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사탄의 패망(19,11-20,15)
1. 첫번째 환시: 흰말을 타신 분(19,11-16)
19,11에서 네 번째로 하늘이 열리는 모습을 전해주는데, 그 모습은 그 이전의 모습들과 정확하게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는 하늘 자체가 열려지는데, 그 모습은 보다 완전한 계시가 전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늘이 열림으로써 제일 먼저 보여진 것은 다른 경우에서들처럼 말이다. 그 말은 6,2에서 기술한 바 있는 것과 똑같은 흰말이다. 말은 전쟁을 위해 훈련된 동물이기는 하나, 그 말이 흰색 말이라는 점에서, 그 말은 평화스러운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성서학자들 거의 대부분은 말을 올라탄 기수가 메시아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메시아를 전투하는 기수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결코 전통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시해야만 한다.
‘충실한’이라는 형용사는 수난 속에서 보여주신 예수의 충실성을 참조케 하며, ‘참다운’이라는 형용사는 예수께서 항구하시다는 것과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승리를 항구하게 일구어 내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수는 여기서 하느님 자신의 말씀처럼 특징지어지고 있다. 이 기수는 충실하고 참다운 증인이며 아멘이신 분, 곧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틀림없고 견고하고 영원한 증언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정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신다. 정의란 하느님의 구원적 심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된 정의로운 심판은 그리스도의 구원적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기수에 대해 소개하면서 우선적으로 불꽃 같은 그의 눈에 대해 언급한다. 불꽃 같은 눈이라는 표현은 그의 통찰력이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로 하여금 정의로 심판하고 싸우게 해 준다. 그는 또한 머리에 많은 관을 쓰고 있는데 그가 왕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있음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피에 젖은 외투에 대해 언급하는데 언급된 피는 수난 속에서 충실성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피임에 틀림없다. 피의 색깔은 전사에게 걸맞는 것이며, 피는 승리를 일구어 내기 위해 피를 흘리게 한 자에게 걸맞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받은 선택된자들과 더불어 시련과 고통에 직면해 살아가는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세상에서 멋진 전투를 이끌어 가실 것이다.
기수인 메시아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의 이미지는 인자에 관한 개막 환시와 베르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연상케 해준다. 그러나 여기서는 적들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고 있다. 끝으로 생각해 볼 것은 진노의 포도주 확이다. 진노의 포도주 확이라는 표현은 원칙적으로 이사 63,3에서 온 예언적 이미지가 혼합된 표현이다. 하느님의 진노는 두말할 여지없이 투쟁 선포가 있은 후, 전투에 참가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사탄과 용, 그리고 짐승과 거짓 예언자들을 향한 진노이다.
2. 두 번째 환시: 전투에로의 소환(19,17-18)
전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천사의 소리는 모든 새들에게 전달이 되지만, 여기서 언급한 새들이 먹이를 찾고 있는 새들이라고 이해케 해 준다. 팔레스틴에는 야생조류들의 종류가 상당히 많았으나, 그런 새들은 모두가 썩은 고기를 먹는 새들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부정한 것들이었다. 살들은 야생조류들에 의해 먹혀지게 될 것이고, 부정함은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즉 폭력을 결정하는 자들은 부정한 야생 조류들에게 먹혀지게 될 희생제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는 새들을 몰아 넣었을 때에 큰 소리를 외치고 있으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3. 세 번째 환시: 흰말을 탄 기수의 승리(19,19-21)
왕들만이 흰 말을 탄 기수 한 사람만을 상대해서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대동하고 있는 왕들이 전투에 나간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영한 것이다. 투쟁은 세상과 인간들의 행복이라는, 이 두 개념을 대립시킴으로써 거대한 투쟁으로 일반화되고 있다. 그러한 투쟁은 영원히 지속되고 있으며, 삶의 순간 속에서 그것은 체험되고 있다. 메시아가 이끄는 종말론적 전투의 첫번째 희생자들은 악마가 조종하는 진영의 핵심 책임자들이다. 여기서 짐승을 동반하고 있는 공범자는 바로 거짓 예언자인데, 그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 안에서 육화된 자로 용의 말을하는 자이다.
