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1-2세기의 로마 황제들
신약성서에서 거론하는 로마 황제는 셋이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루가 2,1)는 아우구스투스가, 선교 활동을 벌이실 때는 티베리우스가 로마 제국을 다스렸다(루가 3,1). 초대교회의 역사를 다루는 사도행전에서는 클라우디우스 치세 때에 제국 전체에 큰 기근이 들었다고 전하고(11,28), 유다인들을 로마에서 내쫓으라는 클라우디우스의 칙령 때문에 유다 그리스도인들인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도 로마를 떠났다고 보고한다(18,2).
신약성서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 밖의 다른 황제들도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유다인들의 모함으로 예루살렘에서 처형된162년) 것은 네로의 치세 때였다. 네로는 공식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첫 황제였다. 바로 이 박해 중에 베드로 사도가 순교하였고, 바울로 사도가 순교한 것도 아마 이때였을 것이다.
네로 황제의 말년에 제1차 유다 항쟁이 일어났으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진압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트라야누스 황제는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박해하였다. 제2차 유다 항쟁이 일어났다가 진압된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였다. 제1.2차 유다 항쟁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다 같이 로마와 갈등을 빚은 요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황제의 신격화이다. 로마 황제의 신격화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서 기원한다. 기원전 50년대의 갈리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카이사르는 49년 원로원과 집정관을 중심으로 한 공화국의 정치 체제를 중지시키고 자신을 종신 통치자로 세워주도록 원로원에 요청하는 한편,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떠받들게 하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주의자들은 카이사르의 독재 정치와 신격화에 식상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카이사르의 신격화 이래 황제의 신격화는 그리스도교나 유다교 안에서 반대의 표적이 되기 이전에 로마 안에서 언제나 논란 거리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황제의 신격화는 그의 통치 능력과 함수 관계를 갖는다. 무능하고 인기 없는 황제일수록 생전에 신격화를 무리하게 추진하고, 훌륭한 통치자로 평가받은 황제일수록 신격화를 꺼리거나 거부하였다.
가. 아우구스투스
카이스르가 살해된 다음 로마에는 공화국 체제가 다시 들어섰다. 그러나 기원전 27년 카이사르의 손자이자 양자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정적들을 제거하고 지중해 연안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존중하는 뜻에서 ‘지존’이라는 의미의 종교적 칭호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이름으로 채택하고 기원후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다스리면서 로마 제국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이룬 ‘아우구스투스의 평화’ (Paw Augusta)는 축제, 동전, 기념상과 기념비 등으로 경축되었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평화의 재단’ (Art Pacis)이 로마에 세워졌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이 황제의 신격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열광적인 칭호를 붙이거나 자신을 직접 신격화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의 대표에게 주어졌던 전통적 칭호 ‘프린쳅스’ (Princeps 선두)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이런 초기의 뜻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는 동전과 비명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에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덧붙이는 것을 허용하였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자신의 양부 카이사르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기원전 42년) 원로원에서 그를 신으로 선포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제국의 시민과 식민지 주민들에게 자신이 다스리는 로마 제국이 신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로마 이외의 지방에서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용하였는데. 여기서 황제 숭배는 신격화한 로마에 대한 경배의 한 요소로 여겨졌던 것이다. 로마 제국 곳곳에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새 신전들이 건립되었다.
기원전 12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Pontifex Maximus)라는 대사제장의 직책을 수락하고 로마의 안녕을 위하여 바치는 예배 의식을 주관하였다. 이로써 그의 통치권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최고 권위임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 뒤 기원후 4세기까지 로마의 모든 황제는 이 사제장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기원전 2세기에는 원로원에게 ‘국부’ (國父, Pater Patriae)의 칭호를 받았다. 국부는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가장 위대한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에게 주어졌던 칭호로서, 로마를 큰 가정으로 보았을 때 로마의 가족법에 따라 그 곳에서 가족의 생사를 결정할 정도의 절대적 부권(父權, Patria potesta)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