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바빌론에 내려진 심판(17,1-19,10)

 

제20장 바빌론에 내려진 심판(17,1-19,10)


일곱 봉인된 책에 관한 내용은 어쩔수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투쟁의 이유와 방법,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지적해 준다.  일곱 봉인된 책을통해 표명되고 나팔 소리에 의해 야기된, 피할 수 없는 투쟁 초기에, 이중적인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이중적인 희망은 이중적인 부르심이기도 했다. 첫번째 희망은 바로 복음이다. 그리고 인자가 친히 가져다 주시는 두 번째 위로가 있게 될 것이다. 각자는 지상적 소명들이 활짝 그 모습을 드러내는 포도주 저장고와 창고에서 자기의 몫을 갖게 될 것이다.


  


1. 창녀 바빌론(17,1-18)


1.1. 여인과 용(17,1-7)


창녀 바빌론의 역할은 일곱 나팔에 관한 내용 속에서 메시아의 어머니인 태양을 입고 있는 여인이 수행한 역할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물론 창녀 바빌론과 태양을 입고 있는 여인은 상반된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이 장면에 개입하는 천사의 정체성은 일부나마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즉 이 천사는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중의 하나이다. 그 같은 사실은 창녀 바빌론에 대한 심판이 일곱 대접을 통해 전달된 심판에 속하는 것처럼 주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창녀의 모습은 상당수의 예언서 본문을 상기시켜 준다. 용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 받은 그 여인은 손에 잔을 들고 있는데 그 잔은 우상 숭배를 지칭한다. 예언서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도시들은 유일하신 참다운 하느님께 대한 불충함의 표현인 음행으로 상징화되고 있다. 여기서 천사는 무엇인가 보여주겠다고 선언한다. 즉 ‘보여주다’라는 동사를 통해서 로마-바빌론의 붕괴와 붕괴의 원인이 표명되는 것이다.



1.2. 여인과 그녀의 세상(17,8-18)


여인은 실존의 근거가 됨과 동시에 권좌를 바쳐주는 짐승 위에 올라타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짐승은 제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13장의 짐승에서와는 달리 이 짐승이 새로운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 주는데, 특수한 것이란 ‘그 짐승이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짐승이 일곱 머리를 가졌다는 점이다. 일곱이란 실제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로마 황제의 숫자가 얼마이든 관계없이 권력의 총체성을 표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다.


열명의 왕들이 어린양을 최종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짐승에 의해 모여들게 된 지상의 왕들을 지칭한다면, 어린양은 마치 천상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지상의 왕들과 짐승 그리고 거짓  예언자에게 결정적인 패망을 가져다 줄 하느님의 로고스-기수와 같다.


그리고 제국의 색깔인 붉은색을 하고 있는 짐승에 올라탄 대 창녀는 광야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일곱 산 위에 그리고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 광야는 그녀가 거주하는 곳으로 하느님의 부재로 인해 토지가 불모지가 된 곳이다. 산들이란 그녀가 자신을 신으로 내세우는 높은 장소이며, 많은 물들이란 그녀가 다양한 방식으로 통치하는 범주에 속해 있는 많은 백성들을 의미한다.




2. 바빌론의 멸망(18,1-24)


바빌론은 1세기 말 로마를 통해 역사적으로 육화된 지상적 실재임에 틀림없다. 그 로마가 사라진다는 것은 한정된 어는 한 역사의 종말과 역사 자체의 종말을 전해주는 일곱 개라는 단위로 구성된 내용의 최종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도성이란 것이 사람들이 거처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지, 화재를 당해 황폐해지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바빌론이 불타서 패망하게 된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가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통곡 자체는 세 장면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간 부분의 내용은 그토록 풍부한 재화들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상인들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전해준다.


