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의 신학사상.
발제(發題):. 전승과 그 재해석(1, 1-4).
1,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1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고, 또한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1 3 이 아들은 그분 영광의 광채요 그분 본체의 표상이시며, 자신의 힘찬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십니다. 그는 죄의 정화를 이룩한 다음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엄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1 4 그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물려받음으로써 그만큼 그들보다 더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 이 첫 구절의 주요 내용이 전승에서 유래한다는 데에는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의견을 함께 한다. 이 단락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본문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로마 1,3f가 생각나게 마련이다. 동시에 이 구절은 이 편지 전체의 내용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바로 이 편지의 발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필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마지막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말씀 신학이 이 편지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잘 말해 준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사건 따로 있고 하느님의 역사(役事)-사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사건을 일으키고 사건은 말씀을 불러 일으켜 사건을 해석하게 한다. 이와 같은 역사와 말씀의 관계는 아드님에 와서 그 절정에 이르고 그 궁극성에 도달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의도하는 역점은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 쪽에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 사건을 일으킨 사건 중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저자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발제 부분이 전승에서 비롯한다는 것은 선재(先在)- 비하(卑下)- 현양(顯揚)이라는 이 단락의 3 단계 구조로 보아 확실하다. 선재는 그리스도가 “세기(世紀)들”을 창조하셨다는 언급에서, 비하는 죄의 정화(淨化)를 이룩했다는 언급에서 그리고 현양은 “엄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았다”(1, 3)는 언급에서 확인된다. 이와 같은 3 단계 구조는 필립 2, 6-11에서 재확인된다. 선재- 비하-현양이라는 소재를 전승에서 이어 받았다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본문은 아드님을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분 본체의 모상이라고 했다. 동시에 이 아드님이 세계와 그리고 인간들과 맺고 있는 관계도 말해준다: 그분은 모든 것을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영원으로부터 선재하시는 아드님이 창조 사업을 거들었다는 표상, 이른바 창조의 중보직(中保職) 사상 역시 전승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요한 1, 3; 골로 1, 16을 참고 할 것이다. 이처럼 창조하신 피조물을 보존하신다는 이 관념 역시 그리스도론적 신앙 고백의 전승을 잇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골로 1, 17). 현양과 관련하여 인용한 시편 110, 1은 신약성서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양과 메시아로서의 즉위(卽位)를 언표(言表)하기 위해 가장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기도 하다. 일종의 성서 논증이다. 현양이라고 하면 보통으로 하느님 아버지가 그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 일으키시고 드높이셨다고 하는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 알아듣는다 그런데 여기 히브리서에서는 아드님께서 스스로 능동적으로 “앉으셨다”고 말한다(히브 8, 1; 10 ,12; 12, 2).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는 언급은 다시 한번 필립 2, 9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 이름은 천사들의 이름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말한다. 천사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게 된 것도 바로 현양되신 그리스도가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었다는 그리스도론적 신앙 고백에서 받은 자극이 그 계기가 된 것 같다(필립 2, 10; 골로 1, 16 참조). 다만 이 신령한 존재들은 인간들을 노예로 만드는 악마의 권세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들이라는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 창조와 보존에 관한 소재 역시 전승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주제는 이 편지에서 더 이상 전개되지 않고 있으며 히브리서의 이원론적인 세계상과는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12, 17f): “‘한번 더’라는 말은 피조물로서 흔들리는 것들이 사라짐을 뜻합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만 남아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러니까 이 지상 세계는 유한하고 사라져 없어질 것이며 뒤흔들리며 쉽게 변질될 것이지만 하늘 나라는 항구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든든하고 요지부동할 것이다.
– 또한 아드님을 통해 “세기(世紀)들”이 창조되었다고 한다. ‘세상’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그 시간적인 차원을 살리려면 아무래도 세대 또는 세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도는 공간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시간의 주님이시기도 하다. 창조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구원의 주님이시다: 창조와 구원이 서로 반대되지도 않고 창조의 연속성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중단되거나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통해 창조가 완성된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신다”고 말한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구원하신다는 하느님 말씀 신학이 다시 한번 여기서도 두각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필자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잘 말해준다. 물론 형이상학적 의미의 이원론이 아니라 말하자면 종말론적 혹은 역사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분 영광의 광채와 그분 본체의 표상”이라는 독특한 표현 역시 전승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런 표현은 신악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다시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구약 성서의 지혜 7, 26만이 이 대목과 가장 가까운 예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이며 하느님의 활동력을 비쳐 주는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여 주는 형상이다.” 하느님의 지혜를 하느님과 거의 동일시하는 이 지혜서의 시각과 마찬가지로 우리 히브리서의 저자도 아드님의 신성(神性)을 바로 이 지혜서의 말씀을 빌어 묘사하려 했다고 할 것이다. 이 아드님의 신성에 대한 저자의 신앙 고백은 칠십인역 시편 1, 8을 인용하는 히브 1, 8에 와서 그 극에 이른다고 할 것이다: “아들에 관해서는 “하느님, 당신의 옥좌는 영원무궁하시며…” 여기의 “하느님”은 아드님께 드리는 직접적인 호칭이다.
