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 생활 – 시골 – 성읍 또는 도시

 

주거 생활




가 시골




  판관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작은 마을들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치며 지냈다. 그러다가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새 왕국이 가나안 사람들이 차지한 많은 성읍을 합병하면서 정치력이 도시에 집중하게 되었다. 다윗이 다스리던 시절에 성읍에 살던 많은 이방인이 야훼 신앙으로 개종하자 이스라엘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민족적 일체감과 종교적 전통을 지켜 주던 오랜 부족 동맹에 매달릴 수 없었다. 부족과 도시의 차이는 이후 수세기에 걸쳐 많은 갈등과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마을과 시골에 살던 이스라엘인들은 오랜 부족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세상의 어느 군주보다 더 높이 받들고, 왕궁과 이스라엘의 통치영역에 이교 풍습을 들여오는 임금들을 배척하였다.


  왕국이 쇠퇴하던 시기에(기원전 600년경) ꡐ나라 백성ꡑ(암 하아레츠)이 보인 활약상에서 이런 기장을 엿볼 수 있다. ꡐ나라 백성ꡑ은 시골의 경작기를 소유한 농민들이거나 도시와 마을의 평민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임금들의여러 정책에 반기를 들고 다윗 가문에만 충성하면서 어떤 왕권 찬탈의 움직임에도 반대하였다.(2열왕 11장) 이들 가운데 가장 철저한 전통주의자들이 바로 레갑인들이다. 레갑인들은 모든 도시 관습에 반대하고 광야에서 방랑 생활을 하던 모습대로 살며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또 서원 기간 동안 머리를 깍지 않고 안정된 주거지도 갖지 않았다.(예레 35장)




나. 성읍 또는 도시




  고대의 성읍은 개울이나 마르지 않는 샘물을 낀 작은 언덕 꼭대기에 성벽을 두르고 대략 3천 명 정도의 주민이 모여 살던 공동체이다. 이 언덕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ꡐ텔ꡑ이라 부르는 흙 언덕으로 되어 있었다. 도시가 파괴되고 그 위에 다시 새 도시를 건설하다 보면 이 같은 흙언덕이 생겨난다. 흙언덕이  점점 높아지면서 곡대기는 면적이 좁아지고, 때때로 집들이 성벽에 바짝 붙어 지어졌다. 라합과 두 염탐꾼들의 이야기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여호 2장)


  주택의 전형적인 형태는 기초가 되는 돌(ꡐ모퉁이의 머릿돌ꡑ; 시편 118,22-23; 마르 12,10)위에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진흙이나 나뭇가지와 이엉 같은 것으로 평평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런 지붕은 더운 날씨에 집안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중풍병자를 지붕 위에서 내려보냈다는 마르 2,4의 기록은 지붕을 쉽게 뜯을 수 있었던 당시의 가옥 구조를 전제한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 이스라엘인들은 토착민들의 전형적인 주책을 본떠 서너 개의 방을 작은 안뜰에 두고, 이층에도 방을 올린 집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뜰이 있는 주택은 비교적 상류층 사람들이 살았고, 일반 서민들은 이보다 훨씬 작은 집에서 비좁게 살았을 것이다. 벽은 두껍고 방에는 보통 창문을 내지 않았는데,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 이지역에서 외부의 더위와 추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집 구조 탓에 방안은 낮에도 어두워 등잔불을 켜 두어야 했다. 이 불을 끌 때는 됫박으로 덮어서 불똥이 튀어 화재가 나거나 불쾌한 냄새와 그을음이 생기는 것을 막았다.(참조; 마르 4,21)


  성문 바로 앞에 마련된 광장은 공공장소이다. 이 곳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원로들이 이 광장에 앉아 송사를 처리하고 재판도 열었다.(룻 4장) 또 이 곳은 장터로도 이용되었다. 성읍에는 하수와 생활용수를 처리하는 시설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쓰레기나 오수 처리가 썩 잘 된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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