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 계약의 책 또는 계약 법전- 사제계 법전, 성결 법전

 

계약의 책 또는 계약 법전(탈출 20,22-23,33)


  ‘계약의 책’(또는 ‘계약 법전’)이라는 명칭은 탈출 24,7에서 소개되고, 그 내용은 탈출 20,22―23,33에 나온다. 계약의 책은 십계명과 동시에 주어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십계명을 일상의 삶에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법전의 삶의 자리는 목축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자리잡아 가는 과도기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바로 뒤의 사회상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계약의 책에는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고대 근동의 법전에서 발견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경우 법조문의 양식은 위에서 언급한 조건법 또는 판례법의 양식을 취한다. 대표적인 예가 동태복수법으로도 알려진 ‘탈리온 법’이다.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3-25). 동태복수법의 목적은 무서운 복수를 부추기는 데에 있지 않고, 복수에 한계를 정함으로써 받아야 할 벌에 비하여 지나친 되갚음을 막으려는 데에 있었다. 이 법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집행하였다. 한 편, 계약의 책에는 탈출 22,17 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십계명과 같은 단정법의 양식도 나온다.


  계약의 책은 내용과 양식면에서 고대 근동의 법전과 비슷하지만, 그것을 기계적으로 옮겨 놓지는 않았다. 탈출기 저자는 성서적 우선 순위에 따라 근동의 법전 내용을 재편집하거나 거지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였다. 예를 들어 근동의 법전에서는 경신례법을 비롯한 종교적 법조문이 매우 드물게 발견되지만, 계약의 법전에는 처음 (20,22-26)과 마지막 (23,10-19)에 나온다. 또 메소포타미아 법전에는 노예들에 관한 법이 보통 맨 마지막에 나오는 데, 계약의 법전에는 경신례법 바로 다음에 나온다.(21-1-11). 이는 노예들이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구약성서의 생각을 드러내며, 아울러 십계명 도입 부분에 나오는 주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도 노예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계약의 책은 언제나 인간 생명을 재산보다 우위에 두고 존중하였는데, 이것도 고대 근동의 법전과 다른 점이다.




(5)  사제계 법전(레위 1―16장)과 성결 법전(레위17―27장)


  출전비평에서는 레위기를 둘로 나눈다. 앞부분 1―16장은 사제계 전승에 속한 본문으로 보고, 뒷부분17―27장은 사제계 전승보다 더 오래된 문헌이지만 나중에 사제계 전승에 병합된 법전으로 본다. 성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전자를 사제계 법전, 후자를 성결 법전이라고 부른다. 1―16장은 사제들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한 제사와 축제일에 관한 규정들을 포함한다.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규정들은 왕정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치던 제례를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7―27장의 성결 법전은 권유와 설교조의 형식에서 후대의 사제계 전승과 분명히 구별되며, 사상적으로는 에제키엘서(기원전 593-572년)에 가깝다. 성결 법전에서는 1인칭으로 소개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윤리적 지침과 경신례적 정화의 규정들을 전달하신다. 이 법전은 19장과 21장에서 볼 수 있듯이 경신례 안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하다가, 마침내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레위기의 저자는 이 책에 실린 모든 법과 규정이 계약의 책처럼 시나이산에서 선포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당신과 이스라엘의 자손들 사이에 세우신 규정과 법규와 법이다.”(26,46;27,34). 레위기의 법과 규정도 십계명이나 계약의 책에서처럼 성서적 우선 순위를 따른다. 곧 하느님께 대한 의무 규정을 먼저 소개하고, 그 다음에 이웃에 대한 규정을 소개한다.


  ‘거룩함’은 레위기 전체에 흐르는 기본 주제이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19,2;20,26).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은 구성원의 윤리 도덕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하느님께 속해 있고 그분의 길을 따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거룩함’의 반대 개념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제외시켜야 할 모든 ‘속됨’이다.(레위 21―22장). 성소가 거룩한 이유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며, 사제들이 거룩한 이유도 거룩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를 주관하기 때문이다.


