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대사제 그리스도론.
히브리서의 백미(白眉)는 역시 그의 대사제 그리스도론 이라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대사제라는 칭호는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지만 이 칭호를 중심으로 그 나머지 다른 신학 사상이 전개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그리고 이 모든 신학 사상을 떠받쳐 주는 바탕이 되기 때문에도 이 대사제론은 그만큼 더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 대사제론을 전개하는데 있어 구약의 대사제직을 하나의 비교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 저자는, 구약의 제의(祭儀)에 속하는 여러 제도들, 곧 사제직과 성전, 그리고 제사를 기본적으로 존경하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모든 훌륭한 구약의 제도들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비로소 그 완성에 이르게 되었고 능가(凌駕)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확신이다. 즉 구약의 사제 제도와의 대비를 통해서 신약의 사제직의 탁월성, 그 궁극적 성격을 보여주는데 저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의 이 기본적인 신학적 의도를 간과한다면 신약성서 안에서 히브리서가 차지하는 유일의 위치와 의의를 절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의 가장 중심적 사상, 또는 그 중심적 주제는 나그네길을 걷고 있는 하느님 백성도 아니고 성서해석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대사제시라는 표상이다. 이 사실은 필자 자신의 말로도 입증된다고 하겠다. 실상 8, 1에 보면 필자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말하려는 본지(本旨)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대사제는 어떤 분이시냐 하면 바로 하늘에서 위대하신 분의 옥좌 오른편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필자는 이 저서에서 물론 대사제라는, 어떤 의미로는 새롭다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적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 칭호는 “주님”이나 “그리스도”보다 더 자주 사용되었다(2, 17; 3, 1; 4, 14.15; 5, 1.5.10; 6, 20; 7, 26.27.28; 8, 1.3; 9, 7.11.25; 13, 11. 모두 17 번!). 그 이유는 이 칭호가 “주님”이나 “그리스도”보다 그 적용 범위가 훨씬 넓고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정체를 좀더 적절하게 규명해 주기 때문이다. αρχιερευς라는 단어는 αρχ-라는 접두어와 ιερευς라는 접미어로 구성된, 합성어인데 앞의 접두어는 “으뜸과 권능과 영광, 시원(始原), 원리”의 뜻을 드러내고 뒤의 접미어는 `사제’라는 기능을 말해준다. 이를 그리스도께 적용했을 때, 그리스도는 하느님과는 사제라는 직능을 통해서 관계되며 또 같은 명목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나누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 대사제론에서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인품과 업적이 밀접하게 파악되어 나온다. 달리 말해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을 완벽하게 통합해 준다고 하겠다.
사제란 그 기능의 성격상 본디 중개자, 중보자이다. 대사제가 중개하고 중보(中保)해야 할 두 배우자(配偶者) 중에 한쪽 배우자인 인간들을 다른 쪽 배우자인 하느님께 인도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얻도록 하는데 그 기능이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작업, 이 기능 수행이 효과적이기를 기대한다면 필연적으로 이 인간 측 배우자와의 어떤 연대성이 요구되게 마련이다. 이 요구에 부응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어 수많은 다른 아들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심으로써 그 아드님을 구원의 영도자 또는 그 창시자가 되게 하셨다. 그 아드님이 당신의 다른 아들들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걷도록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운명은 결국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되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시는 동안 하느님께 완벽한 순종을 들어내셨고(3, 8; 10, 9-10) 인간들과의 유대를 그 극에 이르기까지 증명하신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하시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2, 9등)
