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과 성서 이해.
하느님 말씀의 신학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한 옛날부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다가 마지막 날에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편지 벽두에 이렇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회고한다는 것은 필자가 하느님 말씀의 신학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이 하느님 말씀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음 두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하느님이 이룩하신 구원은 하느님의 말씀하심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당신 자신 안에 간직하고 계셨던 고독과 침묵을 깨고 말하자면 당신 밖으로 나오셨다는 것인데 하느님의 이 ‘외출’이야 말로 우리 구원의 근본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외출이 없었거나 불가능했다면 우리의 구원과 속량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하심은 그 자체로서 구원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히브리서의 필자는 하느님의 이 말씀하심에는 어제와 오늘, 그제와 이제, 그 옛날과 마지막날이 있으며 이 두 가지는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물론 하느님의 말씀하심은 그 아드님을 통하여 결정적인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도 우리 필자의 확신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하신 말씀하심이 모두 쓸모 없게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매몰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그가 구약성서에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다루는 솜씨는 정말 대단하다: 그의 장기(長技)는 바로 이 해묵은 말씀의 현실적인 의미를 독자들의 현재에 매개해주는 그 독창적인 성서 읽기, 또는 성서 이해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전의 하느님 말씀과 지금의 하느님 말씀 사이에는 다 같은 하느님 말씀이지만 그 가치에 있어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전 것보다 더 낫고 더 효과적이다: 지금의 희망은 옛 희망보다 나으며(7, 19) 지금의 계약 역시 그전의 계약보다 낫다(7, 22; 8, 6). 지금의 약속도 마찬가지로 그전의 약속보다 낫다. 하느님은 우리를 생각해서 좀더 나은 것을 준비하셨다(11, 40). ‘좀더 낫다’는 이 범주를 이용하여 필자는 지금의 것의 어떤 탁월성과 이런 비교 화법에도 불구하고 그 종말론적 결정성과 궁극성을 지적하려 한다. 옛 말씀을 취소하거나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옛 말씀을 초과 달성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런 의미에서 당신 자신을 뛰어넘으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이 자기 능가는 12, 18-24에 매우 인상적으로 묘사되어 나온다: 시나이 산에서 주신 계시와 아드님 안에서 주신 계시를 “여러분은…하지 않았습니다…여러분은…했습니다”라는 대조 도식(對照圖式)으로 강력하게 부각시켜준다: “여러분은 만질 수 있는 (산)과 타오르는 불과 어두움과 암흑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소리에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가까이 간 곳은 오히려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인 천상 예루살렘이며,…” 옛 말씀을 다시 끄집어내어 현재의 하느님 백성을 타이르는 경고로 삼음으로써 그 현실적인 의미를 해석해 내는 수법이라고 할 것이다: “실상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도 효력이 있었고 모든 배반과 불순종이 공정한 갚음을 받았다면 우리가 이토록 귀중한 구원을 소홀히 할 때에 어떻게 (그 갚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2, 2)
그러나 구원 역사의 측면에서 아무리 그제와 이제, 과거와 현재를 구별하고 옛 것과 새 것을 차별화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론의 교리 설명 부분이나 훈계 부분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옛 말씀도 이제는 성서를 통해서 가까이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이 성서를 통하여 현재의 교회 공동체에 직접으로 말씀을 건네 오신다. 하느님의 옛 말씀의 현재적 효능과 호소와 요구로서의 효력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기에 1, 5f.8-13에 인용된 구약의 시편 말씀으로 하느님은 아드님에게 일종의 직접 화법으로 말씀을 건네실 수 있는 것이다: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 7), 혹은 “하느님, 당신의 옥좌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나이다”(칠십인역 시편 44, 7)하고 아드님께 말씀을 건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약성서의 말씀은 교회 공동체가 전하는 고백과 선포의 말씀으로 기용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그리스도 사건으로 하여 다시 그 효능을 발휘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10, 5-10에 인용된 시편 40, 7-9의 말씀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제사와 제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번제와 속죄(제사)를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제게 대하여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그분은 앞에서 “당신은 제사와 제물과 번제와 속죄(제사)를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율법을 따라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두 번째 것을 세우려고 첫 번째 것을 치우셨습니다. 그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봉헌됨으로써 우리는 거룩해졌습니다.” 이 말씀은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면서 당신의 사명과 십자가상에서의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아버지 하느님께 밝히는 말씀이다. 복음서 전승에는 이런 말씀이 전해지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대담한 직접화법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약성서의 말씀은 옛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들어오시면서 당신의 지상 생애의 최종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고 아울러 그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구약의 그 모든 제사를 마감하셨다는 것을 천명하는 말씀으로 재활용되고 재해석된 것이다.
