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2,1-3,22)
1.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2,1-7)
1.1. 내용 설명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에페소 교회 ‘천사’에게 보내직 있다. 요한이 보내는 편지들은 이상적인 교회들이 아니라 역사적인 일곱 교회에 보내지지만, 여기서의 일곱 교회들은 하느님 나라에 속하게 될 것이라는 언약을 받고 있다. 여리서 언급하고 있는 천사는 이 지상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써 완성된 교회를 의인화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최고 책임자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들 가운데서 에페소 교회를 첫번째 자리에 올려놓으신 것은 그 교회가 지니고 있었던 다음의 여섯 가지 특징들 떄문이다.
첫째, ‘너의 행한 일’인데, 에페소 교회가 행한 일이란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믿음이요, 세상에서 예수에 대해서나 사탄에 대해서, 빛에 대해서나 어둠에 대해서 보져준 가시적이고 공개적인 믿음의 행동이다. 둘째, ‘수고’는 마치 에페소 교회가 선교적 열정을 지닌 공동체였으며, 아직도 그런 공동체로 남아 있는 것처럼 사도적 수고나 선교적 활동에 무게를 실어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셋째, ‘인내’는 주님의 사도가 지녀야 할 전형적인 덕행으로 이상의 특징들은 신앙을 증언하는 일에 연계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넷째, 악한 자들에 대한 태도는 에페소 교회가 간직하고 있던 윤리적 정통성에 대한 것이고, 다섯째, 거짓 사도들에대한 경계와 여섯째, 예수의 이름 때문에 고통을 참아냈고 용기를 잃지 않았음이다.
2.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2,8-11)
2-1. 내용설명
스미르나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죽음을 겪으시고 나서 새로운 생명을 얻으신 분이시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과 하느님의 영원성을 당신 자신 안에 모아 놓으신다. 그리스도께 부여된 반대 명제적인 모든 호칭들은 스미르나 교회를 위협하는 죽음 때문에 선택된 호칭임에 틀림없다.
2,9에서의 환난이란 대부분 그리스도교 신자를 예수의 고통에 동참케 하는 ‘박해’와 동의어이다. 환난은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가 안고있는 궁핍의 원인이며 결과이다. 즉 가난한 자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도움도 청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궁핍의 결과가 박해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스미르나는 마태 5,3에서 말하는 첫번째 행복을 실제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며,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이다.
10절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포에 떨게 하는 하느님의 현현을 특징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장차 당할 고통이 문제시 되고 있다. 여기서 열흘이란 한정되지 않은 기간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되는 경우 대개 오랫동안 지속되지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충실성을 간진하라고 요구하고, 월계관을 주겠다고 언약하는 것은,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가 주님께 충실하게 될 때, 그 공동체 또한 불사 불멸을 보장해 주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2.2. 신학적 반성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는궁핍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화를 면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여기에서처럼 다른 많은 곳에서도 백성들 가운데서 가장 버림받은 계층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공동체는 여신인 로마와 만신전을 거의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미르나 교회는 하느님께서 충실하신 분이시며 당신의 불변하심을 나누어 주실 것임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함께 나우어 주실 생명을 만끽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3. 베르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2,12-17)
베르가모 교회에 보내 편지 속에 나타난 있는 그리스도론적 호칭인 ‘쌍날칼’이라는 표현의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칭하는 이미지인데(이사49,2;에페6,7;히브4,12) 그 이미지가 베르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의 테두리를 형성하고 있다(12절과 16절). 쌍날칼의 이미지는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음란한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으러 오신 것임을 전해주는 묵시 19, 15-21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승리자에게는 두 가지 보상이 언약되어 있다. 첫 번째 보상은 ‘감추어진 만나’를 주겠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빵은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하는데, 만나인 말씀은 아직 감추어져 있으나 승리자에게 주어질 것으로써, 그것을 통해 승리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 자체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언약은 새로운 이름을 새겨 놓을 수 있는 자그마한 흰 돌이다. 흰돌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의사 표현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흰돌은 베르가모 사람들을 선택된 자들의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있게 하는 권리를 표시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비의 베일을 벗겨내시어 성령께서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실 것이다.
위와같이 베르가모 공동체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은 투신이요 행동인 것이다.