그렇다면 인간 자녀들과의 이 연대성은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 그 근거는 2, 11에 제시되어 나오는데 그 논리 전개가 매우 이색적이어서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실상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이들은 모두 한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분은 그들을 형제라고 부른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은 아드님이시고 거룩하게 된 이들은 앞서 말한 아드님 외의 다른 자녀들이다. 그런데 이 둘이 어떻게, 무슨 의미로 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는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거룩하게 해주시는 아드님은 바로 하느님으로서의 자질과 자격을 갖추신 분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아드님과 그 아드님이 거룩하게 해준 다른 자녀들이 어떻게 한 근원에서 나왔다는 말인가? 이 `근원’은 어떤 `것'(=실체)인가 아니면 어떤 `분'(=인격체)인가? 어떤 `것’ 곧 그 무슨 물건이나 실체나 물질은 아닌 것 같다. 이 `근원’은 하나의 인격체 또는 어떤 위격을 안중에 두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여러 가지 제안이 있었다: 아담, 안트로포스 (천)신, 또는 아브라함 등… 최근에는 이 `어떤 분’을 하느님으로 파악하려는 추세가 지배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한 근원’이 막상 하느님이라고 해도 아드님과 다른 아들들이 둘 다 한 하느님에게 `창조’되었다는 뜻에서 `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들들은 창조되었다고 당연히 말할 수 있으나 아드님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드님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혹시 아들들이 아드님 안에서 창조 이전부터 `선재'(先在)했기 때문에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이신 아드님과 거룩해진 이들인 아들들이 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일종의 유출설(流出說, theory of emanation)의 견해라고 할 것이다. 우리의 필자는 마치 안트로포스 신화에서처럼, 아들들이 아드님 안에 선재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매우 매혹적인 가정이다. 이런 가정에서 볼 때, 아들들의 세계 내 존재는 결국 영지주의 계통의 안트로포스 신화에서처럼 하나의 타락한 존재, 하나의 비극적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2, 14-15에 개진된 내용으로 보아서는 과연 그렇다고 여길 만도 하다: “이 세상에서의 실존은 종살이 존재이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며 죽음의 지배자이자 사자(使者)인 악마에 내 부쳐진 존재”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고 여길만하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2, 14-15에 사람들과 나누신 아드님의 연대성이 비로소 명확한 윤곽을 띠고 나타나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연대성은 강생으로 곧 그분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아드님의 운명도 다른 아들들, 곧 다른 형제들의 운명에 따라 그 조건이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형제들의 운명을 바꾸고 이를 극복하자면 그 자신이 그들과 같은 운명을 나눠야 했다. 그러자면 인간이 되셔야 했고 그 구체적인 현존재의 조건을 스스로 짊어져야 했다. 정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 10) 여기의 `당연하다’는 말은 성서의 말씀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필연적 요청이 아니고 주어진 현실이 요청하는 하나의 타당성, 하나의 필요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동시에 이 필요성, 이 타당성은 하나의 엄연한 은총이라는 사실도 못지 않게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유의 선택이요 결정이지 하느님 선택 이전에 주어진 어떤 기계론적 필연성에 하느님이 굴복해서 하는 수 없이 이 방법을 선택했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아드님은 모든 점에 있어 우리와 같아지셨지만 한 가지 점에 있어서만 은 우리와 다르셨다: 그분은 죄로부터 자유로우셨다는 사실이다(4, 15; 7,27). 그런데 바로 이 점이 히브리서의 필자를 영지주의에서 구별시켜준다: 구원과 구속은 은총이라는 특징을 띤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필연과 운명이 아니고 자유와 선택에 근거하고 거기서 유래한다. 우리와 운명을 함께 나눴다는 것은 결코 숙명이 아니다. 구원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무슨 기계론적 장치를 작동시켜서 얻은 결과도 아니고 그 무슨 이법(理法)의 필연적인 강요나 상황에 따른 응용(應用)의 결과로 얻은 실적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필자가 인간 영혼의 선재와 타락을 사실로 믿고 이를 정식으로 가르쳐주려 했다는 말을 우리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근원이 하나’라는 표상(Syngeneia-Vorstellung=공동 출생 표상)은 필자에게 아드님이 인간 형제들과 맺으신 연대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표현 수단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그의 의도에 더 가까운 해석일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드님과 그 형제들 사이의 연대성을 확립한 다음에야 필자는 비로소 `대사제’라는 칭호를 소개한다: “그분은 하느님 앞에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관이 되셨습니다.”(2, 17) 필자는 우선 대사제로서의 예수의 두 가지 특징을 소개한다: 자비와 성실이 그것이다. 성실은 진실과 신의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자질 곧 자비와 진실, 진실과 자비는 대사제 그리스도론을 전개해주는 두 가지 계기이다.
