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4,1-42)
2장의 가나의 혼인 잔치이후에도 7개의 표징들이 신앙의 여정을 보여주는 내용들인데, 대표적인 것이 4장, 9장,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는 비유로 된 내용들이 거의 없는데 단 하나 10장에서 착한 목자의 비유가 나타나고, 마지막부분에서 라자로를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킨 표징의 마지막 부분인 11장이 일곱 번째 표징을 끝으로 공적인 직무의 활동을 다루는 내용들이 종결되고, 13장에서부터는 본질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를 행하시는 내용이 소개된다.
신앙의 여정을 제시해주는 내용 중에서 꼭 빼놓을 수 없는 것이 4장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이다. 이것은 여성 신학에서 논거로써 중요한 부분이며, 6장은 성체성사 제정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로, 사실상 빵을 많게 한 기적은 공관복음과 요한 복음에 있어서 6번에 걸쳐서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 부분도 다루어야 하지만 다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4장을 우선 다루도록 하겠다.
1. 4장의 구조
크게는 두 장면, 구체적으로는 3장면으로 나눌 수 있다.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2장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예수 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다루고 있는 7절~26절. 이 내용이 여기서는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조금은 빗나간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 이 장면에서 중요성을 갖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나눈 대화인 4장 27절 ~38절. 그리고 부차적으로 결론 문구로써 39절 ~42절까지가 셋 번째 장면으로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예수와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1) 첫 번째 장면(4,7~26)
여기서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데, 3단계의 과정으로 소개되고 있다. 물론 이 3단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화의 방식, 관심 이것 자체가 서로 잘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여진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긴밀하게 연계되면서 계시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고, 예수에 대한 인식을 깊게해 가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3단계가 무엇인가 하면, 여기에 3번에 걸친 대화가 이루어진다.
우선 7절~15절로 이것이 첫 번째 대화인데, 첫 번째 대화의 내용은 물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주제는 ‘물’이다. 물이라는 용어 자체가 여기서 9번이나 사용되고 있고, 「물을 마신다」라는 동사와 「물을 긷다」라는 동사가 합해서 8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물에 관계되는 동사가 집중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아서 주제가 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번째 대화는 16절~19절까지로서, 첫 번째 대화에서 주제가 되었던 물이라는 것은 사라지고, 여인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것이 주제로 떠오른다. 남편이라는 용어가 집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 번째 대화인 20절~26절에서의 주제는 경배와 의식에 관한 주제 곧, ‘때’에 관한 주제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 드러난 주제인 물, 사마리아 여인의 개인 상황, 때라는 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계시의 강도를 깊게 해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해 가는데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보면 쉽게 파악 할 수 있다.
2) 두 번째 장면(4,27-38)
두 번째 장면은 4장 27절~38절로 여기서 서론 구실을 하는 것이 27~30절이다. 즉 예수와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전에 막간을 형성하고 있는 내용으로써 여기서는 제자들이 도착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이 시카르 지방으로 떠나는 이런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즉, 인물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의 내용을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은 31절~38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도 두 장면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27절~30절로 막간을 형성하고 있는 부분이고, 두 번째는 31절~38절까지로 고유한 부분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인데, 이 대화의 내용도 31절~34절은 『양식』에 대한 것이 주제가 되고 있고, 35절~38절은 『추수』에 대한 것이 핵심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나눈 부분이 어떻게 서로 상관성을 지니고 유기적으로 연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주제에 따른 구분
1) 첫 번째 장면
① 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대화
우선 주제별로 하나씩 자세하게 살펴보면 첫 번째 장면 4,7-26에서 첫 번째 대화의 내용이 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7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을 때 예수께서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주시오”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해서 대화의 물꼬를 트신 분은 바로 예수님으로 나타나는데 예수님이 먼저 7절에서 물을 달라고 청하신다.
