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의 성전
헤로데의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이두메아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마지막 임금 히르카누스 2세와 유다의 통치권을 나누어 가졌으나, 무능한 히르카누스를 몰아내고 대권을 쥐었다. 그의 아들 헤로데는 기원전 37년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점령하였다. 로마의 비호 아래 유다 전역에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 헤로데는 기원전 19년부터 야심찬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 계획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한 목적은 세 가지이다. 첫째, 그는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은 물론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을 포함한 온 세상 모든 유다인의 임금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유다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되, 성전 본 건물인 지성소와 성소와 현관은 율법서의 규정에 맞추어 솔로몬 성전이나 제2성전의 본디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였다. 둘째, 그는 당시 고린토,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로마 등의 대도시에 살던 헬라계 유다인들의 찬사를 받고 싶었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성전 본 건물 이외의 부속 건물들은 그리스 건축 양식을 도입하여 크고 화려하게 지으려고 하였다. 셋째, 그는 자신의 팔레스티나 통치를 승인해 준 로마 권력층의 환심을 얻고 싶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동방의 어떤 도시보다 로마 황제의 권력을 옹호하고 로마인들의 식민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도시로 내세우고자 하였다. 성전의 건립은 이런 취지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성전의 한 구역에 속하는 안토니아 성채가 바로 그 좋은 예이다. 헤로데는 원로원에 요구하여 자기를 유다의 통치자로 내정해 준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따서 이 성채를 짓고, 로마 군인들이 이 곳에 주둔하면서 성전 경내에서 일어나는 소요를 쉽게 진압할 수 있게 하였다. 해방절 같은 유다인들의 큰 축제 때에는 로마 총독이 가이사리아에서 이 곳으로 잠시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헤로데의 성전은 앞에서 언급한 본건물과 안토니아 성채 이외에도 뜰, 문, 입구, 회랑, 그 밖의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졌다. 경내와 건물들을 모두 합하여 성전의 크기는 남북으로 450미터, 동서로 300미터나 되었다. 곳에 따라 바위를 깍은 면이 벽이 되기도 하지만, 보통 높이가 1-5미터 되는 돌들을 쌓아 벽을 만들어 세웠다. 북쪽 벽에는 ‘ 타티 문’ 이 있었으나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고, 동쪽 벽에는 오늘날까지도 ‘황금 문’ 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문과 남쪽으로는 두개의 ‘헤로데 문’ 이 나 있으며, 서쪽으로는 네 개의 문이 있어 성전과 시가지를 쉽게 오가게 해 주었다. 안토니아 성채는 북서쪽 모퉁이에서 성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의 유혹 이야기에 나오는 ‘성전의 꼭대기’(마태 4,5)는 키드론 골짜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성전의 남동쪽 끝이었을 것이다.
성전 경내 사방 벽 가까이에는 회랑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왕궁 회랑’ 이라 불린 남쪽 회랑만 기둥이 네 줄이고, 나머지 회랑들은 두 줄이었다. 동쪽 회랑은 ‘솔로몬 회랑’ 이라고 불렀다(요한 10,23; 사도 3,11; 5,12). 이 기둥들 사이에서 율법학자들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토론도 벌였다(마르 11,27; 루가 2,46; 19,47). 또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늘어서서 판을 벌인 곳도 바로 이 회랑이다(루가 19,45-46; 요한 2,14-16).
회랑을 포함한 ‘이방인들의 뜰’과 본격적인 성소 구역은 난간으로 갈라놓았다.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의 뜰보다 약간 높게 만든 성소 구역 안에서 벌어진 이방인 살해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경고문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써서 성전 경내에 붙여 놓았다. 성소 구역 첫번째 뜰은 ‘여자들의 뜰’ 인데, 이 곳에는 헌금 궤가 놓여 있다(마르 12,41-44). 여자들의 뜰 다음에 조금 높이에는 이곳까지 들어갈 수 있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사제들의
뜰ꡑ에는 초막절에 제단 주변을 돌기 위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성소에 들어가는 문은 북쪽과 남쪽에 네 개가 있고, ‘여자들의 뜰’로 들어가는 동쪽 문은 ‘아름다운 문’ (사도3,2)으로 물렸다.
성소 구역은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구조로 지어졌다. 밖에서 볼 때 첫번째 방인 현관인 정면은 너비와 높이가 각각 45미터 정도이지만, 현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너비가 9미터, 높이가 18미터 정도였다. 그리고 현관 내부의 너비는 입구의 너비와 똑같이 9미터, 길이는 18미터 정도였다. 가운데 방인 성소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9미터, 높이가 18미터 정도였다. 마지막 방인 지성소의 크기도 성소와 같았다. 성소와 지성소 위로는 빈 공간이 현관 정면의 높이에 맞추어 45미터를 유지하고 있어서 지붕이 수평을 이루었다. 현관 입구 방향인 동쪽을 제외한 북쪽과 남쪽과 서쪽에는 삼층짜리 곁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건물 지붕에는 금을 입힌 못들을 박아 놓아 새들이 홰를 치지 못하게 하였다.
상아색 벽과 금으로 장식한 이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은 기원 전 19년에 헤로데 대왕에 짓기 시작하여 10년 뒤인 9년에 마무리되었지만, 성전 경내의 다른 건물들까지 모두 완성된 것은 기원 후 64년에 이르러서였다(참조: 요한 3,20). 그러나 70년 제1차 유다 항쟁 말기에 헤로데 성전은 로마 군대에 짓밟히고, 일곱 가지가 달린 황금 등잔대와 제사 상을 비롯하여 많은 성전 기물들이 ‘티투스의 개선문’에 기록된 대로 로마로 옮겨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