– 또 하나 전승 소재로서 저자가 재해석하여 자신의 고유한 신학을 발전시킨 예로서는 바로 “상속”이라는 주제라고 할 것이다. 아드님은 부활하여 현양을 받으심과 동시에 “만물의 상속자”가 되셨다(1, 2f). 그리고 영원한 상속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교회 공동체에 다짐해 주셨다(9, 15; 참조: 11, 7f; 12, 17). 모든 유산이 죽음과 함께 상속되듯이, 이 영원한 상속도 아드님께서 당신의 죽으심으로 교회에 물려주신 것이다. 이 상속이라는 관념은 멀리 가나안 복지에 관한 예형론(豫型論)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젖과 꿀이 흘러 넘친다는 가나안 복지는 여호수아의 진두 지휘 아래 그 땅을 차지하면서 각 지파에 따라 제비를 뽑아 영원한 기업(基業)으로 상속받게 되어 있었다. 이 땅을 차지하기까지 어려운 광야를 행군해야 했던 모세 세대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의 예표(豫表)가 된다는 것이 저자의 확신이다. 모세의 세대와 마찬가지로 이제 나그네길을 걷고 있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도 여정을 다 마친 다음 도달할 새로운 목적지와 이 여행 끝에 차지할 영원한 상속을 약속 받았다. 그리스도는 이 여정의 길잡이 곧 지도자이시며 이 약속이 어김없다는 것을 보장해 주시는 담보이시고 동시에 이 영원한 상속을 나눠주시고 선사해주실 분이시다. 모든 유산은 상속자의 죽음과 함께 상속받을 수 있다고 했다. 유산은 또한 계약이기도 하다: 그리스말 diatheke( διαθηκη)는 ‘유산’이라는 뜻도 있지만 “계약”이라는 뜻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 저자는 십자가상의 죽음과 함께 유산상속도 이뤄지고 동시에 새로운 계약도 맺으셨다고 말한다(9, 15ff).
– 비하와 현양에 관련되는 진술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1, 3cd). 비하는 말씀의 강생을 건너뛰어 곧바로 십자가로 향한다. 이 십자가에서 아드님은 인간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셨다. 그리하여 우리의 때묻은 양심도 깨끗해질 수 있게 되었다(10, 22). 반면에 구약의 여러 가지 복잡하고 다양한 정화 의식은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9, 13f.23; 10, 1-4). 그러나 십자가상에서의 정화(淨化)의 효과는 뭐니뭐니 해도 이 죽음으로 깨끗해진 사람들이 마침내 저 가나안 땅 곧 천상의 영원한 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길고 먼 여행에 지쳐 빠진 하느님의 새 백성이 마침내 그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는 이 목적지를 향해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셨으며 거기에 이끌어주는 길을 닦아주셨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부활하여 현양을 받으시면서 먼저 이 천상의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따라서 현양을 받아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시편 110편 1은 단순히 그리스도론적으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론적으로도 중요하다는 사실이 여기에 잘 드러난다.
– 이상과 같이 발제 부분에 해당하는 우리 히브리서 첫 구절에는 저자가 이 편지에서 앞으로 전개하고 발전시킬 중요한 명제들이 거의 다 망라되어 나온다고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은 천상 고향으로 향하는 지상의 나그네길을 우리와 함께 걸으며 이끌어주는 길잡이이시다. 그분은 아들이시기에 이 약속을 보장해 주신다. 비하와 현양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를 속량하셨다.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었다는 주제는 벌써 그리스도의 대사제직을 예고한다. 아드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바로 이 대사제직이라는 측면에서 재해석하고 그 현실적인 의미를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부각시킨 것이야말로 우리 필자의 가장 큰 독창적인 기여라고 할 것이다: 이 고백에 충성을 다 할 것을 역설하고 당부하려는 것이야말로 이 편지의 전체적인 취지라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