– 3, 1-6: 진실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대사제 예수를 `진실하고 성실하여 믿음직한’ 분으로 인정받게 한다. 특히 예수를 야훼의 충실한 종 모세와 비교하면서도 예수의 우월성을 그 아드님이시라는 신분과 지위 그리고 하느님과 그 백성에 대한 섬김의 자세에 근거해서 제시함으로써 종인 모세와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 4, 15- 5, 10: 자비는 대사제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갖는 하나의 기본적 자세라고 하겠다. 이 기조적 정서에 기반 하여 대사제 그리스도는 사람들과 나누는 연대성을 자신의 운명과 구속과 간구 안에서 구체화시키면서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사제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많이 썼지만 이것은 필자의 어휘가 아니다. 필자의 어휘는 의외로 `예수’이다(3, 1). 그닐카에 의하면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 표현을 기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구원론적 관심에서 일부러 `예수’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달리 말해 예수는 이 현세에서 여타 인간들과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셨다는 사실이 그에게 중요했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이것은 곧 연대성에 대한 관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연대성이야말로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대사제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이요 자격이라고 하겠다. 같은 단락에 나오는 `사도’라는 칭호도 매우 이색적이다: 예수를 일러 `사도’라고 한 곳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밖에 없다. 예수는 사도 곧 `파견된 분’이라는 말인데 뜻인즉 생전에 하느님 나라를 설파하신 선포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 생전의 예수를 가장 역력하게 보여주는 대목은 5, 7-9이라고 하겠다: “그분은 육으로 계실 때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 분께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으며 하느님은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께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본을 따라 대제관으로 임명받으셨습니다.” 이 대목은 흔히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고뇌와 번민 중에 기도하시던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전승사적으로도 그 장면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바로 공관 복음서도 수난사를 기록할 때 `passio iusti’ 곧 무고한 의인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시편을 참조했듯이(시편 22, 24 공동번역:”내가 괴로워 [그분께] 울부짖을 때…”), 우리 히브리서의 필자도 얼마든지 독자적으로 시편의 언어를 활용하여 같은 주제를 이 자리에서 다룰 수 있었다고 본다. 여기의 예수도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아들로서, 대사제로서의 생전의 예수이다(4, 14 참조). 생전의 활동도 대사제로서의 활동이다: 기도, 간구, 고난과 복종을 통해서 대사제로서의 조건들을 충분히 다 채웠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 조건들이란, 공감할 수 있고 동정할 수 있는 능력,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고난을 나눌 수 있는 능력, 그들의 약점, 연약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4, 15). 역사의 예수와 그분 생애의 어떤 구체적인 한 단면, 예를 들면 겟세마니 장면을 자상하게 그려 보이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으로서 죽음에 부쳐졌을 뿐 아니라 유혹에 부쳐지기도 했다. 그분이 겪은 유혹이란 당신이 당하실 고난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이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의 기로에서 우리가 흔히 겪을 수 있는 유혹, 거부하고 싶은 유혹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구원의 영도자를 바로 이 고난을 통해서 완성하시기로 미리 정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셨다. 복종이란 그에 앞서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갈등이 극복되었다는 것도 보여준다.
예수는 대제관이 `되셨다’. 이것은 벌써 어떤 과정을 암시한다. 대사제 그리스도론은 일종의 과정중의 그리스도론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이 어떤 단계를 거쳐 전개되었는가를 암시하는 대목이 5, 5-9이라고 하겠다: 5절이 아드님의 `선재’를 암시한다면, 7절은 그분의 비하(卑下)를 그리고 9절은 그분의 완성을 드러내 보인다. 동시에 중개자로서의 그분의 위치와 역할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드님으로서는 하느님 편에 계시고 대사제로서는 인간들 편에 계시는 분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드님으로서의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을 대사제로 재해석한 것이다. 신앙 고백을 언제나 새롭게 재해석해야 한다는 좋은 범례라고 하겠다.