그러면서 즉시 8절에서는 “제자들은 고을로 양식을 사러 가고 없었던 것이다”라고 얘기하면서 제자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해주고 있다. 이것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다. 왜냐하면 나중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을 미리 준비시켜주는 부분으로써 제자들이 마을로 떠나가는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요청에 이어서 사마리아 여인은 9절에서 ‘유다인으로써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라고 반문을 한다. 여기에는 뿌리 깊은 민족적 감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10절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하고 당신에게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당신이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전혀 이야기의 외형적인 모습은 연계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여지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예수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1절에서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 깊은 물에서 물을 떠 줄 수가 있겠느냐?”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어가고 있지 않고 어긋나고 있다. 서로 자기편에서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는 급속도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되고 바로 이것이 20절에서 입증된다.
② 여인의 개인적 상황
사마리아 여인의 개인적인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는 계기를 물에 대한 주제가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6절에서 보면 “남편을 불 이리로 오시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17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18절에서 “당신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있는 남편도 남편은 아니다. 당신은 사실대로 말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개인적인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예언자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주제는 급속토록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하면서 예배에 주제로 방향을 전환하고, 사마리아 여인의 개인적인 상황이 주제가 되어서 대화가 이루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대화는 사마리아 여인의 입을 통해 드러난 예배라는 것으로 방향전환을 해서 21절 이하에서 『때』에 관한 주제로 내용이 넘어가고 있다.
20~26절의 때에 관한 주제로 넘어가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응답에 대해서 23절에서 보면 “예배자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라고 이야기하신다. 바로 이 순간에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가 오셔야 될 것으로 안다”고 25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에서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내용이 언명이 되자 예수께서는 바로 즉시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대화의 물꼬를 『물』로부터 풀으신 예수님께서 결국 대화의 끝을 “당신이 메시아이시다”라는 것으로 종결되고 있다. 결국 자연적인 그런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결과는 계시를 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2) 두 번째 장면
두 번째 장면(31절~38절)을 보면 여기에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먼저 31-34절은 양식에 관한 것이고, 35-38절은 추수에 관한 것이다.
① 양식에 관한 주제
우선 대화의 형태를 보면 31절에서 시장에 갔다가 돌아 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드리는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먹을 음식이 나에게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사설이지만 아마 제자들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먹을 것이 있으면서 마치 없는 것처럼 당신 혼자 먹을 것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졌을 수도 있다.) 그러자 제자들은 즉시 33절에서 “우리말고 누가 먹을 것을 갖다 드린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배제된 인간적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제대로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4절에서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에 행하며 그분의 일을 다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양식에 대한 주제가 아버지에게까지 올라가고 있다.
② 추수에 관한 주제
두 번째 주제인 35-38절은 35절에서와 같이 “아직 넉 달이 있어야 추수 때가 온다고 여러분은 말하지 않습니까?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눈을 들어 들녘을 바라보시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전체가 추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여기서는 추수에 관한 주제가 파견과 연결되면서 나타나는데, 이 추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제자들의 반응은 묵묵부답이다.
38절에서 “나는 여러분이 수고하지 않은 것을 추수하도록 여러분을 파견했습니다.”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파견에 대해서 제자들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그저 가라고 하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 파견 받은 사람의 자세이다. 이것이 여기서 보여지고 있다. 그러니까 추수를 위해서 제자들을 파견할 때 다른 곳에서는 전부다 대화라는 차원에서 주고받는 응답이 있었지만, 이 추수 부분에서만큼은 응답이 없다. 파견하는 자의 뜻에 맞갖게 파견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제자들이 당연히 해야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수행되는 것이다. 중세시대를 거쳐오면서 서구 교회에서는 해외에 선교사들을 파견할 때에 문화적 침략이라고까지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의미가 담겨져 있었지마는 실제적으로 선교사 파견이라는 것은 불리움을 받은 사람으로써 당연히 수행해야되는 직무로 생각을 했고, 그래서 어느 곳이 되었던 선교사들은 그 곳을 향해서 떠났다. 선교 파견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3) 세 번째 장면(4,32-42)
다음으로 39-42절은 결론부분으로써 세 번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대화의 결과로써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이 소개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세상의 구원자라는 예수의 정체성 고백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전체 내용을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나눈 대화가 전체 내용의 중심 부분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결론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의 현존을 우리는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미 첫 번째 장면, 두 번째 장면, 세 번째 장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이 나눈 대화 가운데에서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그 곳을 떠나 마을로 갔다라고 간략하게 언급을 해 주면서 다음 장면을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예수 님과 제자들이 나눈 대화 가운데에서도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해 줌으로써 결론부분을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또 다음 장면을 향해서 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선교적 관점이다. 요한 복음 안에서 유일하게 선교적 관점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4장이다.