천사는 바빌론이 멸망할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파멸될 운명을 지니고 있는 도시에는 야생 짐승들만 우굴되게 될 것이고, 거기서는 야생 조류들이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기에 바빌론을 떠나가라는 명령은 매우 구체적으로 예언서 본문들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매우 다급한 형태로 주어지고 있다. 즉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죄와의 친교와 맞바꾸지 않기 위해서 바빌론에서 떠나야만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떠난 후, 바빌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오직 죽음과 슬픔과 굶주림뿐이었다. 이러한 불행들은 대화재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행한 모든 권고는 주 하느님은 강하시다라는 주장으로 종결되고 있는데, 그 주장은 그들에게 위안을 가져다 준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강한 힘을 정의로운 심판 때에 드러내신다.


그리고 태워서 나는 연기는 세상의 왕들로 하여금 통곡하며 울게 만든다. 그들이 통곡하는 모습은 구약 성서적 모델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재앙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데, 그 모습은 상인들과 선원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가슴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슴을 치는 행위는 상복을 입는 것과 대등한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행위는 누군가 사망했을 때 하던 관습인 먼지를 뿌리는 선원들의 행위를 통해 완성되게 될 것이다.


또한 상인들이 부르는 애가는 대바빌론의 패망이 가져다 준 결과를 표명한다는 구실하에, 경제적 활동을 통해 교만하기 그지없는 도성이 되게 한 부(富)와 사치스러움을 단죄하기 위해, 그것들의 내용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거명해 주는 내용에 뒤이어 나타난다. 본문에 서술된 목록에서 금과 은과 보석에 진주가 첨가되어 언급된 것은 묵시록 17,4에 의하면 창녀가 몸치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패물이 바로 금과 보석과 진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홍색 옷감이 언급된 것은 창녀를 묘사해 주기 위함이다. 또한 대리석은 사치스러움을 드러내는데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기에 첨가되어 있다. 따라서 상인들은 그토록 진귀하고 소중한 많은 상품들이 연기 속에 파묻혀 버리는 것을 보며 안타깝고도 슬프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원들의 통곡을 통해 묵시록 저자는 에제키엘서의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라는 것과 띠로에 예고된 전형적 처벌이 실제로는 제국의 수도를 겨냥했었던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18,20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다시 한번 권고가 주어지는데 이 부분에서는 어조 자체가 변하고 있다. 땅위에 거처하고 있는 다양한 부유의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늘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기쁨에로 초대받고 있다. 이제 절대절명의 순간에 힘이 센 또 다른 천사 하나가 개입하는데 이것은 바빌론에 대한 심판이 하느님의 계획이 구현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한 단계가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천사가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바빌론으로 그의 종을 보내는 내용을 상기시켜 준다.




3. 결론으로서의 최종적 전례(19,1-10)


바빌론을 처벌하는 모습 속에서 구원이 현재화되고 있음을 깨닫는 자들은 하느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서 통치하고 계심을 고백하는 자들과 함께 완전하게 일치하고 있는 자들이며, 하느님의 통치 아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하나되고 있는 자들이다. 이 부분은, 묵시록에서 일곱 번째에 해당되면서 동시에 마지막에 해당되는 전례의 시작은, 격려성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전례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하늘에 있는 수많은 무리에 대해서 언급한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선택된 이들은 마치 장막 축제를 거행할 때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이들처럼 현존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많은 무리란 제국의 수도인 로마를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종말을 보았고, 참다운 정의가 거기서 성취된 것을 목격한 모든 이들이 한데 모여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할렐루야라는 외침으로 전례를 시작한다.


묵시록은 19,8을 통해 역사적 영역이 사실상 끝났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이제는 역사 속으로 뛰어드는 일만이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사목적이다. 위협적이고,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세계 속에서 요한은 일곱 교회들에게 그들이 수행해야 할 선교가 무엇이고, 그들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그들이 어떤 엄격함을 지녀야 할지, 나아가 그들이 믿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를 재차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빛의 역할을 하도록, 그리고 밀가룩 속에 있는 누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러한 가치 전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그 도성을 떠나야만 했다.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떠나는 것이 구원에로 나가는 길이요,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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