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가나안 정착 – 이집트 탈출 연대

 

이집트 탈출 연대


   


  이집트 탈출과 관련하여 불행하게도 우리는 고문서들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가 없다. 사건 자체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가 제공하는 연대기적 기록과 고대 문헌들에서 끌어 낸 약간의 암시적 정보를 면밀하게 비교․ 연구한 결과 몇 가지 중대한 역사적 질문들에 답변할 수 있게 되었다.


  언제 이 사건이 일어났는가? 1열왕 6,1은 이집트 탈출부터 솔로몬 치세 제4년(958년)까지를 480년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집트 탈출이 기원전 1438년에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 추정은 이집트 역사에 관한 고문헌과 고고학 증거자료들과 상충되기 때문에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마도 480년은, 거룩하고 완전한 숫자인 40을 한 세대로 보고 여기에 12세대를 뜻하는 다른 완전하 숫자 12를 곱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숫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성서의 연대 측정과는 달리, 라메세스2세(1304-1238년)의 치적을 기록한 이집트 문헌에 따르면 하비루인들이 도시의 요새들을 건설하기 위해 벽돌 나르는 일에 강제로 징집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식량을 저장하는 성읍 비돔과 라메세스를 짓는데 동원되었다는 성서의 증언(탈출 1,8-14;5,6-19)과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비돔과 라메세스는 이집트 제 19왕조와 20왕조의 파라오들이 헷족과 가나안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하 이집트에 세웠던 도성들로서 고센 지방에 있었다. 창세기 저자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파라오의 배려로 이집트의 가장 좋은 땅 라메세스 지방을 차지하였다고 전한다.(창세 47,11). 전에는 라메세스를 타니스나 부바스티스와 같은 곳으로 여겼으나 최근의 연구 자료에 따라 제19-20왕조 때의 주 거주지였던 피라메세스로 본다. 피라메세스는 델타 북동쪽에 있었던 콴티르에 세워졌다.


  한편 라메세스 2세의 다음 통치자인 메렌프타(1238-1209년)가 세운 승전비에 보면 가나안을 정벌할 때 그가 무찌른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이 승전비를 ‘이스라엘 석비’라고도 부른다. 이 석비는 상 이집트 룩소르 유적지에 건설되어TEjs 도시 테베(노-아몬이라고도 함) 서쪽에서 1896년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9세기 이전의 고대 근동 문헌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에 관하여 언급한 문헌으로는 유일하다. 이스라엘 석비의 내용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보조가 테베의 카르낙 신전에서 발견되었는데, 한때는 이 부조를 라메세스 2세의 업적을 그린 것으로 여겼으나 최근에는 메렌프타 승전비와 연결된 것으로 본다. 메렌프타 승전비는 높이가 3.18미터이고 28줄이 쓰여 있으며, 그 내용은 대부분 메렌프타의 승리에 관한 찬양이다. 이스라엘의 이름이 나오는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제후들은 땅에 엎드려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말하고


       머리를 조아린 아홉 가운데 아무도 머리를 들지 못한다.


  테헤누(리비아)가 폐허가 되고 하티가 평정되며


       온갖 악을 저지른 가나안이 약탈당하였다.


  아스클론이 포로로 잡혀 가고 게젤이 포위되었으며


       야노암이 존재하지 않은 듯이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이 황폐해지고 그의 씨앗이 사라지며


       후루(시리아)가 이집트 때문에 과부가 되었다.


   온 땅 전체가 평정되고


       소란을 일으키던 자들이 모두 묶였다(「고대근동문헌」378).




  학자들은 이 승전비를 메렌프타 치세 제5년, 곧 기원전 1234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은 이보다 더 앞서야 할 것이다. 이상의 성서와 고문헌 사료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집트 탈출의 연대를 라메세스 2세의 통치 때인 기원전 13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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