4. 티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2,18-29)
그리스도께서는 티아디라 교회에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계시는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묵시록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호칭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최고의 칭호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분으로 특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묵시록 속에서 눈은 성령을상징하고 있고, 불은 전통적으로 성령께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놋쇠로 된 발(1,16)은 견고성, 안전성, 굳건함을 상기시켜 준다.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보다’(2,23)라는표현은 무녀(巫女)의 신탁에 있어서도 분명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영지주의적 형태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언자로 자처하는 그 여인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성령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들과 예언을 찬탈하는 거짓 예언자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5.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편지(3,1-6)
여기서 그리스도께 붙여진 호칭은 1,4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는 ‘하느님의 일곱 영’과 1,16에서 언급된 바 있는 ‘일곱 별’이다. 사르디스 교회에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주는 바로 그 영인 하느님의 영을 충만하게 가지고 계신 분이시며, 당신 손에 교회들의 영광스러운 운명을 쥐고 계신 분이시다. 여기서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들은 생명과 소행이라는 기본적인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르디스 교회는 사르디스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름뿐, 실상은 죽어 있는 교회이다. 결코 신뢰를 얻을 수 없는 그들의 소행으로는 하느님께 바칠 것이란 하나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말씀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께서는 더 이상 사르디스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행동을 이끌어 가시지 않았다. 사르디스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삶에 동맥경화를 일으키게 한 것은 관습과 인습 그리고 관례 추종주의였다. 그러기에 사르디스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난 날을 뒤돌아보며 끊임없이 깨어 있는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간다면, 사르디스 교회는자신이 지니고 있던 거짓 이름을 잃게 될 것이고(1절), 생명의 책에 기재되어 있는 이름을 받게 될 것이다(5절)
6.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3,7-13)
6.1.내용 설명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밀접한 계를 맺고 있음을 보져주고자 했다면, 필라델피아에 보내는 편지는 그리스도와 하느님께서 내적 친교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더 강조해서 전해준다.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를 제외하고는 묵시록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거룩한 분’이란 원래 하느님의 칭호이다.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1,18)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열쇠 또한 소유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예루살렘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최종적으로 그 문을 열어 젖하시기 위해 그 열쇠를 사용하실 것이다. 그리고 열려진 문으로 표상되는 교회의 상징은 이중적일 수 있다. 첫째, 사도 바오로는 이 지역에서 교회의 선교적 개방을 지칭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둘째, 열려진 문이 필라델피아 신자들의 사도적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도시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던 것처럼, 천상 예루살렘의 문이라는 생각을 저버리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다.
10절의 “인내하라는 나의 말”이라는 것은 “인내를 하도록 부추기는 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12절의 성전 기둥은 견고성과 받쳐주는 힘을 상기시켜 준다.
승리자는 그의 심오한 정체성을 형성시켜 줄 세 개의 이름을 받게 될 것이다. 첫째는 하느님의 이름이요, 둘째는 자신이 시민이 되는 하느님 도시의 이름이요, 셋째는 완전하게 알려진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6.2. 신학적 반성
가난과 충실성은 교회로 하여금 선교적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해 준다. 역설적으로,가난과 충실성은 교회를 새로운 예루살렘인 하느님의 도시, 하느님의 성전의 받침대가 되게 한다. 그곳에 그 나라의 시민으로 가장 먼저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지키고 선포하는데 뒤따르는 불안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인 것이다.
7.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3,14-22)
그리스도께 붙여진 ‘아멘’이라는 호칭은 유일무이하면서도 특이한 호칭이다(3,14). ‘아멘’이란 충실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동참한다는 의미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가 응답하는 외침인 것이다. 그리고 ‘예’라는 것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충실하게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 점은 ‘충실한 증인’이라는 표현(1,15)이 입증해 주고 있다.
라오디게이아 교회의 미지근함은 다양한 형태로 주석될 수 있다. 라오디게이아는 스미르나와는 달리(2,9) 실제로 가장 불행한 자이면서도 스스로가 부자라고 믿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기상 천외한 이런 표현은 라오디게이아 교회의 실상을 완벽하게 요약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희망에 문을 닫아 걸고 있는 것이다. 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결국 이 교회를 다시 뜨겁게 달구어 놓으시려는 결정을 내리시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의 문을 강제로 열게 하시지는 않는다. 그분께서는 그 교회에 들어가시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계시고, 애원하고 계신다.
8. “나는 곧 오겠다”라는 표현의 의미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를 제외하고 다른 편지들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도래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서 두드리고 있다”라는 표현은 그분의 도래가 눈앞에 다가 왔음을 또는 이미 행동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9. 묵시 1-3장의 핵심 주제: 교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 묵시록 1-3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들 안에서 진정한 권위를 행사하시는 인자의 주님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계신다. 그분은 교회의 주님이시며, 상징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교회가 아닌 지상에서 순례하는구체적인 교회를 사랑하시며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