3. 구조 요약을 통한 전개 단계
우리가 분석한 내용을 보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놓칠 수 있는 내용들을 지적해 보면, 첫 째로 대화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보면 말을 하는 사람인 예수와 말을 듣는 사마리아 여인이나 제자들 사이에 통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서로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다.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보다는 말 상대자인 사마리아 여인이나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의미 그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있는데 반해서, 사마리아 여인이나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순전히 물질적인 의미에서만 이해한다. 이것이 요한적 문학 양식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오해 내지 곡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시대적으로나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 요한 저자의 문학적인 기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너에게 물을 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라는 10-11절의 말씀을 사마리아 여인이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32절에서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먹을 음식이 나에게 있다”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만약에 물질적인,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말씀이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이런 것은 또 한편 요한 복음 저자가 신앙의 여정 속에서 보여질 수 있는 반응들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성서를 읽는다든지, 말씀을 읽는다든지 할 때에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합리화의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실제적으로 에제키엘은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같이 똑같은 형태로 고통을 겪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힘든 고통은 자신 스스로가 그 말씀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필연성이 늘 자신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갈등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믿음,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결국 이런 길을 되풀이하는 것에 있다.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 위주의 의미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시의 말씀을 얼마만큼 우리 삶의 자리에서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또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의 삶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여지는 모습은 신앙의 여정 안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두 번째로, 사마이라 여인이 보여주는 모습 안에서 예수께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신앙이 한 순간에 절정에 이르지 않고 점차적으로 성숙해 가는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9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다인이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예수를 처음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에 대해서 인식한 것은 종교적 감정 안에서 적대관계에 있던 한 유다 민족의 한 사람이었다. 대화가 깊어 가면서 사마리아 여인은 12절에서 “당신이 우리 조상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냐?”고 얘기한 것은 한 자연인으로써 이해했던 예수의 모습이 선조들의 代에까지 올라갈 정도로 예수에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인식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그 다음에 대화가 깊어지면서 19절에 가서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예언자이십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는 미래의 희망을 키워 주는 사람,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다.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예수가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인식의 강도가 더 깊어지고 있다.
그 다음에 25절에 가서 “그리스도라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것을 저도 압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갖고 있던 신앙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의 앞에서 그대로 표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용 속에 아직은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메시아를 기대하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마리아 여인의 신앙이 대화 가운데서 예수 앞에서 그대로 고백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어떤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이런 의지의 표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갖고 있던 이런 신앙은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했던 그 증언에 바탕을 두고 사마리아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다는 사실을 두고 그분이야말로 세상의 구원자이시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이 성숙해 가는데 에서는 대화의 과정이 있었다. 이 대화의 과정 속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숨기고 싶었던 수치스러운 면도 있었다. 남편에 관한 문제는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얼룩진 상처이다. 이것까지도 들추어내서야 비로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더해 갔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장을 다루지 않겠지마는 소경을 치유해 주시는 이야기에서도 보이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소경은 앞을 보았다는 기쁨보다는 치유 받았다는 사실 자체로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앞에서 자기에게 이루어진 기적에 대해서 증언을 해야하고, 성전에서 쫓겨나는 이런 수모를 겪게 된다. 이런 바리사이들로부터 당하는 박해 속에서 소경은 예수에 대한 인식을 더 깊이 해 나가고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 똑같다. 즉 인생 여정 속에서 어떤 면에서는 자신이 피하고 싶은 그런 사건을 통해서 예수에 대한 인식이 깊어가고 있다. 신앙의 성숙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다 알고 그래서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신앙 생활 태도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은 생각할 것을 제공해 주고 있다. 바로 새 영세자들이 1년이 채 못되어서 실망을 하고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매 순간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만남은 한 순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죽을 때까지 고백하는, 그리고 그 고백을 심도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매 순간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또는 매 순간 주어지는 사건의 정확한 인식을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할 때에는 신앙의 성숙의 속도를 늦추는 결과가 발생한다.
