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번영이 시민들의 수가 불어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믿고 출산을 장려하였으나 정작 그 자신은 아들이 없었다. 기원후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원로원은 그가 양자요 후계자로 삼은 티베리우스 장군을 황제로 선포하였다. 아우구스투스와 더불어 승전의 기쁨을 나누었고, 자신과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에게서 난 아들의 죽음 앞에서 슬픔도 함께 나누었던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아직 살아있을 때부터 그의 절대 통치권에 참여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위대한 업적을 수없이 남기고 죽었으므로 로마제국 전체에는 그의 적법한 후임자 티베리우스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아테네 시민들은 중앙 시장 아고라에 커다란 기념비를 세워 새 황제에게 바쳤는데, 그 기념비 아랫단에는 그를 가리키는 칭호로 ‘아우구스투스 신’ (여기서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아니라 티베리우스를 가리킴)과 ‘이 도시의 은인’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티베리우스 자신은 이런 칭호들을 거부한 것 같지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동전에 자신을 ‘신의 아들’로 소개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원로원과 시민들과 식민지 백성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로마는 그의 능력에 비해 너무 거대하였다. 그는 로마의 문화와 종교에서 비켜난 타 종교들에 대해서 극심한 박해를 가하였다. 2세기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이집트 종교의 신비적 예배와 유다교를 오랫동안 억압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신교적 요소를 많이 지닌 이집트 종교는 용인하였지만 유일신 사상을 고집하는 유다교는 계속해서 박해하였다. 한편 그 당시 티베리우스와 그의 행정관들은 유다교와 거기에서 이제 막 파생된 신생 그리스도교를 구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그 둘은 같은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만년에 헤로데처럼 왕위 찬탈과 모반에 대한 공포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자기 가족들을 비롯하여 후계자가 될만한 인물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카프리섬으로 추방되어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