 동료 인간들을 위해 하느님께 어떠한 중보 역할 도 할 수 없다(5, 2).
이상은(5, 1-4) 구약의 대사제 직제의 한 단면을 서술하면서 이런 의미의 대사제직을 그리스도의 대사제직과 비교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부각시켜려 한다(5, 5-10). 이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스스로 대사제가 되기로 자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ꡒ너는 내 아들이다. 나 오늘 너를 낳았다.ꡓ하고 선언하신 분이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불러 뽑아 사람들을 위해 사제직을 수행하도록 세우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5, 5) 같은 맥락에서 성서는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대사제로 임명하셨다고 말하지 않는가?: ꡒ그대는 멜기세덱의 서계(敍階)에 따른 영원한 사제이다.ꡓ(5, 6)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 사제직을 이 지상에서 어떻게 수행했는가? 이 질문은 그리스도가 수난과 현양 후에 비로소 대사제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지상에서부터 이 사제직을 수행했다는 것을 전제한다. 어쩌면 이 점이 히브리서 필자의 특유의 그리스도 대사제관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그리스도는 이 지상의 사제직 수행에 있어 구약 시대처럼 봉물을 바치고 제사를 바침으로써 사제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간구와 탄원을 당신을 죽음에서 건져줄 구원자 곧 아버지 하느님께 큰 소리로 외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바침으로써 사제직을 수행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간구와 탄원, 더구나 큰 소리로 외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드린 탄원과 간구를 겟세마니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번민 중에 드리던 기도와 동일시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렇다고 배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겟세마니의 기도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알아들으면 된다. 이 사제직 수행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결과는 이 기도와 탄원을 청허(聽許)받았다고 말한다. 제사와 예물을 바친 것이 아니라 기도와 간구를 바쳤다고 한다. 기도와 탄원이 제사와 예물을 대신하고 할 것이다(5, 7). 그가 청허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사제직 수행이 효과적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런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경외심 때문이었다고 필자는 말한다. 누가 누구에게 경회심을 품었다는 말인가? 문맥상 그리스도가 하느님 아버지께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경외심은 그리스도가 하느님 아버지께 지녔던 마음가짐의 한 단면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이제부터는 이 지상의 사제직 수행이 어떻게 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는 가를 말해준다(5, 8). 말하자면 이 사제직 수행의 인간과의 관련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 필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드님으로서도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당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지상에서의 사제직 수행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직접적인 효과라고 저자는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리스도가 몸소 순종의 선례를 보여주심으로써 그를 뒤따르는 이들에게도 순종을 배우도록 하여 결국 당신이 죽음으로부터 구출되어 영원히 구원받았듯이 당신에게 순종한 이들에게도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5, 9). 여기서도 다시 한번 사람들과의 연대성이 돋보인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완전하게 되셨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들과 꼭같이 유혹을 받으시고 약점들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하느님께의 순종과 동료 인간들에 대한 연대성 유지로 완전하게 되셨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이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바쳐야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5, 10은 이 단락의 마지막 결론을 내려준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멜기세덱의 서계를 따라 대사제로 임명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 단락을 다시 한번 전반적으로 되돌아볼 때 다음과 같은 종합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대사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중개하는 사제로서 그 하느님과의 친밀성을 갖추고 계신 분으로서 대사제에게 요구되는 첫째 요건을 갖추고 계시다. 동시에 그분은 인간으로서의 약점도 가지고 있고 또 여느 사람 못지 않게 유혹을 받으신 분으로서 똑 같은 약점과 유혹에 시달리는 동료 인간들의 딱한 사정을 내 몰라라 하실 분이 아니다. 이것은 곧 동표 인간들에게 사랑의 연대성을 말해준다. 이것 역시 사제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인간의 딱한 사정을 하느님께 호소하여 필요한 때에 적절한 도움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사제들의 직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료 인간들과의 연대성은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뤄진다: 이들의 약점과 유혹에 동참함으로써 이들과의 연대성은 어떤 현실성, 어떤 구체성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이 약점과 유혹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불가항력적인 것인가? 만일 불가항력적이라면 그리스도도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죄와 죽음 앞에서 다 함께 멸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성의 결여와 사랑의 무능은 하느님께 나아갈 수도 없게 하고 죄와 죽음 앞에서 동료 인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될 필요가 있었다. 이 완전에 이끌어준 매체가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아드님으로서의 순종이었고 이 순종은 그대로 동표 형제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