세 번째로, 표면적으로 전개되는 대화의 내용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 그 대화 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주체를 잊어버릴 수 있다. 즉 대화 속에 담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주역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10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선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신다. 더 나아가서 21절, 23절에 가서 보면은 “당신들이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옵니다. 당신들은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예배하고 있습니다”라고 언급되고 있다. 구약 성서적인 개념에서 보면 하느님의 현존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 연계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이 그리 짐 산이던지, 예루살렘이던지 간에 하느님은 거기에 현존하시는, 즉 성역화된 장소가 하느님 현존의 장소로 인식되어 왔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다. 그 뒤를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될 때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입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예배하는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으로 진실되게 경배하는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소망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를 찾아 나선 사람들의 노력에 응답을 해 주는 것이다.
어느 장소에 가서만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고 계신다라는 것이 구약에서 신약에까지 변함없이 흐르는 하나의 줄기이다. 아담이 잘 못했을 때 아담을 찾아 나선 것은 먼저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 못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 나선 것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찾아 나선다는 것은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이 본문의 핵심이다.
요한 복음을 보면 기적 이야기에서 늘 아버지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늘 이야기한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분이시기에 파견하신 분의 뜻을 따라서 사는 삶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제자들의 삶은 어떤 것이냐 하면 마르꼬 3,13-14에서 제자들을 선택하시면서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함이고, 또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고, 악령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 이다. 제자들은 어떤 것이냐 하면, 제자들은 선택해 주신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다. 그것은 곧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분이시다. 이런 아버지의 노력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 선교이다. 그러니까 선교는 비신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알 수 있다. 이미 그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 지를 찾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도 선교의 대상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서의 4장은 『선교적 장』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화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이런 내용을 깨닫는다고 한다면 이 본문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이 텍스트가 전해주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 또한 선행되어야 한다.
4. 이 텍스트의 역사적 배경
1) 유다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예수께서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유다인이 당신이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어떻게 물을 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거부한다. 그렇다면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었기에 사마리아 여인이 이런 응답밖에 할 수 없었는가를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역사적인 관점이다.
솔로몬 왕이 사망한 기원전 926년 이후에 에프라임 지파와 유다 지파 사이에 파벌이 가중되면서 결국 통일 이스라엘 왕정은 남․북 이스라엘왕정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스라엘 왕국은 북쪽에 자리하고, 유다 왕국은 남쪽에 자리하면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각각 수도로 정한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완전히 패망하게 되고, 그 중에 많은 유다인들 즉 지도급 인사들이 남쪽으로 피신해 오게 되는데 피신해 오게 될 때 그들이 형성해 놓은 성서문학을 갖고 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시아 시대에 와서 이런 것이 합쳐져서 모세 오경이 되고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유배를 떠나든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본토에 살면서 식민지 민족으로써 살게 되었다. 그리고 북쪽 왕국을 지배하던 사람들은 앗시리아 사람들이었다. 즉, 앗시리아의 이방 신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다. 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다른 민족이 아니라 동일민족이다.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동일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앗시리아 사람들에 의해서 영토를 잃은 북쪽 왕국에는 이제 더 이상 야훼 하느님이 유일신으로 머물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히려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겼던 신에 종속된 그런 신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앗시리아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그 땅을 점령하게 되고 이방 민족들의 종교와 자연스럽게 혼합이 된 것이다. 더 이상 야훼가 유일한 신으로서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것이 종교적인 감정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고, 남쪽에 있던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을 더 이상 유일한 하느님으로 섬길 수 없는 저 민족과는 우리가 같이 할 수 없는 상태라는 종교적인 감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587년에 남쪽 왕국도 패망하게 되고,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538년에 본토로 돌아오게 되고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힘을 받아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데 이 때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인들 사이의 적대감은 그렇게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종교적인 문제로만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남쪽 왕국에 살던 유다인들이 유배로부터 돌아와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시켐 남쪽에 있는 그리 짐 산에 나름대로 성전을 증축을 하였다. 그러면서 이 그리 짐 산이야말로 성조들의 산이다.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다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이 그리 짐 산을 중심으로 모였던 것이다.
