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람의 아들 모습으로

 

4. 사람의 아들 모습으로


  그 불안한 시대의 영적 격동 한복판에서, 또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외치는 예언자형의 설교가들과 카리스마적 인물들 가운데서, 요세푸스는 예수님과 같은 인물을기다리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놓고, 우리에게 오직 세례자 요한만을 제시한다. 요세푸스의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직접 행방불명된 카리스마적 존재 중의 카리스마적 존재의 초상화를 그려보도록 자극한다.


  도대체 어떤 자질이 있었기에 죽음조차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갈라놓지 못했을까?… 죽음 자체를 초월하기 위해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고난을 스스로 느끼고, 낮은 자들의 굴욕을 경험하고, 추방당한 자들의 외로움을 체득하고, 죄인들의 절망을 맛보면서 그의 그늘 안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인자와 연민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포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위대한 예언자들이 지녔던 위풍당당한 특징들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카리스마적 인물이 본시오 빌라도가 총독이고 가야파가 대사제이던 몇 년 동안에 가르치고 설교하였다면, 그의 운명은 어떤 것이었겠는가? 세례자 요한에게 닥쳤던 바로 그 운명이 그에게도 닥쳤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카리스마적 존재가 병자를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고 할 때 마치 엘리야처럼 보였다면, 그의 신기한 활동은 군중을 끌었을 것이고 군중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위험하고 통제할 수 없게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존재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대사제 가야파와 총독 본시오 빌라도는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선도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다만 로마 황제와 그의 앞잡이들이 그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대사제와 산헤드린은 총독에게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사실을 보고했다. ‘여기에 많은 군중을 끄는 카리스마적 조재 중의 카리스마적 존재가 있습니다. 그는 성전 경내에서 소란을 피웠ㅎ고, 축제 때는 들떠 있는 순례자들과 더불어 무리를지어 몰려다녔던 사람이며, 또 예루살렘 거리를 걸을 때, 메시아, 유다인의 왕으로 환호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하더라도 대사제는 총독에게 그가 황제를 모독하고 있으며, 파괴와 폭력의 잠재적 근원이 되고있다고 조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재판의 결과는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였을 것이다. 카리스마적 존재들의 운명은 이렇게 대사제와 그의 산헤드린 앞에서의 재판으로 시작하여 총독의 십자가형 선고로 끝이 나는 일련의 과정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 과정은 그 의도와 목적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이었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그의 주장이 조롱거리가 되어 십자가 위에 명패로 붙혀짐으로써 그의 범죄는 모든 사람에게 참칭죄(僭稱罪 혹은 大逆罪)로 선포되었다.




5. 예수, 유다인의 왕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었으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기에 예수는 메시아를 가장하는 자이며, 사기꾼으로 폭로되어야 할 자였다. 예수가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는 베엘제불의 하수인임에 틀림없고, 또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면 그는 율법을 범하는 자였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허락하거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는 장로들의 전통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가 죄를 사해준다면 그는 신성모독자이다. 그가 예언자처럼 보인다면 그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구세주라면 엘리야는 어디에 있는가? 그가 메시아요 다윗의 자손이라면 예수의 족보는 무엇인가? 그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설교했다면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빈틈이 없는 사람이기에 율법학자-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에게 도전하는 데 애를 먹었다. 어떤 떄는 그들 중의 한 사람처럼 보였고 또 어떤 때는 전혀 그렇지 않게 보였다. 그는 율법학자-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핵심적인 가르침에 충실하였으나,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흔들어 놓았다.


  예수가 환전상들의 탁자를 둘러엎고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했다고 소리질렀을 때, 그것은 복음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한 시위였을 것이다. 군중들이 거리에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하고 외쳤을 때 그 군중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제 일어났던 대로 그 일을 전했다. 예수는, 평화를 파괴하거나 위협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구 앞에 소환되었다. 그 기구는 바로 대사제에 의해 소집되고 그에 의해 관장되는 대사제의 산헤드린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비록 율법학자-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적의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예수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혐으로 이중 율법의 교사들에 의해 관장되는 벳-딘(불레)앞에 소환되었다고 보고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 시대에 유다와 갈릴래아에 살고 있던 모든 유다인들은 어떤 카리스마적 존재의 종교적 가르침이 아무리 탈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생명을 재판받기 위해서 어떤 종교적 기구 앞에 결코 소환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먼저 대사제와 그의 산헤드린이 그를 법과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확정한 다음에 총독 앞에 소환되었을 것이다. 총독은 자신의 입장에서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라고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은 네 말이다‘ 라는 모호한 대답을 듣고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오 빌라도는 그가 신임하는 대사제 가야파의 판단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시오 빌라도는, 우리가 요세푸스를 통해서 알고 있듯이 자신의 정치적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교활한 전략으로 유다인들을 자극해야 할 임무를 가진 빌라도는, 자신이 유다인의 왕이라고 주장하고 유다인들을 올무에 빠뜨리는 정치적으로 순진한 카리스마적 인물을이용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유다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바라빠와 같은 혁명주의자와 그러한 주장을 하는 한 카리스마적 인물 중 누구를 놓아줄 것인가를 선택할 기회를 줌으로써 사실상 군중들이 혁명주의자를 선택하게끔 강요하였던 것이다. 군중들은 빌라도가 카이사르 이외에 다른 왕을인정한다고 하여 그들에게 군대를 풀까 두려워 혁명주의자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순진한 예수의 추종자들은 본시오 빌라도의 계략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볼 수 있고, 알수 있는 것은 대사제에 의해 선동된 군중들이 바라빠를 외치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들의 분노가 예수를 그들의 왕이라고 부름으로써 군중을 조롱한 빌라도에게보다는 다른 유다인들에게 향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국 십자가 위에 달린 명패는 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는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는스스로 유다인의 왕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처형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양편에 동일한 운명에 처한 혁명주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의 지배에 도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과격한 혁명주의자이건 카리스마적 몽상가이건 간에 누구든지 뿌리 뽑으려 했던 로마의 결단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




6. 무엇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요세푸스와 복음서 양쪽 모두에서 매우 명백하게 드러나듯이, 죄가 있었던 것은 유다인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체제다. 바로 로마의 황제가 총독을 임명했고, 그 총독이 대사제를 임명했으며, 그리고 바로 그 대사제가 자신의 사적 자문회의를 소집했다. 가혹한 세금을 부과한 것은 바로 로마 제국의 체제였고, 백성들이 난폭해지도록 내몰고 발작적인 폭력으로 유다인들을 자극한 것은 로마 총독들의 소행이었다. 또 혁명주의자를 낳게하고 카리스마적 인물들의 씨를 뿌린 것도 로마 제국의 체제였다. 잘못이 있는 것은 유다교의 제도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제도였다. 따라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싸움의 해답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은 유다 민족도 로마 민족도 아니었고, 제국의 체제- 유다인을 희생시키고 로마인들을 희생시키고 하느님의 영을 희생시켰던 바로 그 체제였다.


  그리고 예수는 이해했다. 인간의 영혼을 무시하는 로마 제국의 잔학성과 무자비의 상징이었던 십자가 위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예수는 그의 얼굴을 하늘을 향해 치켜 올리고 기원하였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요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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