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
요한 복음 4장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구약 성서적인 표징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우선, 『야곱의 우물』에 대한 내용이 언급이 되고 있는데, 우물이라는 것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수의 계시에 대한 말씀들은 이미 유다인들 안에서 통용되고 있는 상징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일부 학자들이 정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다. 이는 유다이즘에서 통용되고 있는 상징의 바탕 위에서 예수의 계시에 대한 말씀이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요한 복음서에서 문제시하고 있는 우물은 그저 평범한 우물이 아니고 『야곱의 우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우물은 그리 짐 산아래 위치하고 있고,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깊이가 32m정도가 되는 우물이라고 한다. 이렇게 깊은 곳에서 퍼 올리므로 아무리 뜨거운 날씨라도 물이 찰 수밖에 없다. 이 시켐 지방에 있어서 성조 야곱에 대한 추억은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켐 지방의 모든 동물은 성조의 이름에 다 연계가 되어 있다.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다. 성조의 이름을 붙여서 우물 명을 만들만큼 성조들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대단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11절에서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은데 …”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얘기하고 있는데, 바로 이 표현 속에는 야곱의 우물이 지니고 있는 전설이 암시되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야곱이 이 우물 앞에 당도했을 때, 이 우물물이 흘러 넘쳐서 야곱이 그 우물물을 마실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런데, 외국인 앞에서 그 물이 흘러 넘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여인의 응답은 전설에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우물은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고 민수 21장 18절을 주석한 타르꿈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우물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7절, 10절, 12절, 14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주다』라는 동사는 선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준다는 것은 선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사명을 맡기시면서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가서 거저 베풀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 자체도 사실상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이기에 조건 없이 우리는 거저 베풀어야 하고, 복음선포 사명이라는 것은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당연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 자체를 선물이라는 개념이 아니고 노력에 대한 어떤 대가라는 의미로 이해하려는 현대인들에게는 비정상적인 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선물로 주어진 것은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은 성서 안에서 보여지는 일관된 사상이다. 준다라는 것, 자신을 내어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처럼 조건 없이 우리도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결국 선물이라고 하는 것으로 대화의 방향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이라는 자연적인 주제에서 대화는 선물이라는 차원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 이 장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의 입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요구했던 그런 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대화 자체가 물에서 선물이라는 것으로 바뀌면서 물을 청했던 예수님은 물을 주시는 분으로, 물을 주어야만 했던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청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나름대로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다.
사실, 표면적으로 본다면 더이상 물을 길으러 올 필요가 없으니까 즉, 자기 삶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청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아직도 물질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라는 분에게서 도저히 두레박도 없는 상태에서 물을 퍼 올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에게 이런 물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는 어렴풋이 나마 예수의 신비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유다이즘 안에서는 우물물에 대해서 몇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물은 유다이즘 안에서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물물이 흘러 넘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조명해주고 참다운 앎을 제공해주는 하느님 지혜가 발산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냉철해지고 하느님의 참다운 지혜를 알 수 있게되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구약에서는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훗날에 와서는 그것이 하나의 멍에가 되어서 오히려 삶의 무게를 더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율법이라는 것은 해방을 체험한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으로서 실존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써 주어진 선물이었다. 바로 이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자로써의 하느님께 대한 그 신앙 속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은총에 걸맞은 그런 삶을 사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하느님을 떠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있을 수가 없는 실존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 율법이었다. 그래서 이 율법은 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고, 대 율법가는 모세이었다. 그래서 후기 유다인 문헌들을 보면 후손들에게까지 전달된 율법을 준수해야되는 이유는 그것이 성조들로부터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열 두 지파의 선조였던 야곱. 그런데 이 야곱의 우물이라는 것은 유다인 전승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4장에서 보면 이 야곱의 우물물은 예수께서 새롭게 주시고자 하는 물로 대체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유다인 백성을 대체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수께서는 야곱보다는 더 위대한 분으로 나타나며, 위대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성조들의 유산을 성취시키시는 분이며, 오직 예수 그분만이 영원한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분이 주실 물이 어떤 것인지를 곧 보여 주게 된다.
7,39를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영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되어 있으며, 7,38을 보면 “누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시오. 나를 믿는 이는 (마시시오). 성경이 말한 대로 ‘생수의 강이 그의 속에서 흐를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주시는 물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이 받을 영이라고 밝히신다. 즉 예수께서 영광을 받게 되실 그때에 주시게 될 성령이다. 그러나 예수의 영광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영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