훈계 부분에 있어서는 시편 95를 인용하는 히브 3, 7-4, 11이 특별히 주목을 끈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그래야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 구약의 말씀을 수정 없이 독자들을 타이르고 훈계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달리 말해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모세 세대가 오늘의 독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경고가 되는 것이다. 사실 모세의 세대 중에 불신과 반항을 일삼던 사람들은 아무도 기나긴 여정을 마친 다음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을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 성서의 전승이다. 그들의 시체는 광야에 그대로 버려졌었다. 필자가 모세의 세대와 오늘의 공동체에게 똑같은 성서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하느님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 말씀은 약속의 말씀이었다.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언약이었다. 이 약속이 모세의 세대에게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는 틀림없이 이뤄질 것이다. 또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빈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것이 언약에서 성취의 복음에까지 옮겨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4, 1):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사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들은 말씀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들은 (말씀)에 신앙으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다 같이 약속의 말씀을 받았지만 그들에게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이 약속의 말씀이 복음의 말씀으로 옮겨갈 수 없었고 반면에 우리 교회 공동체는 믿었기 때문에 이 약속의 말씀이 복음의 말씀이 되었고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최종적인 근거는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신다는 믿음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믿음이다. 그러기에 여기서도 역점은 역시 훈계와 권고에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성서가 말하는 `오늘’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의 구원을 얻을 수 있기까지의 남은 시간을 의미한다. 이 남은 시간을 최후의 기회로 알고 잘 활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태와 무관심, 그리고 미루기를 일삼지 말라는 경고요 훈계이다: “다시 그분은 ‘오늘’ 이라는 날을 정하시고 앞서 인용한 대로 오랜 후에 다윗을 시켜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가지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4, 7)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3, 7). 그러기에 이 말씀은 지금도 현실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이제 구원은 바로 이 하느님 말씀을 듣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듣다”라는 말뜻에 유의해야 한다. 동시에 이 하느님 말씀은 왕년에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 백성에게 주신 말씀만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무엇보다도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결정적인 말씀이다. 그러기에 구원의 사건은 말씀의 사건이다. 구원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 말씀을 처음으로 들은 신앙의 선배들에 의해서 그 위력이 입증되었다(2, 3).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의 예수께서 하신 선포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제자들에 의해서 계속 전해졌으며 그런 가운데 이 말씀의 전승이 형성되어 나아간 것이다. 물론 우리 히브리서의 저자는 지상 생애 때 예수님이 발설하신 말씀을 복음서 식으로는 하나도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역사의 예수의 말씀들과 이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해주던 사도들의 증언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요컨대 하느님의 말씀이 어떤 내용인가도 중요하지만 이 말씀으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달리 말해 하느님의 말씀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심판의 말씀이요 심판 자체이기도 하다. 제1부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편 95, 11의 말씀에 이어 하느님의 말씀이 지니는 심판 기능을 묘사하는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 자신과 거의 동일시되어 나온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워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꿰뚫으며 마음의 생각과 의향을 판단합니다.”(4, 1)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계시할 뿐 아니라 그것은 인간 계시이기도 하다: 심판이란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이해
히브리서의 저자는 유난히 구약성서를 많이 인용한다. 구약성서를 이용하여 자신의 논지를 펴려는 의도가 역력하다고 하겠다. 그는 그의 최대 관심사인 대사제 그리스도론을 두 단계에 걸쳐 개진하면서 구약성서 역시 두 단계에 걸쳐 활용한다고 하겠다. 첫 단계에서는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이 신실하며”(3, 2) “아론과 같이 하느님께 부름 받은”(5, 4-5) 대사제시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구약과 신약 사이의 계속성을 강조한다고 하겠다. 둘째 단계에서는 이 계속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신약의 대사제직이 구약의 것과 비교해서 차이가 있으며 그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7, 11-10, 18). 이 차별성과 탁월성을 보여주는 계기들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사제직은 그 서계(敍階)에 있어 아론의 대사제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7, 11-28)는 것이 그 첫 계기다; 둘째는 그 성 예전(聖禮典)의 차별성이다(8, 6; 9, 11-14.26-8). 마지막 계기는 “새로운 계약”이다(8, 6-13; 9, 15; 10, 14- 18). 이러한 차별성과 탁월성을 구약성서로부터 입증한다는 것은 구약성서 자체에 어떤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수행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필자는 구약의 제도적 측면과 예언적 의미를 구별하고 이 예언적 기능마저도 이제는 그 종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아울러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때로는 바울로 사도보다도 더 통렬한 필치로 구약과 유대교의 율법을 비판하지만(7, 12. 18-19; 9, 9- 10; 10, 1-9) 동시에 이 부분은 이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 같은 율법이 어떤 새로운 차원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강조한다는 점을 잊지 말 것이다. 종교사적으로나 전승사적으로는 랍비들의 성서 주해, 꿈란 공동체의 성서 주해, 헬라계 유대교의 성서 주해 방법과 우리 히브리서 저자의 성서 주해 방법과의 상호 공통점을 부각시켜 비교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 성서가 성취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야말로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불허하는 그의 독특한 점이라고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