기원전 621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신명기 12장의 내용을 선포하고 있는데 여기에 유일한 성전에 관계되는 율법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하는 것이다. 야훼 하느님께서 세우실 산, 당신이 머무실 곳으로 설정하신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것을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 짐의 성전이다라고 나름대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다인이 이것을 볼 때 모세의 율법을 아주 내놓고 모독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제외하면은 이스라엘 신앙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파문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오경만이 선조들이 자신들에게 물려준 합법적인 유산이다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모세와 흡사한 예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극단적인 성서 해석은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관계를 적대화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성서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즉 성서를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것이기에 내재해 있던 종교적인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해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거의 적대적인 관계에 까지 왔다. 여기서 보면 이 예수님 시대에 얼마나 적대 관계에 있었는가하면 요한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8,48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의 눈으로 볼 때에 마귀 들린 사람들이다. 마귀 들린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벌받은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민족적인 감정이 노골화되있던 시점에서 요한 복음에서는 주석을 붙이기를 유다인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었다라고 완곡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이것은 선교적 관심사를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2)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그 다음에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이것이 그리스도교공동체에 의해서 창출된 문학이기 때문이다. 오직 공관복음에서는 루가복음 만이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을 전해주는 그런 부분에서만 나타난다. 특별한 관심은 표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필립보가 복음을 전하고, 또 필립보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을 베풀어서 예루살렘 모교회와 어떤 연계를 맺게 하는데, 그 연계를 맺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모교회로부터 사명을 받고 사마리아로 파견을 받게 되는 내용이 하나 전해지고 있으며, 마태오 복음서에서 보면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10장에서 사마리아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만을 찾아가라고 하면서 사마리아를 복음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소란을 야기시켰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내용을 미루어 보아 우리가 다루고 있는 요한 복음 4장은 부차적이기는 하지만 사마리아 지방에서의 선교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3) 우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
요한 복음 4장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구약 성서적인 표징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우선, 『야곱의 우물』에 대한 내용이 언급이 되고 있는데, 우물이라는 것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수의 계시에 대한 말씀들은 이미 유다인들 안에서 통용되고 있는 상징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일부 학자들이 정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다. 이는 유다이즘에서 통용되고 있는 상징의 바탕 위에서 예수의 계시에 대한 말씀이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요한 복음서에서 문제시하고 있는 우물은 그저 평범한 우물이 아니고 『야곱의 우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우물은 그리 짐 산아래 위치하고 있고,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깊이가 32m정도가 되는 우물이라고 한다. 이렇게 깊은 곳에서 퍼 올리므로 아무리 뜨거운 날씨라도 물이 찰 수밖에 없다. 이 시켐 지방에 있어서 성조 야곱에 대한 추억은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켐 지방의 모든 동물은 성조의 이름에 다 연계가 되어 있다.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다. 성조의 이름을 붙여서 우물 명을 만들만큼 성조들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대단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11절에서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은데 …”라고 사마리아 여인이 얘기하고 있는데, 바로 이 표현 속에는 야곱의 우물이 지니고 있는 전설이 암시되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야곱이 이 우물 앞에 당도했을 때, 이 우물물이 흘러 넘쳐서 야곱이 그 우물물을 마실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런데, 외국인 앞에서 그 물이 흘러 넘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여인의 응답은 전설에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우물은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고 민수 21장 18절을 주석한 타르꿈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우물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7절, 10절, 12절, 14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주다』라는 동사는 선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준다는 것은 선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사명을 맡기시면서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가서 거저 베풀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 자체도 사실상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이기에 조건 없이 우리는 거저 베풀어야 하고, 복음선포 사명이라는 것은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당연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 자체를 선물이라는 개념이 아니고 노력에 대한 어떤 대가라는 의미로 이해하려는 현대인들에게는 비정상적인 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선물로 주어진 것은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은 성서 안에서 보여지는 일관된 사상이다. 