지금까지는 그리스도가 대사제로서 과연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조건을 채웠으며 이 사제직을 수행함으로써 어떻게 그 목적을 달성했는가를 서술했다고 하겠다. 그런 가운데도 구약의 사제직, 제사, 성전 등 제의(祭儀) 제도와 자주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무엇이며 얼마나 탁월한 것인가를 제시하는데 그 논리적 근거로 활용해 왔다. 이제부터는 바로 이 구약의 사제직과 신약의 그리스도 사제직을 좀더 구체적으로 비교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유사성과 탁월성 그리고 그 궁극성을 연역해 내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다: 구약의 사제직과의 비교라는, 이 논리 전개방법은 혹시 히브리서의 독자들의 종교적 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래서 가령 그 독자들이 유다-그리스도교인들이라서,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 꿈란 공동체나 그보다는 좀더 광범위했을 엣세니 사람들이라서 구약의 사제직과 성전 전례, 특히 속죄 제사의식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리스도 사건의 구원론적 의미를 설득하려 한 것은 아닐까? 성서의 우의적 해석, 천상과 지상의 대조를 통해 천상 것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저자의 전반적인 경향으로 보아 그는 분명 이른바 중도 플라톤 주의의 경향이 강한 (알렉산드리아 계통의?) 유다계 그리스도인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그의 독자들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제한했다거나, 더구나 꿈란 공동체에 속하는, 왕년의 유대교 사제들에게 이 편지를 썼다는 명백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대사제’라는 비유는 `나그네길을 걷고 있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그의 신학적 사색의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구약의 사제직과 제의(祭儀)와의 비교를 통해 신약의 사제직의 탁월성을 필자는 어떻게 제시하는가? 다음과 같은 도표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5장:
구약의 대사제 천상의 대사제
4절: 하느님께 부름 받다 5절: 하느님께 낳음을 받다(시편 2, 7)
1절. 3절: 제사 봉헌 7절: 기도와 간구
2절: 연약함 8절: 고난
1절ㄴ: 사람들을 위해 임명됨 9절: 그분께 복종하는 모든 이를 위해
임명됨
1절ㄱ: 사람들 가운데서 뽑다 10절: 하느님이 멜기세덱의 본을 딴 대제관으 로 임명하심
7장:
27절ㄱ: 날마다 자신을 위해 27절ㄴ: 죄 없으신 분이 자신을 봉헌하시다
제사를 바친다 (4, 15: 7, 26 참조)
28절ㄱ: 율법은 연약함을 지닌 사람들을 28절ㄴ: 하느님의 맹세는 영원히 완전하게 되
대제관으로 임명 신 아드님을 임명
5절에 보면 구약의 대제관 아론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대제관 그리스도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시편 2, 7을 인용하면서 대제관 그리스도는 동시에 하느님의 아드님(1, 5에서 이미 이런 뜻으로 시편 2, 7을 인용했다)이심을 다시 한번 천명하고 아울러 그 대사제직의 유일무이한 성격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고 하겠다. 구약의 대제관들은 속죄 제사와 봉헌 제사를 바쳤다. 그리스도도 제사를 봉헌하셨다. 그러나 그의 제사 봉헌은 희생 제사나 봉헌 제사가 아니라, 겟세마니에서처럼(5, 7), 기도와 간구를 바치는 일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사제직은 구약의 것에 비해 질적으로 다르고 또 우월하다. 또한 아론과 레위 계통의 제관들은 인간적으로 약점이 있는 제관,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연약함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도 이 레위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육으로 계시던 때에’ 다가온 고난의 운명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버지께 순종하는 뜻으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권리를 포기하심으로써 스스로 약자가 되셨다고 하겠다(5, 7등). 이 세상의 대사제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임명한다. 그리고 인간의 혈통을 타고난다. 그러나 천상의 대사제는 당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고, 인간의 혈통이나 가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서계(敍階)를 따르는 대사제이시다(5, 9등). 천상의 대사제가 당신 자신을 희생으로 봉헌하셨다는 사실도 그가 보통 대사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면모이다. 사실 아론과 레위의 대사제들은 자신을 위해서나 백성을 위해서나 매일과 같이 제사를 바쳐야 했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바친 것은 아니다(7, 26등). 그러나 그리스도는 날마다 제사를 바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첫 번이자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이다. 이 대사제들을 임명하는 법적 근거는 모세의 율법이지만, 천상의 대사제의 임명은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신 하느님의 맹세에 근거한다: 그분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으로서 대사제로 임명되신 것이다.
멜기세덱에 관한 히브리서 특유의 사변(思辨)도 그 목적은 두 가지에 있다: 하나는,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기에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사제들을 임명해야하는 사제직은 이제 끝났다는 것, 폐기되었다는 것, 그것은 연약하고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항구적이고 법적으로 타당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입증하고자 창세기의 여러 가지 비교와 우의(寓意)를 이용한다. 인용한 구약의 본문은 물론 창세 14, 18-20이다.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제관으로 소개된다(7, 1-18). 그가 아브라함과 레위보다 탁월한 사제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천상의 대사제 그리스도도 구약의 대사제보다 탁월하신 분임을 밝힌다(7. 4등). 그리스도는 멜기세덱과 마찬가지로 사제 가문 출신도 아니고 율법에 바탕 하여 사제로 임명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맹세에 바탕 하여 임명되셨다. 그러기에 이분은 죽음에 굴복 당할 수 없으며 불멸의 생명에 힘입어 영원한 사제이시다(7, 16등. 26-28).
