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성전(聖戰)
민수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족을 쳐 이기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이스라엘 병사들은 미디안 장정들을 모두 죽이고 임금들도 다 죽였다. 또 사로잡아 온 아이들 가운데서 사내아이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 가운데서도 처녀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죽였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던가? 더구나 이 전쟁은 주님의 명령에 다른 것이었다.(25,16-18) 민수 21,1-3에서 이 같은 대량 학살은ꡐ완전봉헌물로 바치다ꡑ라는 동사로 표현된다.ꡐ완전봉헌ꡑ은 포로는 죽이고 물건은 완전히 파괴한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의 셈족들은 전쟁에 나가기에 앞서 군대의 수장이 어떤 종류의 노획물은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선언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지정된 노획물은 다른 군인들이 차지하거나 다른 용도로 쓸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경우 주님이 그들 군대의 수장이시므로 노획물의 일부나 전부를 그분께 바쳐야 했다. 주님이 군대의 수장이 되셔서 싸우는 전쟁을 성전(聖戰)이라 한다. 실제로 모세오경에서 가장 오래 된 시인 탈출 15장의 승리의 노래를 보면 하느님이ꡐ전쟁의 용사ꡑ로 묘사된다.
성전은 민수기뿐 아니라 여호수아서, 판관기, 사무엘에서도 나온다. 이 책의 젖자들은 성전의 기록들을 후대의 독자들에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창립 이야기로 소개한다. 그들은 성전을 주님과 가나안 신들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보았다. 고대 근도에서 민족과 민족 사이의 전쟁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버리고 승리한 민족의 신을 섬겨야 했다. 성전을 그토록 끔직한 대량 학살로 묘사한 이유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야훼 신앙을 포기하고 가나안의 허수아비 신들을 받아들이고 섬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전에서 요구하는 대량 학살과 완전파괴가 앞에서 예를 든 민수 31장은, 완전봉헌에 몇 가지 제한을 두어 성전의 잔혹함을 부분적으로 완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민수기 저자도 첫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행군 중에 있는 주님의 군대로 여기며, 이군대의 목표로 복수가 아닌 성결과 순동을 요구한다. 성전의 개념은 예언서에서 점차 퇴색한다. 전쟁은 결코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는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평화를 누리고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이사 7,1-14; 예레 21,3-10; 호세 10,12이하 등)
성전의 개념은 특히 여호수아서를 비롯하여 판관기와 사무엘서에 자주 나온다. 이 성전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진두지휘하시는 전사(戰士)또는 용사이시다. 학살과 파괴의 체험 때문에 전쟁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전사로서의 하느님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상일 수 있다. 또한ꡐ원수들까지도 사랑해야 할ꡑ의무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전에서 요구하는 대량 학살과 완전파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죄악으로 보인다. 그러나 ꡐ전사로서의 하느님ꡑ개념은 이집트 탈출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를 다진 그들의 가장 오래 된 체험에서 나온 만큼, 이스라엘의 기원적 역사를 인정하는 한 이 개념을 외면할 수 없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전쟁 문화 속에서 자라났고 그들의 일상이 늘 전쟁에 영행을 받았다. 전쟁은 실로 그들 삶의 일부였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라는 2사무 11,1의 서술에서 우리는 고대 근동의 민족들이 전쟁을 연래 행사처럼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체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듯이 이스라엘인들도 자기네 문화와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성전과ꡐ전사-하느님ꡑ은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성실한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는 현장이요 표상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치른 모든 전쟁이 다 주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지와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서 주님은 당신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지만, 이스라엘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주님께서는 이를 징벌하시려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군대를 끌어들여 그들을 치셨다. 이 때 이스라엘의 패배는 주님의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승리로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은 이를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려고 이민족들을 시켜 그들과 맞서진 것으로 본다.
여호수아와 판관기에 나오는 선전의 개념은 가나안 정복과 관련된 몇몇 전투들을 신명기 법전의 정신에 따라 재해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선전에서 강조되는ꡐ완전봉헌ꡑ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의 우상숭배에서 보호하기 위한 배려이다.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저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숨쉬는 것은 하나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 그래야 그들이 자기 신들에게 하는 온갖 역겨운 짓을 너희도 하라고 가르쳐서,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 죄를 짓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신명 20,16-18)
한 마디로 성전과 전사-하느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한 자애를 드러내는 표상인 동시에 이스라엘을 이민족들의 우상숭배에서 철저하게 보호하기 위한 배려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