준다라는 것, 자신을 내어 준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것처럼 조건 없이 우리도 내어줄 수 있는 것은 준비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결국 선물이라고 하는 것으로 대화의 방향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이라는 자연적인 주제에서 대화는 선물이라는 차원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 이 장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의 입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요구했던 그런 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대화 자체가 물에서 선물이라는 것으로 바뀌면서 물을 청했던 예수님은 물을 주시는 분으로, 물을 주어야만 했던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청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나름대로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다.
사실, 표면적으로 본다면 더이상 물을 길으러 올 필요가 없으니까 즉, 자기 삶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청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아직도 물질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라는 분에게서 도저히 두레박도 없는 상태에서 물을 퍼 올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에게 이런 물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는 어렴풋이 나마 예수의 신비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유다이즘 안에서는 우물물에 대해서 몇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물은 유다이즘 안에서 율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물물이 흘러 넘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조명해주고 참다운 앎을 제공해주는 하느님 지혜가 발산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냉철해지고 하느님의 참다운 지혜를 알 수 있게되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구약에서는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훗날에 와서는 그것이 하나의 멍에가 되어서 오히려 삶의 무게를 더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만, 율법이라는 것은 해방을 체험한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으로서 실존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써 주어진 선물이었다. 바로 이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자로써의 하느님께 대한 그 신앙 속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은총에 걸맞은 그런 삶을 사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하느님을 떠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있을 수가 없는 실존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 율법이었다. 그래서 이 율법은 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고, 대 율법가는 모세이었다. 그래서 후기 유다인 문헌들을 보면 후손들에게까지 전달된 율법을 준수해야되는 이유는 그것이 성조들로부터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열 두 지파의 선조였던 야곱. 그런데 이 야곱의 우물이라는 것은 유다인 전승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4장에서 보면 이 야곱의 우물물은 예수께서 새롭게 주시고자 하는 물로 대체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유다인 백성을 대체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수께서는 야곱보다는 더 위대한 분으로 나타나며, 위대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성조들의 유산을 성취시키시는 분이며, 오직 예수 그분만이 영원한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분이 주실 물이 어떤 것인지를 곧 보여 주게 된다.
7,39를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영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되어 있으며, 7,38을 보면 “누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시오. 나를 믿는 이는 (마시시오). 성경이 말한 대로 ‘생수의 강이 그의 속에서 흐를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주시는 물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이 받을 영이라고 밝히신다. 즉 예수께서 영광을 받게 되실 그때에 주시게 될 성령이다. 그러나 예수의 영광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 영은 아직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5. 중요 신학적 사상의 주장
이런 유다인적인 배경 하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전해주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볼 것인데, 여기에서는 우선 생활한 물이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제는 “때”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제가 핵심적인 신학사상으로 보여진다.
1) 생활한 물
이 생활한 물은 이중적인 차원에서 주석을 할 수 있다. 생수는 첫째로 예수께서 전해주신 가르침을 지칭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성령의 선물을 지칭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