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종말에 대한 세가지 묘사 내용(21,1-22,5)

 

제22장 종말에 대한 세가지 묘사 내용(21,1-22,5)


1. 묵시21,1-22,5의 문학적 일체성에 관한 고찰


묵시 21장은 매우 유사하면서도, 극히 상이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21,1-8과 21,9-27). 실제적으로 묵시 21장에서는 두 번에 걸쳐서 하느님 곁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부의 성시(成市) 예루살렘이 문제시되고 있다. 한편 두 부분은 처벌이 가져다 주는 부정적인 면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맺음되고 있다.


그리고 묵시 21장이 천상 예루살렘에 관한 내용을 전해주는 두 부분을 내포하고 있아면, 천상 예루살렘에 관한 세 번째 내용이 22,1-5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드루고 있는 부분이 두 부분이 아니라, 세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세 부분의 내용이 문학적 유사성을 드러내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는 일이다. 우선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21,1-8과 21,9-27 그리고 22,1-5의 각 내용들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먼저 묵시 21,1-8을 보면, 여기서 나타나는 중추적인 주제는 새로운 사상이다. 즉 새로운 하늘과 새 땅에 관한 환시, 바다를 포함해서 옛 것들이 사라짐.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기에 더 이상 죽음이 없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은 예언자 이사야가 구체적으로 예언한 몇몇 내용들을 통해 표명된 바 있다. 둘째, 21,9-27은 천상 예루살렘에 대해서 묘사해 준다. 천상 예루살렘의 외형적인 모습에만 깊은 관심을 갖고 묘사해 주고 있는데, 그 점은 영광에 관한 주제를 강조해 주려는 것이다. 이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며, 하느님의 영광은 그 도성을 밝혀 준다. 민족들은 그 도성의 빛 가운데서 거닐 것이고, 세상의 왕들이 자기네 영화를 가지고 그곳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래서 성전 문들은 밤낮으로 열려져 있을 것이며, 사람들은 그곳으로 민족들의 재산을 가지고 올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우선 9절에서의 시작 내용이 대 창녀에 관한 환시의 서론에서와 동일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일곱 대접을 들고 와서 선견자와 이야기하며 말한다. 조금 더 나아가면 다시금 두 본문에서 병행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요한은 계시의 대상을 묵상하기 위해 영에 이끌려 간다. 이처럼 17장과 21장에서의 내용들이 그토록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묵시록 저자가 상징적인 두 인물들이 서로 상반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10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이 21,2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기서 되풀이하여 사용하고 있다. 세째로 22,1-5의 내용은 강물이 흘러 나오게 될 미래의 성전에 관계되는 예언인 에제 47장을 직접적으로 투영시켜 준다. 또한 하느님의 최종적 통치를 예언한 즈가 14장도 참조하고 있다. 묵시록 저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과 천상 예루살렘 그리고 종말의 낙원사이에 그 어떤 차이점도 없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해 주자는 것이다.



2. 새로운 세상(21,1-8)


2.1. 새 하늘과 새 땅(21,1-4)


여기서의 환시는 여덟 번째에 해당되는 것으로써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토록 염원해 왔던 새로운 세상의 재건에 관한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세 1장에서 서술된 창조된 세상 전체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참다운 재 창조가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온전히 새로워졌다는 것의 첫 번째 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은 마치 자기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처럼 묘사되고 있다. 묵시록 저자는 새 예루살렘을 도성의 이미지에서 여인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고 있는데, 이것은 이사 52,1에서의 시온의 딸에 관한 이미지를 통해 도성의 이미지를 여인의 이미지로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천상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 지니고 있는 성성(聖性)으로부터 일치의 근거를 찾은, 성도들의 통교인 것이다. 이 통교는 하느님께서 친히 건설하신 그리고 그분께서 무상으로 찬란함을 부여하신 예루살렘 도성에 비교되고 있다.


‘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것이다’라는 표현은 눈물을 닦아 준다는 것이 죽음을 없애 버린다는 것과 관련을 맺고 있는 이사25,8의 내용을 반영시켜 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죽음으로 야기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순수한 눈물로 이해하게 하고 있다. 눈물이라는 것에 고통의 표현이나 다른 표현들이 연결되어 있다. 우선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빌론으로 하여금 사치스러움과 호화스러움의 자리를 차지하게 해야만 했었던 죽음이다. 그 다음으로 울부짖음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데 동양에서는 장례당할 때의 슬픔을 그런 식으로 표현해 왔었다. 이러한 죽음과 슬픔, 울부짖음과 고통의 원인은 물질적 부를 잃는데 있다.




2.2. 새로운 세상(21,5-8)


옥좌에 앉으신 하느님꼐서 말씀하신다. 그 말씀 속에서 ‘창조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약간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이유는 창조하다라는 동사의 명사인 Ktisis는 ‘하느님의 창조의 근원이신 분’이라는 그리스도론적 표현을 사용하는 3,14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향하고 있는 묵시록 안에서 창조에 대한 성서적 주제를 자주 접할 수 없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하지만 ‘행하다’라는 동사를 단순하게 사용하는 경우 그저 평범한 의미만을 드러내기위해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묵시록에서 창세2,4의 의미로(지어내신) 그 동사가 사용되는 것은 오직 묵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뿐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상 곧 하느님의 세상이 생겨 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행함만 있으면 된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두 번의 행함을,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여덟 번의 행함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은 여기서의 모습과 극히 대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두 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믿을 만하고 참다운 말을 글로써 기록하라고 새롭게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행함은 곧 말씀인 것이다.