멜기세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해석에는 창세기의 구절과 아울러 유다교 및 헬라 식의 성서 해석에서 영향을 받았다.. 간접적으로는 고대 중동의 영향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참조: Henri Cazelles, Le messie de la bible. Collection
특히 히브 7, 3에는 이런 비그리스도교 계통의 전승이 단편적으로 표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헬라계 유다교에서는 일찍부터 멜기세덱이 `대제관’으로 그 신분이 정의되어 나온다(필로, 아브라함 235). 그의 이름 `멜기세덱’도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나온다(필로, 우의 3, 79등; 요세푸스, 유대 고사기, 1, 180등). 멜기세덱에게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는(7, 3 참조) 표상은 헬라 식이다: 아프로디테(미와 사랑의 여신)와 아테나(사상과 예술과 과학과 산업 기술의 여신, 제우스의 딸. 로마인들은 미네르바라고 불렀다)도 그렇거니와 헤파이스토스(불과 대장간의 신. 로마인들은 불카누스라고 불렀다)도 어머니가 없거나 아버지가 없다고 전해지곤 했다. 유대교에서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탓이겠지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도 어머니가 없다고 했다. 신이나 여신들이 부모가 없다는 표상은 그들이 초자연적 존재라는 이유에서 이해가 가지만, 사라이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표상은 역시 그가 하느님의 점지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말해주려 했다고 하겠다. `족보가 없다’는 표현도 결국 같은 내용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아론의 혈통을 잇는 사제 가문 출신임을 입증해주는 좁은 의미의 족보를 안중에 두는 표현보다는, 일반적으로 멜기세덱의 출신을 인간적으로 연역해 낼 수 없다는 뜻의 표현이라고 함이 더 정확할 듯하다. 마지막으로, 7, 3에 “그는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영구히 제관으로 남아있다”는 말은 멜기세덱이 영원히 사제로서 남아있다는 뜻이 아니라, 정반대로 선재 하시는 아드님이야말로 멜기세덱처럼 가문이나 출생이나 족보로는 그 출처와 기원을 설명할 길 없는 분으로서 영원한 대사제시라는 뜻이라고 본다. 반대 의견이 없지 않으나. Georg Strecker, Theologie des Neuen Testements, 1996 Walter de Gruyter: BerlinㆍNew York, 645 참조.
이런 의미에서 멜기세덱은 천상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예형(豫形 또는 豫型)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 수행은 과거 십자가상 단 한번의 희생 봉헌으로 끝났는가? 아니면 지금 부활하여 천상 장막의 지성소(至聖所)에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천상 전례의 집전자로서 사제직을 수행하고 계신가? 그렇다면 이 천상 전례는 어떤 절차와 형식으로 진행되는가? 이렇게 질문할 때 그리스도가 천상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 지성소 에 입당하여 그 안에서 유다교의 대속죄일과 같은 속죄 제사를 봉헌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상 죽음을 하나의 제사 봉헌이라는 종교 행위로 파악하는 표상을 역시 상징적으로 알아들어야 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하나의 현실로서, 처형으로서는 하나의 법률행위이고 사형으로서는 한 기결수의 강제적인 종생(終生)이다. 주관적으로는 예수님이 당신의 생애와 죽음에 부여했을 의미에 따라, 일종의 자기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기 희생이 의미 있는 것이려면 -정당성과 그리고 의미 부여의 보편 타당한 효과!- 예수의 결단과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하느님 쪽에서 인정해주는 어떤 절차 행위가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예수 부활의 의미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천상 사제직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이뤄진 우리 구원의 궁극성과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 타당한 효과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상징이요 비유라고 할 것이다. 상징과 비유라고 해서 알맹이가 없는, 속 빈, 현실이 결여된, 하나의 수사학적 표현만은 절대로 아니다. 흔히 말하듯이, 이것 역시 `실질상징’이요 `성사적 상징'(聖事的 象徵)이라고 할만 하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히브리서 저자의 정서적 세계는 역시 헬라 문화권의 세계라고 할 것이다. 그의 대사제직 표상은 종교사적으로 볼 때 랍비 유다교에서 보다는 헬라 문화의 세계상에서 더 잘 해명된다고 하겠다. 그는 차안과 피안을 구별하고 지상과 천상을 차별하며 시간과 영원, 반복과 반복 불가능한 유일회성, 완전과 연약함, 비하와 현양을 대비시켜가면서 이중에서 택일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한다: 비하에서 현양으로, 신 부재(神不在)에서 신 현존으로, 파멸과 무상에서 불멸과 불변으로 가까이 가고 옮겨가는, 하나의 거대한 통과 의식(通過儀式)의 주례자(主禮者)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우리도 같은 길을 따라갈 것을 간곡하게 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요구되는 죄의 용서와 속죄, 양심의 정화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단 한번의 희생제사로 이룩하셨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얻어진 자격이라고 할 것이다. 다소 이원론적인 이런 전망 안에서 히브리서의 필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를 형이상학적 이원론자로 몰아세워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창조 신앙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11, 3; 1, 2등.10).
그리하여 우리는 왜 그의 편지에서 `길’과 `희망’이라는 주제가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10, 20)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10, 22) “또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10, 23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