4. 네 번째 환시: 용의 결박(20,1-3)
용의 결박을 묘사해 주는 네 번째 환시는 저항과 전쟁이라는 것에 결정적으로 종지부를 찍고 있다. 즉 말씀의 칼은 짐승과 거짓 예언자로 하여금 더 이상 유혹적인 말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더 이상 탈선을 하지 못하게 막아 버렸다. 여기서 보면 하와를 유혹했던 장본인으로서 짐승과 거짓 예언자의 주인인 용은 천년 동안 결박되게 된다. 그 후에 그는 잠시 풀려나게 될 것이다. 잠시 동안 풀려나게 된다는 지적은 용이 벌이는 투쟁이 결정적으로 패배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묵시록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중의 하나인 ‘천년’에 관한 내용에서 묵시 20장을 주석하는 데 있어서는 처음부터 두 부류의 주석자들이 있는데 하나는 천년을 도래해야 할 시기로, 다른 하나는 이미 현존하고 있는 시기로 간주하는 견해이다. 도래해야 할것으로서의 천년으로 보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미래는 종말에 이루어지게 될 미래로 기다려질 수 있다. 유스티누스와 파피아스 그리고 이레네오 같은 교부들은 인간들이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축복이란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천국에 마련해 두셨던 축복들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한 순간 중단되었던 하느님의 계획이 급기야 성취된 것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현대에 와서는 부뤼취 교수가 주장한 예언적 천년설을 받아들이는 주석 학자들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그들은 묵시 20장을 묵시적 노선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 경우 묵시 20장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당신이야말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표명하실 미래 시기가 예고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견해는 대다수의 개신교 주석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관점이다. 둘째, 여기서 말하는 미래는 묵시록의 편집시기와 관련될 수 있다. 스위트나 위이예 같은 교수들은 천년이라는 것이 피비린내 나는 박해 시기가 지난 후 교회의 쇄신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이미 현존하는 것으로서의 천년이다. 이 견해는 천년을, 현재 시기를 상징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묵시 20장을 그런 식으로 주석하는 학자들은 묵시 20장에서 천년이라고 언급된 것이 그리스도의 도래, 특별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작된 시기에 대해서 신약성서, 그 중에서도 특히 묵시록 다른 곳에서의 내용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묵시록 저자는 그리스도와의 통교를 인류 타락의 회복으로 정의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그 이유는 천년이란 전통적으로 천국에 체류하는 기간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주석이 실제적으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유다이즘과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메시아적 왕국의 기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본문들은 항시 의미적 기간을 문제시 하고 있다. 시편과 이사야서는 메시아적 왕국의 기간이 시련이나 축복의 기간과 같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930살에 죽었으며 그것은 결국 그가 낙원의 시기가 끝나기 전에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유다인적 전승의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메시아께서 시작하시게 될 낙원에서의 체류가 천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묵시20장에서는 천년이란 것이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결박하여 더 이상 파괴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시는 시기로 현재 시기를 특징짓고 있다. 이 시기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시기이다.
유다인적인 영성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위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구원 역사는 시온 안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영광이 머물고 그것을 세상에 투영시키기 위해 선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이 일시적으로 어떤 불충한 모습을 보여주었든 간에,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라는 사실은 온 세상에 영성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중재는 선택된 그 백성의 증언을 듣게 된 민족들을 더 이상 빼앗을 수 없도록 사탄을 신비스럽게 묶어 놓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탄이 천년 동안 결박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시20장이 묵시록 전체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묵시록에 기여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바빌론과 두 짐승들을 차례대로 강타한 심판이 있은 다음, 이제 첫번째 적인 악마, 오래된 뱀에 대한 처벌이 뒤따른다. 그리고 사탄이 묶여 있는 천년 동안, 신앙인들은 심판권을 행사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며 통치한다. 이것이 첫번째 부활이다. 이 첫번째 부활이라는 표현 형태는 타르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두 번째 죽음이 표상하는 세계와 동일한 세계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타르굼에서 두 번째 죽음이란 묵시 20,14과 21,8에서 처럼 영원한 처벌이 이루어지는 곳을 지칭한다. 두 번째 죽음이 지옥을 의미한다면, 첫번째 죽음은 육체적 실재를 갖고 있는 인간의 육체적 죽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더 이상 두 번째 죽음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더 가한 그리고 심판을 뛰어넘는 그런 삶을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삶은 영원한 삶이며, 요한 복음서가 전해주는 바로 그런 삶으로 부활한 삶이요, 영원한 삶인 것이다.
5. 다섯 번째 환시: 죽음과 부활(20,4-10)
묵시록 저자가 본 다섯 번째 환시의 대상은 옥좌라는 사물이다. 다시말해서 심판하시고 통치하시는 인자와 하느님에 관한 환시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묘사되고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목을 베인 사람들의 영혼이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자들은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짐승이나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지금은 하느님 면전에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승리자들인 것이다. 묵시록 저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보다는 신앙인들이 알고 있는 생명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살아나다’와 ‘군림하다’라는 두 개의 동사가 연계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시고(1,18) 통치하시듯(19,16) 살아서 통치한다. 그리고 6절에서의 나머지 죽은 자들이란 위어서 언급한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언급한 것처럼 천년 동안 죽은 자들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부활이 없고, 6절에 가서야 그들을 위해서 부활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6. 여섯 번째 환시: 하늘과 땅의 종말(20,11)
다니 7,9에서 보면 심판관이 입은 옷은 흰색이었으며, 그분이 앉아 계신 옥좌는 불 같은 붉은색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흰옥좌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런 옥좌에 앉아 계신 심판관은 그 이름이 분명하게 거명되지 있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여러번에 걸쳐서 옥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지칭한 경우를 보면 하느님이라 말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전승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심판을 하신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책이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성서에서 상당수의 본문들은 메시아께서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묵시록 저자가 그리스도의 신적인 특성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심판과 인자의 심판사이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것을 표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7. 일곱 번째 환시: 죽음의 소멸(20,12-15)
로마 법정에서는 형량을 구형하기 위해서 재판관만이 연단에 앉게 된다. 변호인과 형사 피고인은 선 채로 그 앞에 자리한다. 본문에서는 재판관이 흰 옥좌를 점유하고 있다고 언급할 뿐 로마의 재판관이 자리하고 있던 연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죽은 자들은 언도를 기다리면서 서 있다. 여기서는 심판을 받기 위한 일반적인 부활에 관한 내용이 소개된다.
책 하나가 펼쳐졌다. 심판을 하기 위해 인간들의 모든 행동들이 천상의 책들 속에 담겨져 있다는 것은 사실상 후기 유다이즘의 묵시록들 속에 나타난 핵심 사상이다. 여기서 펼쳐진 책은 생명의 책으로, 어린양에 의해 주어진 생명의 책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같은 의미이다.
죽은 자들은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다라는 주장은 구약성서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은 인간들이 행안 행실 전체와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은총과의 만남인 것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은총에 의한 구원의 심판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