  거룩함의 반대가 속됨이라면, 깨끗함의 반대는 더러움이다. 깨끗함은 거룩함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자신을 더러운 것과 분리시켜야 한다. ‘거룩함’을 뜻하는 라틴어 ‘상투스’는 ‘분리하다, 가르다’라는 뜻의 동사 ‘상치레’에서 나왔다.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하고 더러운 것과 닿아서는 안 된다. 더러운 것은 거룩하신 하느님과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 될 주변의 우상이나 잡신들과 관계된 것, 그리고 생명이신 하느님과 반대되는 죽음과 관련된 것들이다.  특정한 짐승들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레위 11장; 신명 14,3-21) 단순히 미관상이나 위생상의 이유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상숭배나 인간을 위협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들과 관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돼지는 고대 가나안인들이 제물로 바치던 짐승이고, 이집트에서는 지하 세계의 신들과 접촉할 수 있는 존재였다. 낙타는 고대 아랍인들의 주요 제물이자 신성환 짐승이고, 이집트인들에게는 신적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개는 이집트, 이란, 북부 시리아에서 신성시되었고, 히타이트(헷)에서는 신들이 개위에 서 있다. 이사 66,17을 보면 쥐도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인데, 실제로 하란에서는 생쥐들이 제물로 바쳐졌다. 토끼의 대가리와 발톱은 오늘날까지도 아랍인들 사이에서 부적으로 통하고, 아라비아에서는 올빼미를 죽은 자가 육화한 짐승으로 여겨 공경한다. 이 밖에도 많은 짐승들이 고대 근동에서 제물로 바쳐지거나 신성시되었다. 부정한 짐승들은 제물로 사용해서도 안되고(창세 8,20), 맏물 봉헌이나(레위 27,26; 민수 18,15) 십일조로 바쳐져서도 안 된다(레위 27,32).


  생리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 몸에서 나오는 각종 분비물(고름, 정액, 생리혈 등)도 초월적 힘을 지닌 존재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사람이 이것들에 접촉했을 때 더러워진다고 믿었다.(참조: 레위 12;15장).


  죽음과 연관된 것들과의 접촉도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 그것들이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시신(레위 21,1-3.11; 민수 6,6-7;19,11-16). 짐승의 시체(레위 11장), 무덤(민수 19,16), 그리고 각종 전염성 피부병과 곰팡이와의 접촉은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레위 13―14장). 이런것들과의 접촉으로 더러운 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으므로, 정결 예식을 거쳐 깨끗해져야만 거룩하게 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생명은 존귀하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피안에 있고(레위 17,14), 생명을 뜻하는 피는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피를 마시거나(레위 17,10-12) 피가 아직 담겨 있는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참조: 사도 15,20).


  백성이나 개인이 거룩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과 직접 만나거나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세 같은 몇몇 비범한 인물을 빼고 범속한 인간은 하느님을 뵙거나 그분과 직접 통교할 수 없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교 수단으로 두 가지가 제시된다. 하나는 각종 제사를 중심으로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소, 만남의 장막, 계약 궤, 성전 등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현존하시는 자리이다. 이 둘의 관리는 모두 사제들에게 맡겨졌다.


  창세기에 따르면 성조 시대에는 사제와 같은 특정 계층만이 제사를 거행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조들도 가문의 우두머리로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창세 8,20;15,9-10;22,2-14). 그러나 후대에 내려와 일정한 장소, 곧 성소에서 정기적으로 경신례를 집전하면서 특정 계층이 사제직을 맡게 된다. 이처럼 경신례와 성소와 사제직은 처음부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제들은 흔히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로 인식되었다. 아무도 비록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지닌 임금이라 하더라도 사제들의 중개 임무를 대신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이 하느님께 버림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가 사제가 아니면서 사제의 고유 영역을 침법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불레셋인들과 성전을 치르기 전에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라 주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당시 사제요 판관이던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자 사울이 직접 나서서 주님께 번제물을 바쳤다(1사무 13,7-14). 그러나 제사 집전은 전투의 우두머리인 임금의 소관이 아니라 사제의 몫이었으므로 사울은 신성모독죄를 짓게 된 것이다. 다윗 시대에 계약 궤를 옮기던 중 우짜라는 사람이 계약 궤가 흔들리는 것을 붙잡았다가 죽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2사무 6,6-7).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이 머무르시는 계약 궤는 합당한 신분이나 마땅한 예로 정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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