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집트를 떠나 40년 동안
시나이 반도에서 유목민족처럼 천막생활을 했습니다.
지금도 중동 아시아에서는
일부 베드윈족이 천막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계시려고
당신 거처로 삼은 장막에서 지내셨습니다.
그 세부 구조는 탈출기에 적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많은 천막들 한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장막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장막에는 성궤가 있고 그 안에는 주님의 십계명을 새긴 석판이 들어 있었지만
하느님의 성상이나 그림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2계명이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거나
만들어 예배하는 일을 엄하게 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신비롭게 그 장막안에 현존하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머물고 계시다는 깊은 안도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장막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마누엘)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상징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유목민의 일원으로서
그들과 함께 여러 곳을 두루 방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현실을 ‘세키나’라고 일컬었습니다.
장막은 그 세키나의 가시적인 형상이었습니다.
요한 복음1장14절과 묵시록 21장 3절에는
장막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는
하느님에 관한이야기가’스케네’하는 그리스어 낱말로 나옵니다.
세키나와 스케네는 서로 매우 닮아 있습니다.
‘스케노스라는 그리스 말은 장막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요한 복음에 나오는”말씀이 사림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1,14)는 대목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장막에서 살고 계시다”로 옮겨도 되는 셈입니다.
장막이라는 상징은 예수님의 육화의 심오한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곧잘 떠돌지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움직이시고 함께 다녀주십니다.
아무리 위험한 곳에 가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머물고 계십니다.
하나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의 상징’도 장막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은 나그넷길”이라고들 노래하듯이 우리들이 세상살이 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천막살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사야는 인간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초막은 목동의 초막처럼 뽑혀 말끔히 치워졌습니다.”(38,12).
죽는다는 것은 천막을 접는 것과 같습니다.
그랬다가 영원히 세상에서 그 천막을 다시 펴서 치는 것입니다.
시편에 또 하나의 멋진 표현이 있습니다.
“나 어려운 일 당할 때마다 어김없이…
주님은 (당신) 장막 그윽한 곳에(나를) 감춰주시며”(27,5)
우리들을 온갖 위험에서 지켜 주십니다.
장막은 실로 하느님과 우리들간의 친교의 상징입니다.
동경 대성당은,
세상의 여러 성당이 그렇듯이,
천막의 모양으로 지어졌습니다.
건축가 탕게씨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장막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