3. 천상 예루살렘과 여인(21,9-13)


이 장면 속에서 선견자 요한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마지막 재앙들이 가득 담겨 있는 대접으 가지고 온 일곱 천사 중의 하나로 9절은 문학적으로 볼 때 대 창녀에 관한 환시의 개막을 서술하고 있는 17,1을 다시 취하고 있는 것이다. 17,1과 21,9이 문학적으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대 창녀와 어린양의 신부 곧 바빌론과 예루살렘이 서로 상반되는 실재임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대접을 가진 천사들 중의 한 천사를 선택했다는 것은 복음이란 것이 심판임과 동시에 은총임을 알고있는 묵시록 저자의 의도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 천사는 바빌론의 패망을 예언하고 있지만, 패망이 사실상 이루어지는 것은 18,1에서 또 다른 천사가 잔을 들고 와서 바빌론의 패망을 알려주고 확증해 줄 때이다.


묵시21,23에서 이 도성은 솔로몬이 첫번째 성전을 지어 하느님께 봉헌할 때의 기도 속에서처럼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지 않으며, 특별한 건축물 속에 거처하게 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모든 영광은 신부인 도성과 뒤섞여 있는 듯 보이며, 그 도성에 벽옥의 빛을 부여한다. 즉 하느님의 영광은 진귀한 것으로, 색으로, 곧 생명의 색으로 상징화되고 있는 것이다.




4. 성벽과 성문(21,14-21)


이곳의 내용은 성서적 전승, 특별히 이사 54,60-66과 에제40-48장에서 그 원천을 취하고 있다. 도성의 각 면에 새개씩의 주춧돌이 놓여져 있으며 문을 통해 서로의 주춧돌이 구분되게 된다. 각 주춧돌은 어린양의 사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특성을 부각시켜 준다. 그 백성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건설하시는 종말론적 이스라엘인 것이다. 이 도성은 우선 정방형으로 묘사되는데 정방형은 성서적으로 완전성, 성취를 의미한다. 묵시록 저자는 열두 개의 보석으로 전(全) 이스라엘을 표상했던 대사제의 가슴받이를 모델로 사용함으로써 땅과 바위에서 끄집어낸 가장 값진 것들로 새로운 도성을 장식하려 했는데, 그런 보석들을 모아 도성을 꾸민 것은 그 도성에 대한 최고의 명예를 표명하는 것이다. 




5. 성전의 부재(21,22)


여기서 묵시록 저자는 그토록 기다려 왔던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유다인들의 종말론적 희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즉 새로운 성적는 살아 있는 돌 곧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성전의 지성소는 서로 유리될 수 없는 하느님과  어린양이시라는 것이다.




6. 빛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21,23-26)


영광과 빛은 이 부분을지배하는 핵심적인 용어들이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용어는 세 번 나타나는데, 즉 하느님의 영광과 세상의 왕들의 영광과 민족들의 영광을 표명해주고 있는데 서로의 뉴앙스는 다르다. 이 본문에 직접적으로 영감을 준 성서 본문은 이사 60,19이라 할 수있다. 성전이 파괴되어 사라져 버림으로써 전례력을 고정시켜 주었던 별들도 사라져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축제는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영광은 지속적인 방식으로 그 자리에 현존하고 있으며, 축제는 그런 모습 속에서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60,19)에서는 달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묵시록 저자는 어린양이신 도성의 등불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고 있다. 즉 하느님의 모든 영광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표명되기에 어린양은 하느님 현존을 항구히 드러내 주는 등불이신 것이다.




7. 선택된 자들의 통교(21,27)


하느님의 예루살렘은 새로울 뿐만 아니라 거룩하다. 종말을 새로운 세상이나 천상 예루살렘처럼 말할 때 그것은 항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구체적인 행동 양식에 관계된다. 천상 도성에 들어갈 수 없는 부정함은 두가지 용어로 표명되고 있는데, 하나는 흉물스러운 짓이요, 다른 하나는 거짓을 일삼은 일이다. 흉물스런 짓은 일반적으로 이방인적인 왜곡된 모습을 지칭하는 데 반해, 거짓은 할 수 있는 행동을 비뚤어지게 하는 모든 행위에 상응한다.




8. 천국 낙원(22,1-5)


8.1.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22,1-2)


여기서 환시를 보여주는 천사는 21,9에서의 천사와 동일한 천사이며 그 내요은 에제47,1-12와 창세2,8-10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묵시록 저자는 두 개의 내용을 접목시킴으로써 단순하게 낙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만을 예고하지 않는다. 이 에덴 동산은 구원역사에 근거하고 있고, 에덴 동산에 물을 대는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이 결정적으로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어린양이 분명하게 현존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어린양이 주시는 생명과 구원이 풍성하게 흘러 넘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에제 47,12로부터 영향을 받은 과일나무와 잎에 대한 내용은 구원역사가 성취된 것과 구원의 종착지를 예언한 예언들이 성취된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다.




8.2. 중단없는 경신례(22,3-5)


성도들의 통교는 저적으로 전례적인 것으로 새로운 경신례인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아무도 죽기 전에는 하느님을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을 본다는, 그런 실현 불가능한 꿈이 나날의 실재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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